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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년실격 Dec 05. 2023

"조숙함"은 칭찬이 될 수 있을까

새의 선물

어떤 책이나 영화를 보면 "아 조금만 더 어렸을 때 봤으면 좋았을걸"싶은 작품들이 있다. 만약 인터스텔라를 중학교 때 봤다면 나는 고등학교 때 이과로 진학할 수도 있었다. 영화 스포트라이트를 고등학교 때 봤다면 신문방송학과에 진학했을 지도 모른다. 그리고 만약, 은희경 작가의 "새의 선물"을 조금만 더 일찍 읽었다면 지금 내가 어떤 사람이 됐을지를 상상해 본다. 모르긴 몰라도 지금보다 조금 더 20살 무렵 세상과 겉도는 시간은 줄였을 테다. 


새의 선물은 한국 전쟁으로 부모를 잃고, 세상을 너무 일찍 깨달아버린 열두 살 진희의 시점에서 쓰이는 1960년대 후반 동네의 풍경이다. 진희는 할머니에게 양육된다. 그 집에는 서울대 법대를 다니는 의젓한 큰 삼촌과, 12살 진희보다도 더 철부지 같은 이모가 함께다. 4개의 방이 있는 그 집 가운데엔 우물을 중심으로 많은 집과 가정이 얽히고설켜 있는데, 옆집에는 장군이 가족, 광진테라 가족, 최 선생님 가족이 같은 우물을 공유한다. 우물을 공유한다는 건 모든 이야기를 공유한다는 것과 같은 말이다. 


이 소설엔 정말 많고 개성 넘치는 인물이 등장한다. 신분 상승을 꿈꾸며 서울대 법대를 다니는 진희 삼촌을 흠모하는 미스리부터, 시대를 잘 못 만났다며 매일 신세 한탄하는 광진테라 아저씨. 그리고 매일 밤 남편에게 폭력을 당하며 울음을 삼키면서도 끝끝내 그 불운한 삶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는 재성이 엄마. 이모의 가장 절친한 친구이지만 연적인 재경 언니. 그리고 진희 첫사랑인 허석 오빠 등등이다. 진희 시점에서 60년대 후반에 평범한 사람들을 호명하는 일 자체가 소설의 큰 줄기라고 봐도 된다.  

특별한 상황을 마주할 때 주인공 진희는 "바라보는 나"와, "보여지는 나"를 구분한다. "바라보는 나"는 1인칭 시점으로서 경험하고, 체험하고, 실제 하는 "나"다. 이와 반대로 "보여지는 나"는 마땅히 그래야 하는, 혹은 사회적인 의무, 사람들이 기대하는 "나"로서의 모습이다. 

진희에겐 정말 슬픈 일에서도, 동시에 기쁜 일에서도 이 두 개 자아가 동시에 나타난다. 이에 진희는 슬플 때도, 온전히 슬플 수 없고, 기쁠 때도 마냥 기쁘지 못한다. 진희가 이런 양가적인 시점을 가지게 된 배경은 부모에 대한 결핍이지 않을까를 짐작한다. 감정을 너무 빨리 드러낸다는 것은 패를 보여주는 일이니까. 또한 고아가 눈치도 없으면 생존이 어려울 수 있으니. 그 어린 진희가 자신의 성숙함을 스스로 대견해하며 동네 사람들과, 또래들 삶의 이면을 훔쳐볼 때 오히려 그 우쭐함이 안쓰러워 안아주고 싶었다. 


이 소설에는 시대적 배경이 많이 묻어 있다. 촌 마을에 공장이 막 들어서기 시작하면서 보이는 풍경들. 박정희에 맞서 시위하는 학생들. 당시엔, 혹은 아직도 유효한 "빨갱이"란 말들. 재난들. 불륜들. 사랑들.

그런데 이 풍경이 낯설지가 않은 건 소재는 바뀌어도 주제가 동일하기 때문이다. 정치 싸움하는 아버지들도, 재난에 우왕좌왕하는 사람들도, 새로운 기술로 일자리의 풍경이 바뀌는 것도 오늘날까지 뜨거운 주제다. 그러기에 소설 속 처음에 등장하는 열두 살 이후, 더 이상 나는 성장할 필요가 없었다는 진희의 말은, 진희 내면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겠지만 반복되는 시대에 대한 회환, 혹은 환멸로도 들렸다.

이 책을 읽으면 "내가 몰랐던 나의 결핍이 있었을까, 그것은 어떻게 발현됐을까", "어린아이에게 어린아이 답지 않다는 말은 칭찬인 걸까?", "소설 배경인 1960년대 후반과 2022년의 지금은 어떤 점에서 가장 큰 차이를 보이는가"와 같은 질문들을 떠올릴 수 있게 된다.

12살 진희가 주인공인 만큼 10대에 읽어도 좋을 문학이다. 재밌게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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