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름 카메라로 찍는 일

유한함이 주는 태도

by 청년실격

나는 공급망 사슬이라는 SCP(Supply Chain Planning)에서 커리어를 시작했고, 지금은 생산기획이 직무에서 일한다. 두 직무 모두에서 Leadtime은 중요한 문제다. 리드타임이란 "소요 시간"이라고 간략히 말할 수 있는데 이 리드타임을 기초로 공정별, 혹은 작업별 계획을 짠다. 좋은 계획을 세우기 위해선 리드타임을 이해하는 것에만 그치지 않고 효율적으로 운영까지 할 수 있어야 한다. 물론 나는 리드타임을 고민하는 리드타임이 너무 길어서 잘 못 짠다.


촬영이란 리드타임에서 보자면 필름 카메라는 최악이다. 찍고 나서 바로 확인 가능한 DLSR과 달리 필카는 4~5일 후에야 결과물을 볼 수 있다. 완성된 필름을 들고 사진관에 맡겨서 인화하는 데 걸리는 시간이다. 심지어 5일도 부지런한 사람 얘기지, 나 같이 게으른 사람은 한 달이나 묵힌 사진을 인화하면서 "내가 이런 사진을 찍었나"싶은 일도 많다. 메멘토가 된 기분이다.


게다가 비싸다. 일단 필름 카메라가 필요하다. 중고는 10만 원부터 라이카라는 명품 카메라는 몇 백만 원 한다. 매번 필름도 사야 한다. 24롤과, 36롤이 있다. 숫자는 촬영 가능한 횟수를 뜻한다. 그러니 꼬박 24번, 혹은 36번 셔터를 누른 후에는 필름을 갈아준다. 인화에도 돈이 든다. 사진관마다 다르지만 대략 장당 300~500원 정도다.


DSLR과 달리 필카는 좀 유난이다. 그게 매력일 수도 있고.


나는 필카 사진이 좋다. 필카엔 분명 감성이 있다. 무언가 명징하게 직조하지 않고 촉촉하고 추상적인 질감이다. 실제로 특정 영역에서는 DSLR이 절대 흉내 낼 수 없는 필카의 깊은 맛이 있다. 가령 사진의 깊이나 분위기 같은 점에서.


게다가 필카로 사진을 찍다 보면 조금은 작가주의적인 감상에 젖는 기분도 생긴다.


나에게 있어 DSLR과 필카를 들 때 가장 달라지는 점은 "태도"다. 필카는 셔터에 신중하다. 앞서 말했듯 필카는 비용과 시간이 든다. DSLR처럼 마구 셔터를 누를 수 없다. 한 번 한 번이 전부 돈이다.

그런 특성 때문에 필카로 사진을 찍을 땐 차분히 풍경을 살핀다. "셔터를 누를만한 풍경인가?"를 고민한다. 언젠가는 그렇게 모든 풍경을 기각시키고 몇 장 찍지도 못한 채 복귀한 날도 있다. 디지털카메라를 들고 있을 때보다 더욱 예민하고, 날이 서 있으며, 집중한다.


유한함이 결정을 숙고하게 만드는 건 필카에만 적용되는 일은 아니다. 나는 필름처럼 우리 삶도 언젠가 소멸될 거란 사실을 떠올릴 때마다 자세를 바로 잡는다.


가끔씩 작은 일에 과몰입하면 삶이 유한하다는 사실을 잊는다. 눈앞에 급급한 일에 너무 많은 시간과 체력을 뺏긴다. 우리는 모두들 죽는다. 단지 시기의 문제일 뿐이다. 당연한 사실을 자주 망각한다.

야근을 하다가, 주식창을 보다, 혹은 실없는 농담 중 느닷없이 누군가의 부고를 들으면 서늘함이 밀려온다. 그리곤 다시 상기한다. 언제라도 이 세계와 작별할 수 있다는 것을.


죽음을 떠올리면 삶의 우선순위를 조정한다. 몇 년뒤 죽는다면 지금 할 일과 하지 않을 일을 고민해 본다. 마치 DSLR이 아닌 필름 카메라였다면 찍지 않았을 법한 사진들처럼, 최근에 내린 결정들을 복기한다.


필카에서 필름과 셔터를 삶으로 치환하자면 시간과 결정이었을 테니까.


물론 언제나 죽음을 리마인더 하며 진지하고 신중한 결정만을 내릴 수는 없다. 나는 심지어 그런 진지하기만 한 사람은 딱 질색한다.

중요한 건 태도가 아닐까 싶다. 좋은 풍경을 찾기 위해 부지런히 시선을 쏟는 것과 비슷하게, 더 행복한 삶을 위해 바쁘게 탐구하는 태도를 갖는 일. 언제나 정답만을 결정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최선의 결정을 위한 노력들.


구태여 한 번 더 풀자면 좋은 결과를 위한 의지, 신중함, 그리고 실천까지.


어쩌면 결과물 자체는 초점이 날아갔을지 모르겠지만, 그럼에도 그런 태도만 가지고 있다면 운이 좋게 꽤 괜찮은 사진을 남길 수도 있다고 믿는다.

더 많은 사진은 인스타그램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https://www.instagram.com/jooho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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