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Unsplash의Anne Nygård
어느덧 무더위도 한 풀 가시고 논두렁에 심긴 벼들이 서서히 익어가기 시작했다. 산을 쏘다니며 아직 설익은 밤을 따다가 입에 넣으면 달콤함보단 떫은맛이 좀 더 밀려오는 시기. 나는 어떤 날은 덜 익은 밤을, 어떤 날은 초록과 노란빛이 섞여 오묘한 빛을 띠는 덜 익은 단감을 따다가 옆집 마당에 조용히 두곤 했다. 그것들은 영원히 사라질 줄 모르는 것처럼 현관 앞에 놓여 있다가 결국 벌레가 꼬이기 시작하면 내가 치우기도 했고, 어떤 날은 어느 순간 없어져 있었다.
내 방 창문 앞에 서면 옆집이 바로 보였다. 원래 저녁이면 노란 불빛이 일렁여야 하는데 아기가 태어난 뒤로는 그럴 낌새가 영 보이질 않았다. 나는 언젠가 그 불이 켜지면, 바로 달려가서 아는 체를 해야겠다고 생각하며 하루 종일 창가 앞에 앉아 책을 읽기도 하고 그림을 그리거나 장난감을 가지고 놀기도 했다. 자기 전 창문 앞에 서서 옆집을 살피는 것은 중요한 하루 마무리 일과가 되었다.
“뭐하노?”
뒤를 돌아보자 아빠가 서 있었다. 아빠는 내 시선을 따라서 창문 밖의 옆집을 함께 바라봤다.
“아줌마랑 아저씨 뭐 하는지 궁금해서.”
“시간이 늦었으니까 자고 있겠지, 뭐.”
“아빠, 내랑 같이 저 집에 가보면 안 되나?”
아빠는 난감한 기색이 역력한 표정으로 “늦었다아이가. 나중에.”라고 답했다.
“얼른 자야지. 그래야지 키도 커지고 힘도 세진데이.”
“꼬리도?”
내가 몸을 누이며 뱉은 물음에 아빠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내 꼬리를 바라봤다. 그 표정은 빠르게 사라진 후 미소로 대체되었지만 나는 어쩐지 두려운 기분이 들었다.
“그래, 꼬리도.”
“아빠.”
“와.”
“옆집 아줌마랑 아저씨도 견하할매가 지켜주는 거 맞제?”
내 질문에 아빠는 즉각 “당연하지”라고 대꾸했다.
“근데 왜 주춤이를 낳았어?”
아빠는 살짝 놀란 표정을 짓더니 손가락으로 턱 근처를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겼다.
“견하할매가 천벌을 내린 건가?”
“그런 말은 하는 거 아니다. 아저씨랑 아줌마는 천벌을 받은 게 아니다. 애기도 마찬가지다. 그냥… 우리보다 조금 더 약하게 태어났을 뿐이다. 잘못된 건 하나도 없다.”
“아줌마랑 아저씨도 주춤이가 태어날 거 미리 알고 있었나?”
“아빠도 잘 모르겠네.”
내가 입을 쭉 내밀자 아빠가 “주디는 댓 발 튀어나와가꼬."라고 말하며 입술을 가볍게 꼬집었다.
“근데 주춤이들이 꼭 보호소로 가야 하나. 그냥 우리랑 같이 살면 안 되나.”
아빠는 딱히 대꾸하지 않은 채 이불을 꼭 여며줬다. 그리고 내 이마에 뽀뽀했는데 까끌까끌한 수염 자국이 따가우면서 간지러웠다. 원래는 그러고 곧장 방을 나갔던 아빠였지만 그날은 한참을 나가지 않고 내 머리맡에 앉아 있었다. 나는 평소와 다른 모습이 의아하기도 하고 낯간지럽기도 해서 괜히 툴툴거렸다.
“아빠도 내가 주춤이로 태어났으면 내 버렸을 거제?”
얼굴에 둑을 쌓아 표정을 감출 수 있다면. 아빠의 얼굴은 그 둑이 하염없이 무너질 때나 나올법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걸 보는 순간 입을 다물었지만 이미 말은 튀어 나간 지 오래였다.
아빠는 내 눈을 피해 맞은편 창문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그곳을 쳐다보면 질문에 대한 해답이 나오는 것처럼. 아빠의 손가락이 턱 근처를 좌우로 여러 번 쓸었다. 그리곤 눈을 천천히 세 번 감았다 떴다. 끔뻑. 끔뻑. 끔뻑. 그리곤 입을 뗐다. 혀가 입천장에서 떨어지며 쩝 소리가 났다.
“아빠랑 엄마는 평생 니랑 같이 살 거다. 꼬리가 있든 없든.”
오른손으로 꼬리를 만지작거리던 내 귓가에 기대하던 답이 들려오자 그제서야 참았던 숨을 폭 쉴 수 있었다. 이윽고 뾰족한 무언가가 심장 부근에 걸려 있다가 점점 목을 타고 올라오는 느낌이 들었다.
아빠가 자리에서 일어나 나를 한참 바라보더니 문을 조용히 닫으며 나갔다. 나는 눈물을 터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