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Pink Glove
Jul 24. 2019
우선 살부터 빼고 오겠습니다
3-3 포르투갈에는 포르투만 있는 것이 아니다
'젬마 잠깐 얘기 좀 하자.'
심상치 않다. 5시에 먼저 간다고 인사를하면 쳐다보지도않고 '잘가 내일 보자' 라고 인사를 하는 매니저인데 4시 55분에 잠깐 회의를 하자고 하다니. 오늘도 공원에 가려고 주섬주섬 짐을 싸고 있었는데.
이건 둘 중 하나다. 내가 담당하는 업체가 문제가 있거나 (대량의 불량이라든가, 결품이라든가) 2주째 휴가 중인 저 놈의 담당업체가 문제가 있거나.
'네가 포르투갈을 가주어야 해.'
'포르투갈?'
아니나 다를까 케빈의 업체가 결품을 내기 일보직전 이란다. 생산량이 너무 부족해 다음 납품도 항공으로 날려야 하는데, 다음 항공 납품일까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목표수량을 채우도록 하라는 것이 주문이다.
머리가 벌써부터 지끈거린다. 오늘은 운동은 커녕 짐부터 싸야겠구나.
뉴욕 여행에 다녀온 후 제대로 풀지도 않은 캐리어에 여분의 옷과 여행용 파우치를 쑤셔넣고 공항 대기실에 앉아있었다. 난생 처음 가보는 나라인데 비행기 표와 호텔만 끊고 이렇게 갑작스럽게 출장을 가게 되다니. 하루이틀 있는 일도 아니지만 새삼스레 자리를 비운 동료가 미워진다. 짜증스러운 마음과 걱정스런 마음이 반반씩 섞여 구글에 포르투갈을 검색해본다.
' 안녕하세요, 여기서 뵙네요.'
고개를 들자 며칠전 공원에서 본 제임스 강이다. 하얀 티셔츠에 청바지를 입은 단정한 차림이다.
'안녕하세요.'
' 여기가 암스테르담행 비행기 타는 곳 맞나요?'
' 네 맞아요.'
이런 경우도 있구나. 잘 알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얼굴을 아는 사람이 같은 비행기를 탄다고 하니 왠지모르게 약간 마음이 편해진다. 그도 비슷한 마음인지 한 자리를 건너 옆자리에 앉는다.
'유럽은 여행으로 가시나요?'
'아니요 저는 출장이 갑자기 잡혀서...제임스 씨는요?'
'전 여행으로 가요. 하하. 석사 과정 끝내기 전에 버킷리스트 중 하나가 포르투갈에 가는 거 였거든요. 직항이 없어서 암스테르담 경유해서 가요'
'아. 저도 리스본으로 가는 길 이예요.'
버킷리스트에 넣을 정도로 좋은 나라인가? 포르투갈에 대한 무지함이 탄로날까싶어 적당히 호응을 하고 구글에 포르투갈을 검색했다. 아름다운 포르투 사진 부터, 포르투갈 한달살기, 포르투 와인, 리스본 투어 등등 다양한 내용이 쏟아져나온다. 생각보다 나쁘지 않을지도 몰라, 이번 출장.
모형 튤립과 토끼 미피 인형이 가득한 암스테르담 공항을 거쳐 리스본 공항에 내리자 달콤한 베이커리 냄새가 코를 자극했다. 저게 그 유명한 포르투갈 에그 타르트 인가.
짐을 찾고 회사 핸드폰을 살피니 내일 아침일찍 픽업을 하러 오겠다는 업체 담당자의 문자가 들어와있었다. 오늘 밤은 리스본에서 묵고 내일 아침 2시간 남짓 걸리는 그 업체로 일을 보러 가기로 되어있었다. 어쨌든 일이 풀리기는 풀리는구나.
사방에서 들리는 포르투갈어에 살짝 긴장이 되었다. 스페인에서 영어가 통하지 않아 고생한 경험이 있어서였다.
'여기서 또 보네요.'
택시를 타려고 기다리고 있는데 등 뒤에서 밝은 목소리가 들린다. 제임스 강이 오랜 친구라도 되는듯, 그의 목소리가 반갑게 느껴졌다.
'어디로 가세요?'
'전 메리아트로 가요.'
'혹시 메리아트 에어포트 호텔 인가요? 저도 거기로 가는데.'
'맞아요.'
'괜찮으시면 한 택시로 같이 가실래요? 택시비도 아낄겸.'
' 저도 좋아요.'
잘 모르는 사람을 이렇게 믿어도 돼나 싶었지만, 어차피 아무도 모르는 이곳에서 말 통하는, 그리고 덩치좋은 남자 동행이 있는 것 만으로도 크게 위로가 되었다. 아무렴 좋다.
호텔에 도착해 체크인을 하고 어색한 인사 후 방에 들어왔다. 아무리 외국이라도 외간 남자와 한 택시로 호텔에 들어온 건 좀 그랬나.
어찌됐든 호텔은 잘 찾아왔다. 긴장이 풀리며 배가 고파왔다. 뭐라도 먹어야겠다.
호텔 로비에서 서성거리며 식당을 찾아보는데 또다시 그와 마주쳤다. 이번엔 먼저 인사를 했다.
'혹시 호텔식당을 찾으시나요?'
' 아니요 전 택시를 타고 도시로 나가보려고요. 여기 근처에 맛집이 있다고 해서요. 하하.'
' 아 정말요. 전 호텔에서 끼니 해결하려고 호텔 식당 찾는 중 이었어요.'
'괜찮으시면...같이 가실래요? 아까 택시비도 내주셨고, 저도 혼밥하기 좀 쑥스럽고 해서요. 원래 제가 밖에서 혼자 밥먹는 걸 좀 어려워하거든요.'
흑심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은듯 주절주절 설명을 덧붙인다. 좀전에 택시비를 지불하는데 택시 운전사 성격도 급해보이고 나는 어차피 나가야했을 교통비라 내가 냈더니 그 보답으로 밥을 먹자고 한다. 그래, 애시당초 이런 훈남이 나에게 관심을 갖을리가. 나역시도 가벼운 마음으로 흔쾌히 승낙했다.
그래. 술이다. 그날 마신 청포도와인은 달콤했고 너무 매혹적이라 멈출 수 없었다. 한 잔인 줄 알고 시켰던 와인이 한 병으로 나온것도, 한잔씩 나눠마시다 바닥을 드러낸 와인이 아쉬워 택시를 잡아타고 호시우 광장의 다른 식당으로 가 문어다리와 함께 포르투 와인을 마신 것도, 취기가 오른채 식당에서 나오다 제임스가 추천한 초콜릿 컵에 든 체리주를 마시며 진쟈, 진쟈라며 술 이름을 되풀이 하던 것도 굉장히 자연스럽게 흘러갔다. 그 사이사이 나는 제임스의 한국이름이 강동원 인 것을 알아냈고, 연예인 이름과 동일해 한국어 이름을 쓰기를 쑥스러워 한다는 것, 전 여자친구와 함께 오고 싶었는데 얼마전 헤어졌다는 것, 먹는 것과 요리하는 것을 너무 좋아해 많이 먹기위해 운동을 많이 한다는 것 등등 그에 대한 소소한 사실들을 알아냈다. 취한채 한참을 전 여자친구 얘길하는 그를 바라보면서, 포르투갈에 이 잘생긴 남자와 단둘이 있다는 사실보다는 포르투갈에서 좋은 친구를 얻은 것 같다는 느낌이 더 현실감 있게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