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젠 매일이 "그냥 일했음"이지만
"그냥 쉬었음"청년이 44만 명이라고 한다. 역대 최대 숫자. 이들 중 75%는 일할 생각이 없다.
나도 비슷한 시기를 거쳤다. 20대 중, 후반 2019년 6월~2020년 2월까지 약 8개월을 "그냥"쉬었다. 돌이켜봐도 어떻게 시간을 보냈는지 기억조차 없다 그 시기를 회상하면 그냥 짙은 터널 안에서 길을 잃은 것 같은 기분이다.
당시엔 "그냥 쉬었음"이란 카테고리가 있는 줄도 몰랐다. 그냥 백수가 백수지. 나도 어떤 카테고리에 속해 있고, 많은 동기가 있었단 걸 알았다면 위안이 됐을까. 그땐 어디라도 소속되고 싶었으니까.
반달이라고 하나. 건달도 아니면서 일반인인 사람들. 강약약강에, 사회에 나쁜 짓을 하고 다니는 어중이떠중이들. 내가 반달이었다는 건 아니고, 그 양쪽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고 붕 떠 있는 그런 상태가 내겐 4학년 1학기 이후부터의 삶이었다.
듣는 과목도 2개뿐이라 학생도 아니고, 구직 활동을 하지도 않아서 취준생도 아니었다. 느닷없이 "창업이나 해볼까"라며 막연한 생각만 하면서, 실상은 유튜브와 넷플릭스를 보면서 하루하루를 죽였다. 본가에 있어 당장 굶어 죽는 것도 아니라 내 삶은 그렇게 수동태로 매일매일이 살아"졌"다. 나는 정말 사치스럽게 시간을 썼다.
처음부터 취준을 포기했던 건 아니다. 4학년 1학기를 마친 여름방학에 한 10군데 정도 회사에 아주 공들여 쓴 원서를 제출했다. 하지만 전패했다. 좋은 네임벨류의 대학교를 졸업한 것도 아니고, 문과에다, 3점 후반대 정도의 학점에, 무경력인 나를 뽑아줄 회사는 없었다.
눈을 많이 낮춘다면 입사할 수 있는 회사도 없지는 않았다. 학교랑 연계된 꽤 내실 있고, 매출도 탄탄한 중소, 중견 기업들이 있었다. 하지만 무슨 오만함인지, 그런 애매한 곳에 취업하느니 안 하는 게 낫다고 믿었다. 그런 곳에서 커리어를 시작했다간 다시는 대기업으로 갈 수 없을 거 같아서. 중소, 중견에 타협하면 내 취업 실패가 현실화되는 것만 같은 기분이라. 중소보단 어쩌면 대기업에 취직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취준생이 더 높은 신분인 것 같았다. 배가 불러도 한참 불렀던 시기다.
누군가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이 "꿈은 큰데, 행동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했나. 그 8개월의 시기가 그랬다. 당시 내 하루 일과는 이렇다.
수업도 없겠다, 매일 오전 11시쯤 눈을 떠서 침대 위에서 한참 핸드폰을 하다 어슬렁어슬렁 거실에 나가 라면을 끓여 먹는다. 취업과는 전혀 무관한 문학 책이나, 혹은 영화를 보다가, 부모님이 퇴근하고 집에 들어오실 시간이 되기 한두 시간 전에 집 밖을 나간다. PC방을 가기도 했고, 축구를 하거나, 혹은 친구들과 카페에서 실없는 농담으로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오히려 술을 진탕 먹거나 버라이어티 하게 놀았다면 덜 억울하지. 그리고 밤 11시가 넘어서 집에 돌아왔다. 그게 내 8개월의 역사였다.
나는 매일이 불안했다. 이대로 정말 아무것도 되지 못한 채 쓸모없는 어른이 돼버리는 건가 싶어서. 그래서 나는 "그냥 쉬었음"에서 "그냥"에 어떤 한숨이 들어있는지 알 것만 같다.
그런 무기력하고, 패배 타성감에 젖은 상태를 하루아침에 극복하는 일은 어렵다. 기적에 가까운 일이다. 나는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그곳에서 나올 수 있었다.
2019년 2월이 되자 더 이상 미룰 수 없어서 카페에 출근해 자소서를 썼다. 이제는 그 불안하고, 지긋지긋한 무위의 상태를 타개하고 싶었다. 하지만 아무리 요리조리 뜯어봐도 자소서에 단 한 줄 적기가 어려웠다. 대충 산 거 같지는 않은데. 입사 최소 요건인 자소서 첫 문항도 넘지 못해서 나는 계속 좌절하고, 무기력함을 느꼈다. 쓸 말이 없어서.
그게 반복되던 어느 날, 나는 그 문항에다 그냥 정말로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적어보기 시작했다. 채용과는 전혀 무관하게. 현대자동차 문항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지원 동기"를 묻는 아주 간단한 문항이었는데 나는 한 마디도 적지 못하던 중이었다. 그러다 무슨 객기가 생긴 건지, 기업에 제출할 지원 동기가 아닌 진짜로 왜 지원하는지 스스로 납득하기 위해 글을 적어 나갔다. 그러자 술술술 써지기 시작했다. 700자를 요구하던 문항인데, 세 시간에 거쳐 2,292자를 썼다. 그 글이 아래의 글이다.
https://brunch.co.kr/@jooho201/56
한 번 재미를 붙이자, 모든 자소서 문항에 내 마음대로 답하기 시작했다. 나는 약 두 달간 대략 20개 정도의 문항에 제멋대로 답변하는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그게 내 첫 번째 브런치 북인 "필패하는 자소서"다.
https://brunch.co.kr/brunchbook/feel-fail
글이 어느 정도 모이자 그걸 묶어서 출판사에 전부 투고했다. 물론 자소서와 마찬가지로 모두 떨어졌다. 하지만 나는 그 작은 프로젝트의 경험을 통해 어쩐지 이전과는 달라짐을 체감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내가 몰두해서 무언가를 만들었고, 그리고 그것에 꽤 자부심도 가지고 있고, 부지런하게 시간을 보낸 것도 좋았다. 이제는 다시는 "그냥 쉬었음"의 상태로 돌아가지 않고 센과 치히로의 터널처럼 그 세계와 영원히 작별할 수 있을 거 같은 건강한 체력을 느꼈다.
필패하는 자소서 이후 나는 나는 내 투고 경험을 자소서에 잘 녹여서 결국에 바이오 회사에 인턴에 취업했다. 투고 딱 한 달 이후였다. 그곳에서 1년간 근무하다, 지금은 중견 제약사로 자리를 옮겨서 직장 생활을 4년째 이어나가는 중이다. 물론 "그냥 일했음"의 상태가 더 행복하냐면 꼭 그렇다고 확언할 수는 없지만, 까마득했던 당시의 터널보다는 지금이 좋다.
혹시 당신이 "그냥 쉬었음"의 상태라면 나는 일단은 그 시간을 충분하게 보내라고 얘기하고 싶다. 급하게 움직인다고 해결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게다가 그 누구도 타인의 삶을 구원해 줄 수는 없다. 당신이 쉬겠다는데, 다른 사람이 거기서 꺼내줄 수 없다는 말이다. 그 터널은 온전히 스스로 벗어나야 한다. 그것도 본인이 만든 연료로.
만약 충분히 쉬었고, 이제는 터널을 나오고 싶은데 그 방법을 모르겠다, 싶으면 일단 아주 작은 단위의 성공 경험을 쌓아가라고 얘기하고 싶다. 이왕이면 창작의 종류였으면 좋겠다. 나처럼 꼭 글쓰기의 형태가 아니어도 좋다. 운동하는 모습을 영상으로 담아서 업로드하거나, 혹은 내가 스스로 만든 작은 프로젝트를 이뤄나가는 과정을 담는 V-LOG 거나. 아니면 이번달에 자소서 50개 제출해 보기,라는 것도 좋고.
그게 뭐가 돼도 좋다. 핵심은 나 스스로 도달하고 싶은 목표를 만들어서 계속해서 조금씩 가까워지는 경험. 그런 아주 작고 작은 성취가 쌓이면 내 안에 어떤 성공 경험이란 근력이 만들어지고, 종래에는 그 터널을 벗어나는 연료가 될 수 있다.
부디 당신의 "그냥 쉬었음"이 너무 오래 지속되지 않기를 바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