움직이는 순간

이미지 출처 : Unsplash의Daniele Levis Pelusi

by 주이슬



눈앞에 흰색 천이 펄럭거렸다. 연우의 사뿐거리는 움직임에 맞춰 흔들리는 치마는 내가 입었을 때보다 훨씬 더 생동감이 느껴졌다.

“진짜 또 입어도 돼? 내가 너무 자주 빌리는 거 같아서.”

정신을 차리자, 연우는 어느샌가 움직임을 멈춘 채 거울 표면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읽기 어려운 눈동자. 미안한 걸까? 예의상 하는 말인 걸까? 궁금증을 감춘 채 애써 태연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연우는 다시 거울 속 자신을 바라보며 옷매무새를 다듬었다.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있었지만 정제되지 않은 것들이 무작위로 튀어 나갈 것이 뻔해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내 옷장엔 더욱 값이 나가는 옷가지들이 허다했지만 유독 연우가 그 흰 치마를 빌리는 날엔 신경이 쓰이곤 했다. 흰옷에 얼룩이라도 질까 봐 걱정되는 걸까? 어쩌면 나보다 더 잘 소화하는 모습을 보니 언짢은 거일 수도 있겠다. '친구 사이에 유치하게 웬 질투.' 연우가 내 마음을 알게 되면 분명 이렇게 말할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감정을 곱씹을 기회가 많아질수록 이건 염려나 질투 같은 게 아니란 것이 명확해졌다. 하지만 감정의 형태는 여전히 불명확한 단어로 구성돼 있어서, 깊이 파고들려고 할 때마다 마음이 어지러워졌다. 그런 내 상태를 아는지 모르는지 연우는 그 치마를 제법 자주 입었고, 나는 그게 싫으면서도 또 언제 빌리려나 내심 궁금해하기도 했다.


단둘이 바다를 보러 가기로 했던 날, 연우의 방 앞을 한참 서성였다. 조심스럽게 노크하고 문을 여니 연우는 젖은 머리칼을 말리느라 정신이 없어 보였다.

“오늘 이거 입고 갈래?”

이 말을 하는 게 왜 그리도 어려웠던 건지 전날 밤부터 몇 번이나 연습을 해야 했다. 연우는 미묘한 표정을 지으며 머리를 바쁘게 털어대던 손을 멈췄다. 그리곤 내 눈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천천히 치마를 입기 시작했다. 나쁜 짓을 한 것도 아닌데 자꾸만 마음이 덜컹거렸다.

구름이 잔뜩 낀 날 절벽에서 내려다보는 바다는 내 기대와는 달리 별로 감명 깊진 않았다. 오히려 끈끈한 공기가 자꾸만 분위기를 무겁게 만들었다. 바람이 세차게 불 때마다 펄럭거리는 치마와 연우의 찌푸린 인상을 신경 쓰느라 바다가 눈에 들어올 틈이 없기도 했다. 연우의 미간 사이로 주름이 선명히 패였다. 평소에는 잘 보여주지 않는 표정. 오랜 시간을 알아 왔지만 처음 보는 얼굴의 모양. 나도 모르게 미간의 패인 자국을 지긋이 쳐다봤다. ‘연우가 쓰는 향수는 무엇이기에 이토록 달콤한 향이 나는 걸까?’ 따위의 생각을 하면서.

“지원.”

눅눅한 습기와 함께 날 부르는 연우의 목소리가 바람을 타고 실려 왔다. 나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연우와 눈이 마주쳤다. 바람 소리도, 그에 펄럭이는 치마 소리도 더 이상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어떤 말을 꺼내고 싶었지만 도무지 그게 무엇인지 가늠하기조차 어려웠다. 연우는 별다른 말을 잇지 않은 채 천천히 고개를 좌우로 흔들 뿐이었다. 항상 파악할 수 없었던 예의 그 표정을 하고서.


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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