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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년실격 Nov 30. 2023

품위 뒤에 숨은 무지

남아 있는 나날

남아 있는 나날은 영국계 일본인 작가 가즈오 이시구로 작품으로 원제는 "The remains of the day"다. 나는 그를 노벨 문학상 수상자 정도로 알고 있었다. 막상 수상한 지 수 년이나 흐른 뒤에야 그의 작품을 접했고, 흠뻑 빠지게 됐다.

300Page에 이르는 적당히 두께감 있는 이 이야기는 영국 유서 깊은 집안 달링턴 홀 집사 "스티븐스"가 주인공이자 화자다. 스티븐스는 현재 미국 패러데이 신사를 모시지만, 그는 삶 전체에 걸쳐 달링턴 가문에서 집사로 봉사했다. 당시 집사는 단순한 비서 역할보다 더 막중한 임무를 맡았다. 그는 하인을 관리하고, 집안 전체 대소사와 외부 행사를 지휘하면서 달링턴 가문을 섬긴다.

그는 프로페셔널하다. 스티븐스는 이를 조금 다르게 "품위"라고 부른다. 집사의 품위. 스티븐스가 믿는 품위 있는 집사는 "남이 보든, 그렇지 않든, 최선을 다하는 자세"라고 요약할 수 있다. 마치 연기하다 보면 그것이 진짜가 되는 것처럼, 그는 최고의 집사가 되기 위해 끝없이 노력하고 실제로 그렇게 되어버린다. 사사로운 감정을 내비치지 않는다. 집안 어른이 내리는 결정에 토를 달지 않는다. 소설에선 아버지 임종보다 우선해서 달링턴 집안 행사에 자리를 지키는 모습으로 그의 집사로서의 품위를 그려낸다. 그는 최고의 집사다.

이 소설은 회고하는 방식으로 기록된다. 스티븐스는 오랜만에 받은 휴가에, 수 십 년 전 그와 달링턴 홀에서 함께 일했던 켄턴 양을 찾아가기로 결심한다. 6일간의 그 여정에서 차가 멈춰 서기도 하고, 이상한 길에 들어서기도 한다. 그러는 동안 그는 달링턴 가문이 권세를 누렸던 그 시기를 자주 떠올린다. 그 시기는 1차 대전 이후다. 전 세계 많은 외교관과, 총리, 고위 관직자가 달링턴 홀에 찾아 토론을 펼쳤고, 파티를 가졌다. 스티븐스는 그들을 성실히 접객했다.

마치 위대한 개츠비의 파티장과 같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개츠비가 그 파티로 얻고자 했던 것이 그의 첫사랑 데이지였다면, 달링턴 씨가 소망했던 건, 히틀러에 대한 지지와, 1차 세계대전 패전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나치 독일에 대한 복권이었다.

이렇게 되면서, 이야기는 갑자기 확장된다. 그러면서 첫 번째 질문인 "스티븐스는 얼마나 잘못했나?"를 떠올린다. 그는 단지 집사로서 그 파티와, 토론과, 외교 활동에 서빙을 한 정도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러면 스티븐스는 정말 2차 세계대전의 발발과 반 유대주의에 일고의 잘못이 없다는 말일까. 그럴 수는 없는 일이다. 그는 성실하고 근면하게 살아가는 한 명의 개인이지만, 그가 모신 손님들이 반 유대주의와, 히틀러 주의라면 그 역시 책임을 면피할 수 없다. 이런 "성실하고 근면한 개인이 만들어내는 부지런한 악"은 한나 아렌트가 쓴 예루살렘의 아이힌만에서 주장한 "악의 평범성"이 잘 드러나는 지점이다.

스티븐스는 그가 그토록 추구했던 "품위 있는 집사"로 인해 많은 것을 잃는다. 첫 번째는 켄턴이다. 둘은 서로를 좋아한다. 하지만 품위 있는 집사에게 사내 연애란 불가능한 것. 그는 그녀에게 마음을 열지 않고 그녀는 결국 떠난다. 

 또한 그는 품위 있는 집사가 되기 위해 달링턴 주인의 명을 잘 따른다. 그가 따랐던 명령 중에는 일 잘하는 하녀 2명을 해고하라는 것도 있었다. 이유는 단지 그녀들이 유대인이기 때문이었다. 그는 당연히도 그 명령을 즉각 따랐다. 추호의 의심도 없이.


만약 그가 추구했던 것이 "품위 있는 집사"가 아닌 다른 무언가였더라면 어땠을까. 과연 품위 있는 집사는 누군가에게 중요한 의제가 될 수 있다. 말하자면 삶에서 커리어는 중요한 것이니까. 

다만 조금만 고개를 들어서 양, 옆을 봤더라면 어땠을까. 삶에서 너무 가까운 것에, 너무 개인적인 것에 함몰돼 있다 보면 정작 중요한 것을 놓칠 때가 있다. 나는 그 놓친 것들이 그가 그토록 지키고자 했던 품위에 대한 품삯 같다. 거기엔 아버지 임종, 사랑, 격변의 시대, 농담 등이 있었을 거다.

정말이지, 일본과 얽힌 역사는 싫다만 그들의 문학은 훌륭하다. 특히 "일본스러움"이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특유의 문체가 있다. 무언가 겸연쩍으면서, 그리고 겸손하고, 그리고 사려 깊은 그런 문장과 묘사들. 오에 겐자부로, 나쓰메 소세키, 가와바타 야스나리 등등의 문학에서 나타나는 문장들.

 그런데 이 책은 그런 소위 "일본스러움의 문장으로 쓴 영국의 1차 세계대전 이후 시대물"이란 점이 인상 깊었다. 


올해 꽤 많은 좋은 책을 읽었다만 이 책만큼 훌륭한 책은 없었다. 오점 만점에 오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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