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Unsplash의Denis Blzz
밖을 나선 경선은 꽁꽁 둘러싼 목도리를 뚫고 들어오는 냉기를 들이켰다. 새벽 한 시에 화들짝 깬 다음 대충 샤워를 하고 다시 잠들기까지 네 시간 정도가 걸렸다. 겨우 일어나서 황급히 씻고 밖으로 나선 경선을 칼바람이 맞이했다. 머리가 지끈거릴 정도로 추웠고 눈은 중력의 영향을 특별히 더 받는 느낌이었다. 경선은 인제 터미널 앞에 도착하자마자 편의점으로 피신했다. 따스한 유자차 한 병과 초코바 한 개를 계산한 뒤 유자차를 쭉 들이켰는데 쌉싸름하면서 달짝지근한 맛이 몸 안에 들어오자 기운이 났다. 그때 유리문 밖으로 털이 달린 귀마개를 쓰고 목도리로 얼굴을 폭닥하게 덮은 작은 여자가 눈에 들어왔다. 경선은 유자차를 황급히 하나 더 계산한 다음 쭈뼛거리며 다가갔다.
“저기….”
어깨를 톡톡 두드리자 여자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올려다봤다.
“경선 님?”
경선이 고개를 끄덕이자 여자는 경선의 손을 살짝 잡았다. 사진에서 보던 것처럼 건강한 혈색이 돌고 있는 얼굴이었다. 경선은 말없이 유자차를 건넸다. 이어서 초코바를 주기 위해 패딩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하지만 잡히는 게 없었다. 매고 있던 가방 안에도 없었다. 얼굴이 화끈거리기 시작했다.
“어, 제가 사실은 수현 님 드리려고 초코바도 샀는데, 어디 갔지….”
어색한 미소를 짓고 있던 수현은 경선의 어깨 너머를 빼꼼히 바라보더니 곧장 뛰어가서는 바닥에 떨어져 있는 초코바를 가지고 돌아왔다.
“이거 맞죠?”
수현은 패딩 주머니 한쪽엔 초코바를, 반대쪽엔 유자차를 넣었다. 빵빵하게 부풀어 오른 모습이 귀여웠다. 둘은 곧 택시를 잡았다. 희끗희끗한 머리의 택시 기사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손님을 맞았다. 차 안에서는 가죽 시트 냄새와 시원한 향이 맴돌았다. 경선은 자신이 입고 있는 검은색 롱패딩의 소매 냄새를 몰래 맡아보았다. 담배 냄새가 살짝 배어 있는 것 같았다. 옆에 앉아 있던 수현에게서는 귤껍질 향이 났다. 수현은 귤을 곱게 갈아 바닐라 향이 나는 흰 푸딩 위에 얹어 먹는 부류의 사람일 것이다. 경선은 백미러를 통해 택시 기사와 수현을 흘끔거렸다. 경선은 여기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 같았다.
“도착했습니다.”
나긋한 목소리에 경선은 창밖을 바라봤다. 주차장에는 이미 버스가 몇 대 줄지어 있었고 관광객으로 붐볐다. 울긋불긋한 등산복들이 곳곳을 가을처럼 물들였다. 수현은 택시에서 내리자마자 기지개를 쭉 켰다. 경선도 괜히 어깨를 뒤로 두어 번 돌려봤다. 주차장 근처에서는 오천 원짜리 아이젠을 판매하고 있었다. 수현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경선 님 아이젠 챙겨오셨어요? 저 아무 생각 없이 그냥 왔는데.”
“저 두 쌍 갖고 왔어요. 하나 드릴게요.”
혹시 몰라 수현의 몫으로 챙겨온 것이었다. 아이젠을 받아 들고 감사하다며 방방 뛰는 모습을 보니 미소가 지어졌다. 이윽고 경선은 아이젠을 착용하기 위해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생각보다 잘되지 않아서 계속 구부린 자세를 유지하다 보니 허리가 아프고 숨이 찼다. 앞을 기웃거리던 수현이 ‘저 이런 거 잘해요.’라고 말하며 무릎을 꿇고 도와줬다. 경선은 거친 호흡을 들키지 않으려 필사적으로 숨을 골랐다.
둘은 철그렁거리는 체인이 어색해 뒤뚱거리며 사람들을 따라 안내소로 향했다. 안내소에서는 지도를 나눠줬는데, 현재 눈이 많이 쌓인 상태라 달맞이 숲으로 향하는 길 중 일부만 한정적으로 개방 중이었다. 등산스틱을 챙겨오지 않은 사람에게는 길고 튼튼한 나뭇가지가 증정됐다. 경선은 말없이 나뭇가지를 받아 들곤 수현에게는 본인의 등산스틱을 건넸다.
등산로 입구에는 자작나무 대신 소나무가 심겨 있었다. 파란 이파리를 바라보며 야심 차게 출발했지만 5분 만에 난감한 상황이 닥쳤다. 평소 누워만 있어서 말랑해진 종아리가 극렬히 땅기기 시작한 것이다. 거기다 금방 열이 올라서 롱패딩 지퍼를 열고 싶었는데, 안에는 딱 붙는 티를 입고 있던 터라 거대한 배가 그대로 드러날 형국이었다. 수현은 가벼운 다리로 산을 오르다 가끔 멈추어 서서는 하늘을 찍고, 숲길을 찍었다.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본인의 사진을 부탁하기도 했다. 경선은 본인을 찍어주겠다는 수현의 제안을 몇 차례 거절해야 해서 난감했다. 뒤에 따라 올라오던 한 관광객이 사진을 찍어주겠다고 할 땐 차마 거절할 수 없어서 어색하게 브이 자를 들어 올렸다. 화면 속에 있는 수현은 발랄하고 사랑스러웠다. 바로 옆 검은색 긴 롱패딩을 입은 자신은 거대한 바위 같았다. 목도리로 가려지지 않는 넙데데한 얼굴, 빨갛게 달아오른 이마, 땀에 젖어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보고 기분이 가라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