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선의 사진

지금, 여기를 잘 찍는 일

by 청년실격

인턴으로 근무했던 곳에 정규직 면접을 보러 간 날, 일순간 안정을 되찾은 건 다름 아닌 화장실 디퓨져 향기 때문이었다. 마지막으로 옷매무새를 정리하고자 들어간 화장실에서 그 익숙한 향이 들어오자 내 공간을 되찾았다는 생각에 평화를 얻었다. 후각이란 그만큼이나 강렬한 방식으로 기억을 소환한다.


청각도 마찬가지다. 나는 언제라도 2NE1의 I don't care를 들으면 고등학교 여름날로 돌아간다. 그 더운 날 버스 정류장과 MP3가 아른거린다.


이와 달리 사진이 소환하는 과거는 차분하다. 시각은 영화적이다. 찍었던 사진을 보면 사진의 전, 후 순간이 재생된다. 이 사진을 찍으면서 무슨 생각을 했는지, 어디로 향하던 길이었는지, 날씨는 어땠는지, 친구랑 무슨 대화를 했는지가 떠오른다.


나에게 다른 감각이 과거를 소환하는 방식이 뜨겁고, 즉각적이고, 감각적이라면, 사진은 차분하고, 시간이 걸리고, 이성적이다.

2017년 베네치아

이 사진은 이탈리아 베네치아에 처음 도착한 날 찍은 사진이다. 한인민박에서 3개월 간 스태프 일을 맡게 됐다. 간단한 안내를 받고 한 바퀴 산책 나온 길이었다. 앞으로가 기대되고, 설레면서 동시에 걱정도 들었다. 오후 6시 근처였던 걸로 기억한다. 저 다리를 건너면 마주하는 골목도 생생하다.

2017년 스위스

스태프일을 마치던 참에 부모님이 유럽을 찾았다. 황금연휴 추석이었다. 부모님과 스위스 산을 내려오면서 찍었다. 왜 아버지들은 항상 앞서갈까, 그리고 도대체 왜 어른들은 산을 좋아할까를 생각했다. 지금도 저 사진을 보면 그 아름답던 산을 하이킹해서 내려오던 순간과 생각과 감각이 떠오른다.


회사에서 사진첩을 보다가 울컥했다. 사진이 시선에 대한 기록이면, 당시 풍경과 지금이 너무 달랐기 때문이다. 그 차이가 어이가 없을 지경이다.

사진첩 속 나는 나이아가라 폭포를 본다. 계절별로 다른 에펠탑을 보고, 뉴욕 빌딩 숲을 찍는다. 베네치아를 걷고, 부모님과 스위스 산을 하이킹한다.


하지만 내가 발 붙이고 있는 현실은 충청도 어느 한 제약 공장이다. 듀얼 모니터 속 SAP와 여러 엑셀 파일이 팝업 돼 있다.

나이아가라는 어디 가고 업무일지 파일에서 우선순위를 짠다. 어떻게 하면 파티션 너머로 들리는 저 일이 나에게 넘어오지 않을지를 걱정한다. 팀장 기분을 눈치 본다. 정말이지 그 사진을 찍고 다녔던 "나"가 같은 사람 맞는지 싶다. 지금과는 너무 다른 사람이란 게 서글프다.


다만 그러자고 당장 퇴사하고 카메라를 들고 어디든 떠날 수도 없을터. 이제 그렇게 철부지 나이는 못된다.

나는 이 간극을 다시금 사진으로 좁혀보고자 했다. 만약 이곳도 아름답게 찍을 수 있다면 내 서글픔을 조금은 덜어낼 수 있을까 싶어서. 이곳을 잘 찍다 보면 어쩌면 좋아질 수도 있으니까.


그리고 아래는 그렇게 다짐하고 한 장 한 장 찍어 내려간 사진들.

집 앞 어느 초등학교
공장 건물
회사 근처 카페에서
여름날 공장 운동장
가을날 공장
겨울날 출근길에

내가 좋아하는 어느 철학자는 "언어의 한계는 사고의 한계"라는 훌륭한 말을 했다. 그 말을 빌리자면 "시선의 한계는 사진의 한계"다. 나는 딱 본 만큼만 찍을 수 있다.

만약 예쁘게 보지 못했다면, 예쁜 사진을 찍을 수 없다. 그 역은 이렇다. 예쁜 사진을 찍었다면, 그것은 예쁘게 봤기 때문이다.


글쎄, 내가 이 공간을 정말로 사진처럼 봤을까. 나는 충청도 시골 동네가 싫다. 출퇴근 논밭 길과 밤새 우는 개구리가 지겹다. 회사는 더욱 그렇다. 엑셀과, 눈치와, 파티션 너머를 훔치는 일은 신물 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사진을 찍어가면서 조금은 정을 붙여보려고 했다. 아름다운 부분을 찾고자 노력했다. 그리고 어느정도 달성했지 싶다. 위 사진들이 결과물이니까.


사진 전도사인 나는 다시 한번 사진을 권한다. 만약 지금 있는 곳, 혹은 현실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가능한 그 공간을 아름답게 찍어보자. 물론 드라마틱하게 입장이 바뀌진 않는다. 하지만 아름다움을 찾으려는 시도는 태도를 수정해준다. 좋은 것, 예쁜 점을 찾으려는 의지 자체가 실제로 그 공간과 현실을 조정한다.


그러다 보면 정말로 그 공간과, 현실이 이전보단 조금 더 좋아질지도 모른다.


지금, 여기를 최선으로 찍는 일. 어쩌면 그것은 적극적으로 행복을 찾는 방법과 닮은 것도 같고.

더 많은 사진은 인스타그램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https://www.instagram.com/jooho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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