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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ink Glove Jul 10. 2019

우선 살부터 빼고 오겠습니다

1-3 뉴욕에 가자

나는 노트를 좋아한다. 마음에 드는 디자인의 노트를 보면 사고야만다. 올란도 유니버셜에서는 해리포터의 기숙사 로고가 새겨진 가죽커버의 노트를 샀고, 코치 아울렛 매장에서는 코치 카드지갑 할인가만큼 비싼 코치로고 노트를 샀다. 비싼 것이 좋은게 아니라 디자인이 내 마음에 들어야한다. 출장을 다니면서 뉴욕 공항 선물가게에서 하늘색 바탕에 자유의 여신상이 그려진 몰스킨 노트도 사고, 인천 공항의 카카오 스토어에서 분홍 피치 캐릭터 노트도 샀고, 알라바마 이름 모를 어딘가의 책방에서 본 마음에든 에펠탑이 그려진 노트도 사서 방 안의 책상에 쟁여놓았다. 그 깨끗한 노트에 펜으로 필기를 하면 뭐든 잘 될것 같았다. 일기를 써야지, 공부를 해야지 하며 꺼내서 쓴 노트는 매번 마지막장까지 쓴 적이 없는 듯하다. 늘 앞의 몇장만 쓰다가는 그만두고 한동안 잊어버리기를 반복했다. 그래서 그 많은 노트 중 완전한 새것은 별로 없다. 조금씩 조금씩 뭔가를 쓰다가 그만둔 흔적들이 남아있다.


나에게는 살을 뺀다는 것도 그것과 같았다. 문득문득 나도 독하게 빼야지, 몸무게를 많이 줄여서 제시처럼 날씬해져야지 하며 gym을 등록하고, 요가도 등록하고 살을 빼준다는 약도 먹었다. 당연히 입고싶지만 안 맞는 원피스, 비키니도 사서 옷장에 고이 걸어두었다. 내 스스로가 기니피그 인 것 마냥, 살을 빼려고 결심하는 순간 GNC에가서 weight loss 칸에서 베스트셀러 아이템 부터 뒤져보았다. 신진대사량을 올려준다고 하는 카페인이 잔뜩 든 그 알록달록한 알약을 삼키고 러닝 머신을 뛰고 아령을 들었다. 움직이지 않으면 밤에 잠도 오지않게 하는 그 강한 약들을 먹고, gym 안에서 금발 긴머리를 높게 올려묶고 브라톱과 레깅스만 걸친 채 능숙하게 달리는, 분명 모두의 부러워하는 시선을 느끼며 뿌듯할 그녀들을 힐끗 거리며 나도 저렇게 될 수 있을거라는 희망을 가진채 한동안은 꿈에 부풀었다. 하지만 회사는 바쁘고 늘어나는 새 업무와 스트레스는 점점 더 벅찼다. 그와 반대로 줄어드는 몸무게는 너무나 미미했다. 한달을 이악물고 새벽운동을 다녔는데 몸무게는 1키로 에서 2키로를 왔다갔다 할뿐, 그 누군가 처럼 바지허리가 헐렁해지고 얼굴이 조막만해지지 않았다. 결국 참던 라면을 한밤중에 끓여먹고, 한동한 소원했던 대학 친구들을 불러 힘든 회사생활을 공유하며 술을 먹고 그다음 날 해장으로 치즈피자를 나누어먹고 헤어졌다. 한달동안 꾸준히 하던 운동마저 띄엄띄엄 가다가 결국은 내 비자 카드만이 gym을 기억하게되었다.

그러고는 또 다시 XL 유니폼에 잠바을 편하게 걸친채, " 그래도 오늘은 좀 걸었네." 하며 생활운동에 만족하는 생활을 반복했다. 너 정도면 괜찮아 라고 말해주는 친구들덕분에 운동을 포기하는 것은 한밤 중에 모짜렐라 치즈올린 불닭볶음면을 포기하는 것보다 훨씬 쉬웠다.


허리가 꼭 맞던 바지가 허벅지부터 안 올라가는 기분이란. 세탁하면서 줄었나 싶었는데 그래도 이렇게까지...혹시나해서 같은 치수의 다른 바지를 입었는데 꾸역꾸역 들어가서 허리가 안 잠긴다.

정확히 말하면 바지위로 뱃살이 넘쳐흘렀다는 표현이 더 어울리겠다. 거울에 비친 배는...그나마 아랫배가 나오고 윗배는 덜 나와서 어떻게든 가리고 다녔는데 이제는 윗배가 아랫배만큼 나와서 블라우스를 걸쳐도 배가 고스란히 들어난다.

레깅스가 문제다. 긴 상의를 입으면 허리가 고무줄인 바지도 비즈니스 바지처럼 보인다며 검정 레깅스만 주구장창 입고 다녔더니 살이 찌는 줄도 모르고.

안되겠다. 오늘부터 커피는 빼자카페로 바꾸고, 발레리나 티도 사서 마셔야지. 점심은...점심은 먹고 저녁을 굶어야하나?점심부터 샐러드 먹으면 저녁을 더 많이 먹게되던데... 마음이 급하다.


아무생각없이 지나치던 회사 정문의 유리에 비친 모습에 갑자기 주늑이 든다. 아 내가 저렇게 어깨가 넓었었나. 정장 어깨가 터질 것 같아.


퇴근길, 집으로 가는 길에 간만에 제시에게 전화를 걸었다.

'헤이, 제시 잘지내?'

'응 잘 지내. 너는? 너무 오랫만인데.'

' 나야 뭐. 똑같지 뭐.'

제시의 캘리포니아 생활은 정말 즐거워보였다.

' 너 이번 7월 롱 위켄드에 뭐해?'

' 나? 아직 계획은 없는데.'

' 그래? 그럼 우리 뉴욕에 가지 않을래?'

' 뉴욕?갑자기 왜?'

' 너 에이미 기억나? 에이미가 뉴욕으로 이사갔잖아. 이번에 놀러오면 자기 집에서 재워준대.'

' 음...그래? 근데 나 걔랑 그렇게 안친한데.'

' 괜찮아 에이미가 친구데려와도 된대. 걔네 아파트 맨하탄 이래!. 너 뉴욕 놀러가고싶어했잖아.'

' 음...생각해볼게.'

' 에이미가 그러는데 걔도 같은 아파트에 산대.'

' 누구?'

' 그 왜...우리 대학 다닐적에 나오코랑 썸탔던...그 키크고 맨날 농구하러 다니던...아 맞아 걔 이름이 우선호!

' 선호? 선호가 에이미랑 같은 아파트에 산다고?'

' 같이 사는 건 아니고 우연히 아파트 앞에서 만났는데 알고보니 같은 아파트였대. 둘이 요새 자주 어울린다고,다른 도시로 이직해서 외로울 줄 알았는데 너무 좋대.'

우연히가 아니라 열심히 알아보고 갔겠지. 대학내내 그렇게 기회를 엿보더니 결국은 뉴욕까지 쫒아갔구나. 그 소리가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꾹 눌렀다. 나는 서른살이고 사회인이고 어른이니까.

' 그래 가자. 나도 둘다 간만에 보고싶네.'


핸드폰으로 달력을 보았다. 이주 다. 이주. 14일이라는 짧은 시간안에 조금이라도 나아진 상태로 에이미와 선호를 마주치고 싶다. 에이미 앞에서 이런 망가진 몸상태를 보여주는 건 내 자존심이 용납치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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