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지갑

사진: Unsplash의Sergiu Vălenaș

by 주이슬


인옥의 웃음소리가 작은 호프집 안을 날카롭게 울렸다. 그는 사실 그다지 웃긴 상황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정말 재미있는 것처럼, 그것도 특이하게 웃을 줄 알았다. 그러면 주변에 앉아 있던 친구들이 그런 인옥을 가리키며 함께 웃곤 했다.

문제는 인옥의 맞은편에 앉아 있는 한결이었다. 그는 전혀 따라 웃지 않고 멀뚱히 인옥을 바라봤다. 이윽고 웃음소리가 소강상태로 접어들자 한결은 기다렸다는 듯이 자신의 손을 인옥의 손 위에 올렸다. 부드럽고, 따스하고, 통통한 손이었다.

“옥아. 내가 이 말을 할까 말까 진짜 고민 많이 했는데….”

조용한 목소리지만 친구들의 이목을 집중시키기엔 충분한 힘이 있었다. 인옥은 침을 한 번 삼켰다.

“네 지갑 있잖아. 혜준이가 줬다고 했었던.”

인옥은 자신의 헤진 에코백 안에서 빨간색 지갑을 하나 꺼냈다. 삼각형 프라다 로고가 중간에 박혀 있는 장지갑이었다. 혜준을 3년간 만나면서 받은 선물 중 유일하게 돈 좀 썼을 법한 물건이었다. 한결은 인옥의 지갑에는 시선조차 주지 않고 대신 눈을 맞췄다. 무언가 결의를 다진 듯한 눈빛이 인옥을 주눅 들게 했다.

“나 주말에 남자 친구랑 명품관 들렀다가 프라다 매장도 갔었거든? 거기서 본 지갑이랑 네 거랑 디테일한 부분이 많이 다르더라고…. 혜준이가 혹시 그거 정품이라고 하면서 줬어?”

인옥은 오히려 그 질문을 기다렸다는 듯 다시 한번 크게 웃으며 너스레를 떨었다.

“야, 애초에 양혜준 그 새끼가 이거 줄 때부터 짭인 거 알았어 씨발! 존나 티 나잖아. 다른 애들도 진작에 알고 있었을걸?”

인옥은 주변을 둘러봤다. 정말 알았든 몰랐든 친구들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천천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윽고 한결의 손이 인옥의 손 위에서 떨어졌다.

“나는 혹시 네가 모르고 들고 다니나 해서 그랬지. 알고 있었다면 다행이고.”

인옥은 자신의 에코백 안에 지갑을 넣으며 말을 이었다.

“야, 내 가방 꼬락서니를 봐라. 내가 이게 짭이든 아니든 신경 쓸 사람은 아니잖아. 그냥 새로 사기 귀찮아서 들고 다녔지.”

인옥은 자꾸만 덜덜 떨리는 허벅지를 손으로 꽉 누른 채 힘을 줬다. 하지만 진동은 멎지 않고 턱 아래로 옮겨가 윗니와 아랫니가 서로 부딪쳤다. 결국 인옥은 잠깐 화장실로 피신해야 했다. 그는 문을 잠근 뒤 세면대를 붙잡고 눈을 감은 채 심호흡을 마흔 번쯤 했다. 이후 차가운 물로 얼굴의 열기를 식힌 다음에야 멀쩡한 표정으로 나올 수 있었다.


모임이 파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살짝 취기가 오른 인옥은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절대 잊히지 않을 것 같았던 혜준의 번호가 지금은 끝자리 두 개만 생각났다. 그렇다고 그의 번호를 수소문할 정도로 취한 것은 아니었다.

폰을 꼭 쥐고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는 인옥의 머릿속에서 그동안 덮어놨던 것들이 하나씩 떠오르기 시작했다. 별 기념일도 아닌 날 그냥 주고 싶어서 샀다며 지갑을 툭 던져주던 혜준. 기대감도, 기쁨도, 긴장도 읽을 수 없었던 표정. 평소엔 저렇게 무뚝뚝해도 사실은 나를 누구보다 사랑하는 거지. 마음이 자꾸 순두부처럼 몽글거렸던 것. 활짝 웃었을 게 분명한 인옥의 얼굴. 그 지갑을 쓸 때마다 주변에서 보이는 반응에 일희일비했던 것.

집에 도착한 인옥은 씻는 것도 잊은 채 책상 위에 지갑을 올려놓고 빤히 바라봤다. 혜준의 말이 비수가 되어 마음에 꽂힐 때면 인옥은 그 지갑을 바라봤다. 혜준이 자신과의 약속을 매번 잊어버릴 때도, 그에 대한 수많은 미움과 의심이 떠오를 때도.

그렇게 몇 분 내내 지갑에 시선을 고정하던 인옥은 첫 번째 책상 서랍을 열어서 셀로판지 몇 개를 꺼내 들었다. 몇 달 전 셀로판지로 스테인드글라스 비슷한 작품을 만들어 보겠다며 충동적으로 샀다가 처박아뒀던 것들이었다. 빨간 지갑. 인옥은 취향도 아닌 그 지갑을 차마 버릴 수가 없었다. 차라리 보이지 않길 바라며 빨간색 셀로판지를 눈앞에다 가져다 댔다.

하지만 그의 작은 기대와는 달리 빨간 셀로판지는 지갑의 색만 가려줄 뿐 다른 요소들을 더욱 또렷하게 보여줬다. 삐뚤어진 삼각 로고와 조잡한 마감, 몇 번 사용하지도 않았는데 금방 헤져버리던 가죽인지 아닌지 모를 어떤 것. 혜준의 표정. 심드렁한 얼굴. 무표정이라 애써 자위했지만 사실은 무얼 뜻하는지 충분히 알 수 있었던 나날들.

그날 이후로도 인옥은 그 지갑을 버리지 않았다. 그렇다고 들고 다니지도 않았다. 그저 혜준이 떠오르는 날이면 빨간 셀로판지를 눈앞에 가져다 대고 계속해서 바라볼 뿐이었다.

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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