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킨 어느 부위 좋아하세요?
여럿이 치킨을 먹을 때면 늘 누군가 좋아하는 부위에 대해 묻곤 한다. 쫄깃한 살이 섭섭지 않게 붙어있는 덕분인지 닭다리는 늘 상위권에 있다. 수많은 조각 중 단 두 개뿐이라 생기는 희소성도 매력 포인트일 것이다. 그다음 순위로 자주 등장하는 부위는 날개다. 날개 좋아하면 바람피운다는 시시한 농담 뒤로 퍽퍽 살은 곧잘 잊힌다. 그 퍽퍽 살을 나는 좋아한다. 선택받지 못했다는 점을 좋아한다.
지금 눈앞에 있는 닭다리 개수보다 그걸 좋아하는 사람 수가 더 많다면 누군가는 좋아하는 부위를 먹으면서도 미안한 마음이 들잖아. 또 다른 누군가는 좋아하는 부위를 먹지 못해 속상한 마음이 들고. 모두가 본인이 가장 좋아하는 부위를 먹게 될 수 있다면 그게 가장 좋으니까. 그래서 나는 아무도 1순위로 꼽지 않는 퍽퍽 살을 좋아한다고 말한다. 그렇게 우리는 우연히도 각자 좋아하는 부위가 겹치지 않아 모두가 만족하는 시간을 보낸다. 그 화합이 좋았다. 모두에 ‘나’는 없었을지라도.
매일 있는 점심시간, 어떤 메뉴가 당기냐는 질문에 늘 아무거나 괜찮다고 말한다. “저는 진짜 안 가리고 다 잘 먹어요.” 상대가 어떤 메뉴를 고르더라도 부담 없이 고르게 하고 싶은 마음이라서. 상대방은 오늘 카레가 너무 먹고 싶은데, 내가 카레는 싫다고 먼저 말해버리면 고르지 못할까 봐. 그런 가능성을 아예 배제해 주고 싶은 마음이랄까. 나의 선호는 꽤 자주, 당연히 뒤로 밀리곤 했다. 시작은 언제인지 모르겠지만 꽤 오랜 기간 이런 사고방식을 유지해 왔다. 일종의 착한 아이 병일지도 모르는, 모두에게 좋은 사람이고만 싶어 하는 마음. 이건 내가 좋은 사람으로만 남고 싶어 이기적으로 선택한 결과라고 자신을 세뇌했을지도 모르겠는 그런 사고방식. 그러면서도 내가 베푼 만큼의 배려를 받지 못하면 피어나는 서운함에 입을 비죽댔을지 모른다. 물론 아무도 모르게.
친언니가 사업으로 힘들어하며 ”내가 이런 말 할 데가 너밖에 더 있겠냐”며 우르르 감정을 쏟아내면 내 걱정들은 묻어둔 채 그저 듣고 위로했다. 누군가 속상한 일이 있다며 연락이 오면 그게 몇 시가 되었든 적절한 공감과 해결책을 마련하고 전달했다. 내게도 마냥 들어주고 토닥여주는 존재가 있으면 좋겠다마는 그저 책 속으로 들어가 어차피 인생은 혼자라며 헛헛한 마음을 달래곤 한다. 상대가 나를 불편하게 해도 앞에서는 티 내지 못하고 웃어넘기며 분위기를 맞추는 것은 이미 일상이 된 지 오래다. 기억 속 저편에서 이렇게 다양한 일화들이 줄줄이 나오는 걸 보면 그간의 배려는 분명 날 위한 선택은 아니었던 것 같다.
어느 날 친구들에게 관계에서 오는 속상함을 주제로 이야기하다 이런 질문을 들었다.
네가 네 엄마면 어떨 것 같아? 딸이 계속 그렇게 살았으면 좋겠어?
내가 내 딸이라면…? 친구의 질문 하나에 내 상황을 제삼자 입장에서 바라볼 수 있게 되었고, 그 즉시 퍼뜩 정신이 차려졌다. 아니, 가당치도 않은 소리지. 내가 제일 사랑하는 내 딸이 맨날 남 생각하느라 본인은 저 멀리 던져 놓는다고? 차라리 이기적이라고 욕을 먹는 편이 낫지. 나는 내 딸을 가장 자존감 높게, 가장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키우는 게 꿈인 사람인데.
아이를 가져보기도 전, 생길 여지조차 없을 때부터 난 좋은 엄마를 꿈꿨다. 내가 자라며 경험했던 결핍이 커서까지도 나를 괴롭히는 걸 너무 잘 알았기 때문에, 만약 아이를 키우게 된다면 꼭 자기 자신을 정말 사랑하는 아이로 키워야겠다는 바람이었다. 살이 찌든 공부를 못하든 너는 너 자체로 가장 소중하고 중요한 존재라는 걸 알려주는 좋은 엄마. 나는 내가 존재만으로 소중한 사람인지 잘 모르지만 내 딸한테는 꼭 잘 알려줘야지. “쟤는 아이도 없으면서 벌써 모성애가 있어.” 자타공인 준비된 엄마였던 내가 정작 나 자신은 원하던 방향과 반대 방향으로 키우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내 딸을 이렇게 키우고 싶었던 적이 없었는데, 정작 내 자신은 세상에 존재해 본 적도 없는 애보다도 못한 취급을 받고 있었다.
그 질문을 계기로 새로운 꿈이 생겼다. 이제 내 꿈은 먼 미래가 아닌 발치에 두기로 했다. 글에다 담는 단어 하나하나부터 오늘 먹을 점심 메뉴, 식당에서 앉는 자리까지 오롯이 나를 최우선 순위로 생각해서 결정을 내리는 것. 작은 결정을 할 때에도 자동으로 이 결정이 타인에게 미칠 영향들이 떠오르지만, 그 많은 생각들을 이기고 나는 나를 선택하기로 한다. 오래 걸리고, 익숙지 않아도 계속 연습하고, 지속할 것이다. 이렇게 결심하는 것도 연습 중 하나라는 마음으로. 어쩌면 정말 이기적으로 보여서 누군가가 나를 등진다고 해도, 등질 때까지 해보고 다시금 적절한 자리를 찾아가는 것까지가 꿈의 달성이 아닐까. 적정한 선을 아직은 몰라서, 지금은 내 영역을 너무나도 많이 침범해 선을 그어 놓았지만… 나의 영역을 가능할 때까지 넓혀보기로 한다. 천천히 그러나 꾸준히.
나는 닭다리를 좋아한다.
ps. 이 글은 작년 말에 썼던 글이다. 지금의 나는 그때 다짐했던 대로 나 자신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며, 나를 사랑해주고 있다. 이 글을 보는 누군가가 스스로를 좀 더 사랑해주고 싶은데 그러지 못하고 있다면, 결국에는 원하는 모습이 될 수 있다고 말해주고 싶다. 작은 결정부터 차근차근 연습하면 된다. 그게 쌓이고 또 쌓이면 아주 큰 결정도 나만을 위해 할 수 있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