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사진은 직관보다 멀리 있을 확률이 높다

결정도 마찬가지

by 청년실격

나는 파리를 3번 여행했다. 첫 방문인 2013년엔 사진을 안 찍었다. 그래서 잔상뿐이다. 2017년 아일랜드에서 어학연수 동안 파리를 다시 찾을 기회가 생겼다. 그때는 사진에 몰입해 있었다. 열심히 파리를 기록하고자 했다. 메모리 카드를 백업하고, 렌즈도 닦고, 동선도 짰다.


그리고 도착한 첫날부터 둘 째날까지, 나는 배경만 다르게 무수히 에펠탑 사진만 찍었다. 어째 에펠탑 스냅 촬영을 위한 출장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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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찍었던 에펠탑 사진들

내가 에펠탑 사진만 주구장창 찍은 건 “파리다운 것”의 가장 쉬운 접근법이기 때문이었다. 파리에 왔으니 파리를 대표하는 이미지를 담고자 노력했고, 그러다 에펠탑이 보이면 냉큼 셔터를 눌렀다. 파리는 높은 건물도 적다. 에펠탑은 멀리서도 보였다. 2일 차에 숙소에 돌아와 보니 주구장창 에펠탑뿐이었다.


이러다간 복귀까지 에펠탑만 찍을 것 같았다. 그럴 순 없지. 2일 차 게스트하우스에서 종이와 펜을 들었다. 가장 가운데에 동그라미를 그리고 파리를 써넣었다. 그리고 파리 이미지를 줄기 쳐 나갔다.


당연히도 첫 번째는 에펠탑이다. 파리가 에펠탑이고 에펠탑이 파리다. 곰곰이 두 번째를 떠올렸다. 언젠가 영화에서 본 루브르 박물관도 기억에 남는다. 세 번째는 "예술가의 도시"다. 네 번째는 바게트 빵.... 등등 순으로 적어 나갔다. 점점 번호가 뒤로 갈수록 직관적인 이미지보단 개념어와 닮아갔다. 에펠탑에서 예술가의 도시로 뻗친 것처럼. 동사의 형태도 적혔다. 악취 나는 파리 지하철, 혹은 팔찌를 강매하는 사람들..그렇게 적힌 리스트가 파리 이미지 재료였다.


3일 차부턴 에펠탑에 관심을 덜 썼다. 어제 기록한 이미지를 발견하려고 했다. 그러고 보면 사진을 찍는다는 게 단지 셔터를 누르는 찰나에만 한정되진 않는다. 셔터 이전에 세상에 대한 호기심이 먼저지 않을까. 적어놓은 리스트 덕에 조금 더 구체적이고 입체적으로 파리를 담았다. 잘 찍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에펠탑 사진은 조금 덜 담긴 파리 모습들을.


아주 작은 차이지만 이런 인식의 전환과 집요함은 세상을 살아갈 때에도 도움이 됐다.


얼마 전부터 파이어에 관심이 많다. 경제적 자유를 말한다. 회사를 일찍 은퇴하기 위해선 많은 돈이 필요하다. 그래도 대략 30억은 있어야 안정적이지 않을까?

목표가 정해졌다. 이제부턴 모으면 된다. 그런데 현재 정규직으로 받고 있는 급여로는 30억을 모으기엔 턱없다.


그러면 이 괴리에서 문제가 출발한다. 나는 30억이 필요하지만 부족하니 벌어야 한다. 퇴근 후 돈 버는 가장 쉬운 방법은 부업을하는 거다. 아르바이트는 내 시간과 체력으로 돈을 맞바꾼다. 확정적이고 확실한 해결책이다. 실제로 얼마 전까지 대학생 때만큼이나 열심히 구인구직 사이트를 뒤졌다. 퇴근 후 대리 운전도 옵션이었다.


그런데 말하자면 “돈을 벌기 위해 퇴근 후 아르바이트를 하는 것” = “파리 사진은 에펠탑”처럼 첫 번째로 떠오르는 방법이다. 사실 파리를 잘 담기 위해선 에펠탑만 잘 찍어도 성공하니 틀렸다고는 할 수 없다. 돈을 더 벌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하면 복잡한 다른 고민이 필요 없다. 꼬박꼬박 월급이 꽂힌다.


하지만 동시에 알바는 너무 쉬운 접근법이다. 에펠탑 사진과 같이, 언젠가부터 직관적으로 떠오르는 생각은 유보하는 버릇이 생겼다. 파리를 그리고 이미지를 펼쳐가는 작업 비슷하게, 그 질문을 에이포 용지 가운데 두고 계속해서 그다음 방법, 그다음 방법을 고민했다. 당장 첫 번째 해결책으로 접근하기보단 조금 더 집요하고 다른 차원으로 접근하려는 방식은 말하자면 보이는 데로 파리를 찍지 않고, 생각한 대로 파리를 찍는 촬영 법이다.


느닷없지만 그 고민의 결과로 글을 쓴다. 글쓰기는 돈이 안 된다. 한 시간 일하면 만 원이라도 벌지만 한 시간 쓴다 해도 급여는 없다. 그럼에도 적어놓은 글은 나름의 복리 효과라 누적될수록 그 가치가 눈덩이처럼 커진다. 차곡차곡 글이 쌓이면 얼마 뒤엔 최저 시급보다도 더 큰 가치로 돌아올 수도 있다. 꼭 시급 관점에서뿐만 아니라 글쓰기는 일단 재밌고, 또 생각을 갈무리한다는 점에서 유익하다.


어쩌면 글쓰기는 돈 벌기와 아주 먼 곳에 위치하는 방식일지 모른다. 마치 파리를 찍겠다고 떠난 곳에서 엉뚱한 사진을 찍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어쩔 땐 파리가 조금 덜 드러나는 사진도 직관적으로 파리인 사진보다 더 아름답게 느껴지는 경우, 혹은 더 파리답게 느껴지는 사진도 있다. 아래 사진에서 에펠탑은 없지만 그럼에도 꽤 파리답게 느껴지는 것처럼.

2022-03-05 17_16_18-Jooho(@jooho201) • Instagram 사진 및 동영상 - Chrome.jpg 2018년 파리 무슨 공원에서
2022-03-05 17_10_51-Jooho(@jooho201) • Instagram 사진 및 동영상 - Chrome.jpg 2018년 퐁네프 다리에서

다시 한번, 좋은 사진은 직관보다 먼 쪽에 있을 수도 있다. 어쩌면 “사진”을 “결정”으로 바꿔도 말이 될 수 있겠다.

더 많은 사진은 인스타그램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https://www.instagram.com/jooho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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