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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훈 Oct 10. 2019

비상대피훈련


어제는 우리 공장의 비상대피훈련이 있던 날이었다. 사고를 대비해 질서정연하게 대피하는 연습도 하고, 그러면서 미리 대피로도 알아놓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은 머리로는 잘 알지만 막상 닥치면 귀찮은 감정이 앞선다. 그래도 비상대피훈련 덕분에 비상시 집합장소로 사용하는 사내 공원에서 가을 햇살을 맞으며 잠시나마 사무실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날씨가 좋아서 그런지 대피훈련을 하는 다른 사람들도 그다지 기분이 나쁜 것 같지는 않은 눈치였다.



여기서 일하는 나도 자주 간과하는 사실이지만, 반도체 공장은 황산, 불산, 수소 등 이름만 들어도 살벌한 화학물질과 고압가스 수백 종을 24시간 사용하는 수천 대의 설비가 돌아가는 곳이다. 그렇기 때문에 화재나 지진, 정전 등의 사고에 특히 예민할 수밖에 없다. 당연히 회사에서는 사고가 날 위험이 포착되면 자동으로 설비가 멈추도록 다양한 안전장치를 걸어놓고 있는데, 이를 기술 용어로 인터락(Interlock)이라고 부른다.



물론 비상상황이 펼쳐지기 전 안전장치가 걸려 설비가 멈추면 다행이지만, 현실은 그리 아름답지만은 않다. 설비를 점검하던 엔지니어의 실수에 의해 인터락이 걸리기도 하고, 설비 옆을 지나가던 협력사 직원의 팔에 EMO(비상 정지) 스위치가 눌리기도 한다. 심지어는 원인도 모른 채 가스 알람이 울려 잘 돌아가는 설비가 멈추는 경우도 생긴다. 그럴 때면 담당 엔지니어들은 설비 안에 들어가 있는 웨이퍼를 살리기 위해 모든 노력을 총동원한다.



웨이퍼는 반도체 회로가 그려지는 규소 성분의 원판이다. 이 피자 레귤러 사이즈만 한 원판을 고온으로 굽고, 화학물질을 뿌려 코팅하고, 회로 모양으로 사진도 찍고, 그 사진대로 깎아 내고, 다시 깨끗하게 닦아내기도 하는 등 수백 번의 과정과 수천 대의 설비를 지나서야 비로소 웨이퍼 한 장이 반도체로 탈바꿈한다. 제품의 특성에 따라 다르지만 보통 웨이퍼 한 장에 반도체 400~500개 정도가 나온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가공 중인 웨이퍼, 특히 완성 직전인 웨이퍼는 수천만 원의 가치가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특히나 설비 담당 엔지니어들이 힘든 점은 멈춘 설비를 살리는 일이 그리 간단하지 않다는 사실이다. 만약 설비가 멈췄다면, 일단 멈춘 설비 안에서 가공 중이던 웨이퍼를 살리기 위해 애를 쓴다. 왜 설비가 멈췄는지 원인도 파악해야 하고, 설비를 원래대로 가동하기 위해 기본 설정을 다시 세팅한다. 그동안의 진행 상황은 설비와 관련된 제조/기술팀 등 관련 부서에 공유하는 것은 물론이다. 만약 설비 여러 대가 사고로 인해 동시다발적으로 멈췄다면...? 그런 상황은 상상하기도 싫다.



작년에 일어난 정전사고로 공장을 복구하느라 내내 고생했다는 이야기를 과장 잔뜩 섞어 친구들에게 하다가, 그냥 리셋하면 되는 거 아니냐는 대꾸를 들었을 때 어찌나 당황스럽던지. 내가 바로 대한민국 반도체 산업 최전선에서 일하고 있는 공돌이라는걸, 나도 돈 벌려고 고생 많이 하고 있다는 걸 친구와 가족들에게 설명해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이 긴 글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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