하프 마라톤을 완주하다

아무튼, 다이어트

by 담백

이 글을 쓰기까지 4년이 걸렸다. 4년 전 추운 겨울바람이 코끝을 아릴떄 불현듯 달리기를 시작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머리속을 스쳤다.


어린 시절, 나는 늘 달리는 순간만은 피하고 싶었다. 단순히 숨이 차고 다리가 아픈 게 아니라, 달리기라는 경기 자체가 두려움으로 다가왔다. 초등학교 운동회, 체육시간, 학년별 대항전. 교정에 선 수십 명의 아이들이 준비 자세를 취하고 있을 때, 내 심장은 늘 요동쳤다. 언제 쏠지 모르는 총소리에 모든 촉각을 곤두세우며 기다리는 시간, 귀를 가득 매우는 출발 신호탄, 쏜살같이 달려나가는 친구들틈에 전력으로 달려봐도 좁혀질 수 없는 거리에서 그냥 이쯤에서 포기해 버리고 싶다는 느낌, 내가 못하는 일을 그 많은 관중들 앞에서 굳이 보여줘야하는 민망함. 나에겐 달리기라는 운동에 호감을 느낄 이유가 없었다. 특히 귀를 때리는 그 짧고 강한 출발신호는, 몸을 움직이게 하는 신호가 아니라 오히려 전신의 스위치를 꺼버리는 느낌에 가까웠다.


“언젠가 너도 달리기의 즐거움을 알게 되는 날이 왔으면 좋겠다.”

유산소 운동이라면 종류를 가리지 않고 사랑하는 남편은 틈만나면 나에게 달리기의 즐거움을 알려주고 싶어했다. 그 말을 듣고도 행동에 옮기기 까진 꽤 오랜시간 걸렸지만 이상하게 잊히지 않고 마음 한켠에서 계속 맴돌았다. 아마도 '내가 모르는 기쁨'에 대한 궁금증 때문이였던 것 같다.


나의 첫 러닝


그날은 유난히 날씨가 좋았던 것도 아니고, 마음이 특별히 가벼운 날도 아니었다. 무언가를 해야겠다는 다짐이 있었던 것도, 누군가가 나를 밀어준 것도 아니었다. 그저 문득, 몸 어딘가에서부터 이상하게도 ‘한번 달려볼까’ 하는 생각이 솟아올랐고, 그 낯선 충동은 생각보다 강하게 나를 이끌었다.


별다른 이유도 없이 그런 생각이 들었다는 것 자체가 나에겐 의외였고, 이 순간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느리든 빠르든, 그냥 한 번도 멈추지 않고 끝까지 가보고 싶다는 마음이 불쑥 들었고, 그 마음이 잦아들기 전에 나는 운동화를 꺼내 신고 이어폰을 귀에 꽂은 채 집을 나섰다.


처음 몇 분간의 달리기는 예상보다 훨씬 버거웠고, 숨이 금세 거칠어졌지만, 나는 이상하게도 그 모든 감각이 싫지 않았다. 오히려 그 무겁고 빠듯한 호흡 속에서 내 몸이 깨어나는 느낌이 들었고, 조금씩 속도를 조절해가며 호흡과 보폭을 맞추다 보니 어느새 거칠었던 호흡이 잦아들고 있었다. 귓가에 또렷이 들리는 심장박동이 뭔가 가쁘게 느껴지지 않았다. 달리기는 '숨 차는 것' 이라는 깊게 뿌리박혀있던 선입견이 깨지는 순간이였다. 신선한 충격이였다.


뭔가 대단한 걸 한 것도 아닌데, 단지 20분 동안 쉬지 않고 달렸다는 사실만으로도 내 안에 오래 묵혀 있던 무력감이 조금은 옅어진 것 같았고, 그날의 달리기를 끝내고 나서야 나는 알았다.
그가 말했던 ‘즐거움’이라는 게, 꼭 달리는 그 순간에만 오는 게 아니라, 다 뛰고 난 뒤 어딘가 깊은 곳에서 천천히 밀려오는 이 홀가분함일 수도 있겠다는 걸.


그때 처음 알게 됐다. 장거리 달리기는 단거리와는 전혀 다른 운동이라는 사실을. 장거리는 누가 더 빨리 달리는가를 겨루는 종목이 아니라, 얼마나 오랫동안 자신을 밀어붙일 수 있는가를 묻는 일종의 자신과의 싸움이었다. 폭발적인 에너지로 출발선을 뛰쳐나가는 것도 중요하지 않았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는 경쟁에도 큰 의미는 없었다. 중요한 건 오직 나 자신의 리듬을 유지하며, 내가 할 수 있는 순간까지 도달하는 것이었다.


그 느슨하면서도 분명한 기준이 마음에 들었다. 빠르지 않아도 괜찮다는 것, 등수를 놓고 경쟁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 지금 숨이 찼다면 잠깐 속도를 줄여가도 된다는 것. 중요한 건 끝까지 최선을 다하고자 하는 의지, 그리고 자신만의 속도로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는 꾸준함이었다. 이런 방식의 달리기라면, 나는 충분히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때부터였다. 달리기를 피하지 않게 된 건.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달리기 안에서 나만의 자유를 느끼기 시작한 순간이었다.


하루 하루가 모여 쌓아진 변화


하프마라톤을 목표로 삼기 전까지, 나는 거의 3년 동안 매일 2km씩 달리는 습관을 이어오고 있었다. 처음에는 짧은 거리도 숨이 찼고, 하루 건너뛰는 날도 많았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그 2km가 내 일상 안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었다. 그렇게 조금씩 익숙해지다 보니 5km, 10km 대회에도 몇 번 나가보게 됐고, 달리는 거리에 대한 감각도 점점 생겨났다.


하지만 하프마라톤을 준비하기로 마음먹었을 때는, 그때까지 해왔던 방식만으로는 부족할 것 같았다. 그냥 거리를 늘린다고 되는 일이 아니라는 걸 어렴풋이 알고 있었고, 그래서 좀 더 꾸준하고 체계적으로 해보기로 했다. 처음 계획은 매일 4km씩,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달리는 것이었다.


시작하면서도 ‘근데 이게 진짜 될까?’ 하는 생각이 계속 반복됐고 준비를 하면서도 막연한 두려움이 공존했다. 달리기 자체보다 오락가락 하는 감정을 컨트롤하는게 더 어려웠던 것 같다. 내가 과연 21km를 뛸 수 있는 사람이 맞나 싶은 마음이 자주 들었지만, 그런 생각보다 우선은 몸을 움직이는 게 중요하다고 믿기로 했다. 그래서 그날그날 할 수 있는 만큼만, 하지만 내일도 다시 할 수 있을 정도의 강도로 달렸고, 하루에 짧게라도 근력운동을 곁들이는 것도 빠뜨리지 않았다.


몸이 무거운 날은 0.5km 정도 줄이고, 컨디션이 괜찮을 땐 반대로 0.5km 정도 더 뛰었다. 그렇게 조절해가며 일주일에 다섯 번, 20km를 채우는 걸 기준 삼았고, 매주 그 리듬을 지키려고 노력했다. 목표는 단순했다. 기록이 아니라, 꾸준히 이어갈 수 있는 패턴을 만드는 것.


자연스럽게 생활도 달라졌다. 운동을 중심에 두고 하루가 짜이다 보니, 먹는 것도, 자는 것도, 몸의 흐름에 맞게 조율하게 되었다. 원래도 술을 자주 마시는 편은 아니었지만, 대신 즐겨 먹던 디저트나 밀가루 음식은 조금씩 줄였다. 체중도 큰 변화 없이 일정하게 유지됐고, 무엇보다 하루하루 컨디션이 안정적인 게 가장 좋았다.


억지로 몰아붙이지 않으면서도,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균형을 찾으려고 했고, 그 균형이 조금씩 쌓이며 나도 모르게 이전보다 단단해지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마지막 연습


대회 3주 전쯤부터는 남자친구와 함께 주말이면 10km를 달리기 시작했다. 처음엔 같이 뛰는 게 동기부여가 되기도 했고, 거리 자체도 익숙하다고 생각했는데, 이상하게도 생각보다 힘들었다. 페이스가 조금만 빨라져도 호흡이 흐트러졌고, 달리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몸이 무거워졌다.


나름대로 훈련을 계속해왔지만, 그 거리조차 힘겨워진다는 사실이 꽤나 충격이였다. 왠지 해낼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머리를 가득 채웠고, 꼭 막판에 가서 포기해버리고 싶은 고약한 충동이 발동했다. 준비해온 시간이 아까운 마음보다도, 그걸 완주하지 못할까 봐 느껴지는 불안과 위축이 더 컸고, 그래서인지 기분도 조금씩 가라앉았다. ‘내가 왜 이걸 하겠다고 했을까’ 싶은 회의감도 있었고, 몸도 마음도 예민해졌다. 그 시기의 나는 달리기를 계속하면서도 점점 더 자신을 밀어내고 있었다.


그래도 결국 마음을 조금 바꿨다. 연습해온 게 너무 아까웠고, 지금 이대로 그만두면 나중에 더 후회할 것 같았다. 완주가 아니어도 괜찮다고, 중간에 멈춰도 괜찮다고, 그냥 내가 할 수 있는 만큼만 해보자고 생각을 바꿨다. 누구에게 보여주기 위한 메달도 아니였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나를 출발선까지 데려가는 일이였다. 그 이후는 그 때 상황에 맡겨버리자고 생각하니 마음이 가벼워졌다.


그리고 21.0975km


대회 당일, 살짝 구름이 낀 날씨였다. 달리기엔 쨍쩅한 햇빛이 내리쬐는 것보단 오히려 더 나았다. 아침 공기는 약간 서늘했고, 출발선에 모인 사람들의 다양한 표정들과 준비 과정을 지켜보며 느껴지는 현장의 에너지에 살짝 들떴다. 이미 여기까지 와버렸다는 사실이 마음을 가라앉혔고, 어떻게든 이 거리를 끝내겠다는 단순한 각오만 남아 있었다. 사람들의 대화 소리, 주최 측의 안내 방송, 조깅 삼아 몸을 푸는 신발 소리들 사이에서, 나는 늘 하던대로 한구석에서 조용히 준비운동을 했다.


출발 신호가 울리고, 무리 지어 움직이기 시작한 발걸음들 속에 나도 섞였다. 처음 몇 km는 익숙하고 평소보다 가볍게 느껴졌다. 늘 달리던 4km 구간을 지나자 다리에 열이 오르기 시작했고, 호흡도 어느 정도 안정적이였다. 그동안 해왔던 훈련 덕인지, 첫 10km까지는 ‘생각보다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페이스는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았다. 그냥 나에게 맞는 속도였다. 게다가 10km쯤까지는 주변 분위기에도 여유가 있었다. 걷다 뛰다를 반복하는 사람들도 많았고, 옆 사람과 농담을 주고받거나 서로 박수를 쳐주는 장면도 심심찮게 보였다. 그 유쾌한 에너지에 막연한 긴장감이 풀어졌다.


그런데 10km 구간을 지나고 나니, 사람들의 표정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웃던 얼굴은 굳어졌고, 호흡은 깊어졌고, 주고받던 말소리는 어느새 잦아들었다. 그 지점부터는 뭔가 아마추어와 프로가 갈리는 느낌이랄까, 즐긴다는 느낌보단 완주라는 목표에 대한 무게감이 느껴졌다.


하지만 13km쯤, 평소보다 이르게 힘이 빠지기 시작했다. 햇살이 올라오기 시작했고, 몸속 수분이 줄어드는 게 느껴졌다, 다리의 감각도 서서히 옅어졌다. 무리해서 뛰면 무릎이 무너질 것 같았고, 걷자니 다시 달릴 수 있을까 두려웠다. 그 지점에서부터는, 내가 얼마나 달릴 수 있느냐보다 '어떻게든 나아가는' 쪽에 집중해야 했다. ‘지금 포기해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중간중간 스쳐 갔고, 그럴 때마다 내가 준비해온 날들이 떠올랐고, 여기까지 온 거리도 무시할 수 없었다.


그 힘든 구간에서 옆에 함께 달리는 사람들의 존재가 큰 위로가 되었다. 말은 없었지만, 숨소리와 발소리, 어깨로 스쳐 가는 거리감, 누군가가 내 옆에서 같은 속도로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이 큰 힘이 됐다. 혼자 뛰어왔던 날들과는 분명 다른 감정이었고, 이건 그 자리에 있어본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종류의 무언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지만 각자의 이유로 이 거리 위를 달리고 있다는 것, 그 공기를 함께 나누고 있다는 감각이 묘하게 지탱이 되어주었다.


18km. 이제 3km 남았다. 남은 거리는 훈련할 때 늘 뛰던 구간보다도 짧았지만, 그 3km는 그 어느 때보다 멀게 느껴졌다. 발이 바닥에 닿을 때마다 충격이 다이렉트로 몸 구석 구석 전해졌고, 양옆으로 지나가는 사람들의 숨소리마저 무겁게 들렸다. 이쯤 되면 왜 정신력으로 뛰는 구간이라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 1km. 진짜 지옥 같았다. 달리면서 힘들어서인지 은연중에 하프가 20km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20km를 넘겼는데도 결승선이 보이지 않자 약간 당황스러웠고, 이렇게 힘든데 1.0975km를 더 가야한다는게 아찔했다. 그 순간부터 몸 전체에 힘이 빠지는 게 느껴졌다. 아주 잠깐이라도 걷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지만, 멈추는 순간 다시는 못 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발을 질질 끌다시피 하면서도 걷지 않기 위해, 속도를 낮추며 계속해서 뛰었다. 어떻게든, 마지막까지 뛰고 싶었다.


아무렇지 않게, 그러나 확실히 달라졌다


결승선을 통과한 순간, 생각보다 많은 감정이 몰려오진 않았다. 고작 이 정도였나 싶은 건 아니었지만, 상상했던 것처럼 벅차오르거나 울컥하지는 않았다. 그냥, '드디어 끝났다'라는 안도감이 먼저 들었다.


짧지 않았던 준비 기간 동안 여러 번 고민했고, 그만큼 많이 달렸고, 여러 번 무너질 뻔도 했던 걸 생각하면 마치 긴 길의 끝에 마지막 관문을 통과한 것처럼 느껴졌고 그래서인지 오히려 조금은 덤덤하게 받아들였는지도 모른다.


기대했던 것만큼 감정이 터지진 않았지만, 그간의 긴 준비가 이 거리 하나로 끝났다는 사실은 분명히 개운했다. 내 안에 남아 있던 긴장 같은 게 서서히 빠져나가는 기분이었고, 누군가가 등을 두드려주지 않아도 스스로에게 충분하다고 느껴졌다.


마라톤을 끝내고 조금 숨을 돌리곤 바로 근처 사우나로 향했다. 모두 같은 생각인지 사우나는 북적거렸다. 뜨거운 물에서 근육을 풀고 찬물로 식히는 과정을 몇 번 반복하면서, 달릴 때는 느껴지지 않던 피로들이 천천히 수면 위로 떠오르는 것 같았다. 그때서야 내가 꽤 먼 거리를 뛰었구나 싶었고, 몸이 서서히 회복되는 물속에서의 감각이 이상하게 위로처럼 느껴졌다. 피곤함보단 정리가 된다는 느낌이었고, 몸의 열기가 빠져나갈수록 마음도 함께 가라앉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다음 날, 나는 미국으로 출장을 떠났다. 일정을 이렇게 붙여놓은 내 과거의 판단에 대해서는 여러 생각이 들었지만, 어쨌든 피할 수 없는 스케줄이었고, 그냥 예정대로 움직였다. 비행기 안에서 오래 앉아 있으면 다리도 붓고 허리도 뻐근했지만, 예상보다는 훨씬 괜찮았다. 몸이 아주 멀쩡하다고 말할 순 없었지만, 무너지진 않았고, 그게 오히려 신기했다. 하프마라톤이라는 무게를 바로 통과하고 비행기까지 탔는데도 이 정도면 꽤 괜찮은 편 아닌가 싶었다. 내가 나를 너무 과소평가하고 있었던 건 아닐까 싶은 생각도 들었고, 그 힘듦을 버틴 몸이 고맙기도 했다.



다시 하프마라톤을 뛸지는 잘 모르겠다. 솔직히 말해 또 그만큼을 준비할 자신이 지금은 없다. 그리고 그 긴 거리를 다시 반복하고 싶은 마음이 크지도 않다. 하지만 그렇다고 달리기를 멈춘 건 아니다. 나는 여전히 달린다. 긴 시간이 아니어도 괜찮고, 뭔가 대단한 목표가 없어도 괜찮다. 아주 짧은 시간일지라도 뛰고 나면 몸이 조금은 가벼워지고, 기분이 괜찮아지고, 그 상태에서 하루를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걸 안다. 하기 전엔 여전히 ‘오늘은 안 될 것 같은데’라는 생각이 먼저 들지만, 막상 시작하면 또 괜찮다. 그리고 그 괜찮음을 반복하면서, 어느새 달리기는 내 삶 안에 자연스럽게 들어와 있었다.


지금의 나에게 달리기는 기록도 경쟁도 아니다. 나를 유지하는 하나의 방법이고, 가끔은 나를 다시 다잡기 위한 도구다. 특별하지 않아도 좋고, 누군가에게 설명되지 않아도 괜찮다. 그냥 내가 나를 놓치지 않기 위해 택한 아주 단순한 방법, 달리기는 그런 식으로 내 하루를 계속 움직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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