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 레이블은 어떻게 써야 하는가?(3): 나의 말, 당신의 삶
'금융 레이블은 어떻게 써야 하는가?' 시리즈의 마지막 글입니다.
그나저나 제목대로 금융 UI text를 어떻게 써야 하는지 설명을 잘하고 있는지 확신이 없네요.
일단 첫 번째 글에서는 한자어로 된 기존 금융 자곤을 대체할 경우 상당히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Toss 증권의 사례로 살펴봤습니다. 이어진 두 번째 글에서는 한국어 금융 레이블이 어려워진 이유를 금융사 현업이 느끼는 두려움으로 설명했고, UI text에서 두려움을 걷어낸 카카오 뱅크의 사례에 대해서도 이야기해봤습니다.
이번 마지막 글에서는 금융 서비스의 텍스트를 작성할 때 UX writer가 사용자와 서비스에 어떤 책임을 갖는지에 대해서 이야기해보려고 합니다.
이 글을 쓰기 전 Toss의 '구매하기' '판매하기' 케이스에 대해서 여러 사람하고 이야기를 나눴었는데, 그중 저를 깜짝 놀라게 한 지인의 말을 거칠게나마 여기에 옮겨 볼까 합니다.
법학을 전공한 이 친구는 은행에 다니다가 뛰쳐나가서(?) 외국에서 변호사 자격을 따온, 대략 금융과 법 모두에 해박한 사람입니다. 무엇보다 버핏과 멍거의 투자철학에 심취해 있는 (찰스 멍거 옹 돌아가면 미국으로 문상가겠다고 했음 ㅋㅋㅋ) 암튼 가치투자를 꽤 오래해온 사람입니다.
나: 그래서 너는 '매수', '매도'를 '구매' '판매'로 바꾸는 것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해?
지인: 틀린 용어인 건 더 말할 필요도 없고, 무엇보다 내가 기분 나쁜 건 Toss가 용어를 '구매' '판매'로 바꾼 의도야.
나: 의도?
지인: 주식을 '공산품' 취급하고 있잖아. 집 앞 편의점에서 도리토스 한 봉지 '구매'하는 것처럼.
작년에 주식 광풍이 불어서 공부도, 준비도 되지 않은 청년들이 너도 나도 우르르 소중한 재산을 때려 넣고 돈 날리고 좌절하고... 아무튼 요 근래의 그런 시류에 영합하는 표현이지. '구매', '판매'라는 게. '이번 생은 틀렸어! 주식, 코인만이 살길이다!'라고 하는 젊은 세대들에게 '그래 그래 거래를 더해! 이거 쇼핑하는 거랑 다를 거 없어!' 이렇게 조장해서 돈을 때려 박게 만들려는 노골적인 의도가 좀 별로다.
나: 흠... 재미있네, 그런 생각.
지인: 주식을 산다는 건 한 회사의 주주, 그러니까 회사의 주인이 된다는 거야. 그 회사의 가치를 알아보고, 투자를 해서 성장시키는 파트너가 되는 거지. 근데 '구매', '판매'는 그런 의미를 다 무시하고 있잖아.
나: 그렇지... 투자란 게 원래는 그런 거지.
지인: 그리고 투자 같은 금융 행위는 자기의 전 재산을 다루는 일이기 때문에 준비된 어른이 충분히 공부하고, 고민하고, 잘 알아보고 해서 정말 신중하게 들어와야 해. 금융은 허들이 높을 수밖에 없고. 아니, 그 사람 인생을 위해서라도 허들은 적당히 높아야 한다고. 잘 모르고 들어가도 어떻게든 되는 '게임'이 아니라니까. 그랬다간 걔 인생 망해. 이 세계는 낙장 불입이고, 리셋할 수도 없어. 그냥 끝나는 거라고.
그걸 잘 알게 해야지, 금융 앱이라는 게. 쓰는 사람 인생에 대한 책임감이 있어야지.
나:....
지인: 어차피 금융사는 계좌랑 거래량 늘려서 거래 수수료 같은 걸로 이익만 얻으면 그만이야. 거래 많이 하면 할수록, 단타를 하면 할수록 서비스는 이익이지. 이 구조에서 단타로는 개인이 이익을 얻기 진짜 어려운데도 끊임없이 거래를 하게 조장이나 하고 말이야. 근데 그 결과가 한 사람의 인생을 파탄낼 수 있다는 생각은 안 해. 물론 책임도 안 지고. 나는 그런 서비스 철학이 너무 노골적이라서 그 말이 불편해.
지인의 말을 듣고 저는 잠시 멍해졌어요.
저는 페이, 생명보험 앱, 은행 앱, 코인 거래 서비스에 writer로 참여해 보았지만, 한 번도 이런 생각을 하면서 글을 써본 적이 없었습니다. '판매' '구매'를 보면서 틀렸네, 틀렸어에만 집중했지 글쓰기에 서비스의 욕망이 노골적으로 드러난다는 점에 대해선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어요.
왜냐면 저는 단지 직원이었으니까요. 회사에 소속된 UX writer 로서 이익을 내는데 최선을 다하고, 글을 쓸 때는 내게 일어날 수 있는 금융 사고 걱정만 했거든요.
고백하건대 사용자의 전 재산, 사용자의 경제생활, 그로 인해 무너질 수 있는 그 사람의 삶에 대한 책임감은 없었어요.
이 바닥에서 일하며 서비스 성공만 생각하던 저란 인간의 바닥이 이렇게 드러났습니다.
지인과의 대화는 writing ethic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 보게 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 대화 이후 저는 UX writer가 금융 서비스 사용자에게 다음과 같은 책임을 가진다고 제 나름대로 정리했고, 금융 텍스트를 쓸 때마다 서비스 생산자로서의 저의 역할을 무겁게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단언컨대 금융에 익숙한 사람은 없습니다.
예적금 계좌를 처음 개설하고, 대출을 받아보고, IRP, 보험, 주식, 펀드, 환전... 뭔가 하나 해보려면 너무 많은 금융 용어가 한꺼번에 쏟아집니다. 그럴 때마다 여러분은 어떻게 금융 용어를 학습하시나요?
하나 확실한 것은 사용자는 책이나 경제 수업에서 금융 용어를 학습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단지 금융 앱을 켜서 뭔가를 해보려고 할 때, 바로 그때부터 금융 자곤의 의미를 알아가기 시작하는 것이지요.
아무도 책을 읽지 않는 시대에, 그래서 사용자의 금융 선생님은 UX designer와 UX writer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UX designer는 복잡한 과업을 정리하여 금융 행위를 논리적으로 이해하고 수행할 수 있게 돕고, UX writer는 금융 자곤과 금융 정보의 의미를 설명하고, 인지시키고, 반복 학습시킵니다. 사용자가 다음에 어느 서비스를 이용하든 어려움 없이 과업을 수행할 수 있도록, 금융 용어를 최대한 잘 설명하고, 한 번에 이해할 수 있는 만큼만 필수 정보를 추려서 화면에 배치하고, 오류나 오해를 방지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이고 책임입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보험사 앱의 약관 대출, 주택 담보 대출 진행 시 사용자는 만기일시상환, 원리금균등상환, 원금균등상환 중 하나를 상환 방법로 반드시 선택해야 합니다.
자, 우리가 이 3가지 상환 방식의 의미를 사용자에게 설명해야 한다고 상상해 보세요. 생애 처음 대출을 받는 사용자에게 대출 프로세스의 어느 시점에, 어떤 위치에, 어떤 방식으로 이 용어들의 의미를 알려주어야 할까요?
이미 이 용어를 잘 알고 있는 다른 사용자도 많기 때문에 너무 유치원생에게 가나다 가르치듯 설명해서도 안됩니다. 유서 깊은 금융 자곤이므로 다른 대체어 사용도 어렵습니다.
('다 끝나면 한꺼번에 갚기', '총액만 같게 해서 갚기', '원금만 같게 해서 갚기' 이렇게 풀어서 쓸 생각은 하지도 마세요.)
화면을 지저분하게 만들지 않고, 보편적인 금융 자곤을 북한 문화어(?)처럼 생뚱맞은 신어로 대체하지 않고, 기존 사용자와 새 사용자 모두에게 도움이 될 수 있도록 이 낯선 용어들을 설명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아니, 화면 하단에 금융 용어 사전 링크를 제공하는 그런 방식 말고요.(제발!)
아무튼 시간이 되신다면 한 번쯤 생각해 보시길 권합니다.
좋은 사례 하나는 지난 글 하단에 이미지로 소개하긴 했어요.
주거래 은행이 의미 없는 시대입니다.
누구든 금융 앱을 다운로드해서, 비대면 계좌를 개설, 해지할 수 있고 이리저리 금리를 따지며 대출받을 금융사를 마음껏 찾아볼 수 있는 세상이죠. 1 금융, 2 금융은 물론 은행, 보험사, 증권사... 금융사마다의 하는 일의 경계도 희미해지고 있습니다.
회사 간 경계뿐만 아니라 국가 간 경계도 희미해져 미국장, 일본장에서 투자를 하는 사람도 폭발적으로 증가했죠. 이제 금융 UX도 사용자의 '보편적 금융 생활, 글로벌 금융 거래'에 대해서도 고민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재작년과 작년, 해외 인터넷 은행 앱 writing 작업을 하면서 저는 다른 언어로 된 금융 자곤에 대해 학습해야 했습니다. 그건 한국 금융 자곤을 알고 있다는 것과는 또 다른 차원의 도전이었습니다. 그 나라의 대출 패턴, 계좌의 개설과 해지, 적금의 가입과 해지, 제휴 카드와의 연계 서비스... 물론 타깃 국가 특유의 독특한 금융 체계도 있었지만 그 근간에 보편적인 금융 시스템의 작동 원리가 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다음부터는 UX writing을 할 때에는 고객이 보편적인 금융 생활을 할 수 있도록 용어의 번역어와 설명에 신경을 쓰고 있어요. 국적과 업종에 상관없이 고객이 동일한 금융 행위를 할 때, 혹시라도 나의 잘못된 설명으로 혼란을 겪지 않도록, 근간이 되는 금융 용어와 설명, 프로세스를 명확하게 적용하려고 노력합니다.
외국인 고객이 한국 금융 서비스를 이용할 때, 한국인 고객이 외국에서 금융 서비스를 쓸 때 영어나 다른 언어로도 같은 개념을 잘 이해할 수 있을지를 고민하고, 언어별로 공식 자곤을 제대로 쓰고 있는지 주의해서 작성합니다.
관련된 경험을 하나 소개하자면, 미국 국적 사용자를 타깃으로 하는 코인 거래소 화면에서 wire transfer 개념을 한국어 사용자를 위해서 설명해야 한다면 어떤 표현을 써야 하는지에 대해 고민했었습니다. '전신 송금'이라는 기존 번역어를 쓰자니 너무 옛날 용어고, ‘전산 이체’라고 하자니 요즘 이체가 전산으로 안 되는 게 어디 있나 싶고, 그렇다고 엄연히 쓰이고 있는 개념을 자의적으로 해석해서 용어를 만들자니 위험해 보입니다. 실제 라이팅 할 때 이걸로 기획자, EN writer와 논의를 꽤 했고 여러 의견이 오갔습니다. 미국에서 금융 거래를 해본 적도 없고 코인도 안 하는 제겐 분명 쉽지 않은 일이었어요. 하지만 꼭 필요한 과정이었습니다.
이미 금융 서비스 판은 춘추 전국시대, 글로벌화되어 있고 우리는 이제 한국어 사용자만 상대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언어로든, 어떤 앱에서든 사용자가 혼란을 겪지 않고 금융 활동을 할 수 있게 하자, 사용자에게 '보편적이고 글로벌한 금융 경험'을 구축해 주어야 한다는 태도로 글쓰기 작업에 임해야 합니다.
오늘 글의 주제이면서 이 시리즈의 주제이기도 합니다.
사실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지금부터예요.(아니 뭐?!... 이렇게 길게 써놓고?!)
금융 UX writer는 고객에게 금융의 무게를 알리는 역할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금융의 무게는 무엇이고, 그 무게를 인지시키는 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무서운 말로 위협하거나, 컨펌 팝업을 여러 개 막 줘서, 진짜 할 거야? 할 거냐고? 진짜로?를 계속 물어본다거나, 시뻘건 글씨로 '잘못되면 그거 다 니 책임이야(= 투자에 대한 책임은 전적으로 본인에게 있으며 OO은 중계 서비스일 뿐 투자 결과 일체에 책임지지 않습니다.)' 같은 disclaimer를 볼드 14포인트로 써두는 건가요?
아니요. 단언컨대 이런 방식은 금융 UX designer의 책임감이 아닌 사고에 대한 두려움, 책임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의 외화입니다.
저는 그저 뭔가를 더 잘하려고 하기보단 해서는 안될 일을 하지 말라고 하고 싶네요.
금융 행위를 게임처럼, 쇼핑처럼, 펀(fun)하게 말하지 말라고요.
그리고 '쉬움'을 핑계로 대면서 텍스트와 이미지로 투자를 조장하지 말라고요.
먼저 금융의 무게를 가볍게 하는 사례를 들어봅시다. 미안하지만 또 Toss 증권 화면이네요.
저는 처음 이 화면의 레이블과 아이콘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내가 Vibe 음악 앱을 켰나? '인기 차트', '구매 Top 100', 눈이 하트 뿅뿅인 아이콘, 축포 아이콘... 아래로 스크롤하면 세상 힙한 음악 서비스 Vibe 앱처럼 '좋아할 것 같아서' 주식 믹스테이프가 나올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어요. 개인적으로 첫 투자자들의 눈높이에 맞췄다는 설명만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그러니까 탈권위주의적이고 탈엄숙주의적인...아니 사실은 투자에 대한 희화화가 느껴졌습니다.
지금 우리가 770원짜리 음원 MP3 파일 구매하는 게 아니잖아요. 힘들게 번 백만 원 이백만 원... 어쩌면 재산의 대부분을 들고 이 화면을 마주했을 수도 있는 초보 투자자에게 이 아이콘과 레이블은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이 메인 화면에 투자의 중요성, 위험성, 금융 행위에 대한 무게가 잘 드러나 있나요?
Toss 주식 1주 증정 이벤트에 이끌려 들어와 막 첫 투자를 시작하려는 주린이에게, 이 레이블과 아이콘은 투자라는 행위에 대해서 어떤 이미지를 심어줄까요?
(참고로 니가 뭔데 아이콘에 대해서 이야기하냐?!라고 하실 수도 있어서 설명을 드리자면, UX writer라면 응당 텍스트와 아이콘 모두에 대해 코멘트할 수 있고, 또 해야 합니다. IA의 labeling system에서 의미 체계를 형성하는 2가지 핵심 요소가 아이콘과 텍스트이기 때문에 writer는 이 둘의 상태를 항상 같이 살펴보아야 하거든요. 아이콘은 디자인만의 영역이 아니라는 말씀!)
같은 화면 하단에 있는 '만약 어제, 1달, 3달, 1년 전에 알았더라면'이라는 카피는 더욱 문제적입니다.
이 마이크로 카피는 2가지 문제를 지니고 있습니다.
첫 번째 문제는 후회와, 불안, 조급함을 조장하여 메인 타겟층인 주린이 사용자의 매수를 조장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작년에만 알았더라면' '아, 그때 샀었어야 하는데'라는 후회는 누구나 하지만, 이 문장을 주식 앱 메인 화면에 노출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입니다. 이건 사람들의 불안 심리를 높여서 매수 행동을 하게 하려는 사실상 writing dark pattern입니다. 금융 서비스에서 이런 표현을 쓰는 것에 대해 저는 정말 우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두 번째 문제는 이 섹션과 레이블은 사용자에게 어떤 정보도 제공하지 못하고 있다는 겁니다. UI 요소로써 레이블 본연의 기능을 해야 하는데 주식앱 메인 화면에 있는 이 섹션의 타이틀은 사람들의 불안과 후회를 상기하는 것 외에는 어떤 역할도 하고 있지 못합니다.
게다가 아래 나오는 + 6.2%라는 숫자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도통 알 수가 없습니다. 수익률인가요? 성장률인가요? 영업이익인가요? 버튼을 눌러서 다음 화면으로 가서 아래로 쭉 스크롤하고, 아까 외워둔 숫자와 비교하기 전까지 저 숫자는 그냥 '올랐어, 많이 올랐다고!'라는 역할만 수행할 뿐입니다. 참고로 이 수치는 만약 1일, 1달, 3달, 1년 전에 이 분야 주식을 샀다면 현재 얻었을 수도 있는 업종별 평균 예상수익률이라고 합니다.
요컨대 이 레이블은 초보 투자자는 물론 이 화면을 보는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이 말랑말랑한 마이크로카피를 계속 사용하고 싶다면, 기준 시간 옆에 '2021.5.2 14:32 현재 수익률 기준'이라고 데이터의 정체를 밝히는 편이 조금이라도 사용자에게 도움이 되겠습니다.
또 하나 특이한 것은 위에서 자극적인 카피로 후회와 불안을 상기시켰는데, 아래에서 동일한 데이터(지금 가장 많이 오르고 있는 곳은? - 근데 지금도 아님 5년전 데이터까지 제공하니까)를 똑같이 게시하고 있다는 겁니다.
메인 화면에 매수 욕망을 불러일으키는 불완전한 정보를 중복 제공하는 것보다는, 좀 어렵게 느껴져도 투자자에게 의미 있는 정보를 다양하게 제공했으면 좋았겠습니다.
금융 앱은 조금 덜 펀하고, 덜 쿨하고, 덜 섹시해도 됩니다. '스티커로 꾸민 다이어리 같다, 과도한 인포그래픽으로 인해 투자에 필요한 필요한 데이터의 일반화와 과장이 심하다, 디자인이 엔지니어링을 먹어버렸다'는 Toss 증권 UI에 대한 세간의 평가 이면에는 '투자는 너무 많은 정보를 필요로 해서 힘들어. 하지만 그게 잘못된 것은 아니야'라는 정석적인 투자 마인드가 자리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주면 좋겠습니다.
주식과 UX에 모두 관심 있는 주변 사람들이 Toss 증권 UI가 로빈후드를 많이 참고한 것 같다고 하더군요. Toss는 어쩌면 한국판 로빈후드가 되고 싶어 하는 게 아닐까 생각해 봤습니다. 아니, 송금, 보험, 카드, P2P, 증권에 은행까지 붙이면 로빈후드 보다 더 굉장한 핀테크 유니콘이 될지도 모르겠네요.
저는 바로 그 로빈후드의 UI text와 관련된 비극적인 사건 하나를 소개하며 이 글을 마무리지으려 합니다.
2020년 여름 로빈후드 이용자인 젊은 경영학도가 자살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는 로빈후드의 옵션 거래 플로우와 UI text를 잘못 이해해서 그만 자신이 옵션 거래에 실패해서 9억 상당의 손실을 입었다고 착각했습니다. 황급히 고객센터와 연락해서 사실을 확인하려고 해봤지만 고객센터에서는 답이 없었습니다.
결국 그는 감당할 수 없는 상황에 대한 두려움을 이기지 못하고 안타깝게도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그리고 그 유족들이 현재 로빈후드를 상대로 소송을 벌이고 있습니다.
로빈후드 서비스가 스무 살 청년이 감당할 수 없는 레버리지와 리스크를 방조했고, 정작 초보 사용자가 도움을 필요로 할 때에는 도움을 주지 않았다는 것이 소송의 내용입니다. 물론 인터페이스 문제도 지적되었습니다.
이 사건 이후 로빈후드 창업자들은 플랫폼 플로우 개선, 옵션에 대한 사용자 금융 교육 강화, 그리고 인앱 메시지 및 이메일 텍스트 개선과 초기 옵션 할당 방식에 대한 세부사항 표기를 약속했습니다.
하지만 너무 늦었어요. 너무 늦었습니다.
저는 기사에서 숨진 알렉스가 위의 앱 화면 중앙의 '구매력(buying power)'에 마이너스가 찍힌 것을 부채로 잘못 인식했을 거라는 부분을 읽고 뜻 모를 좌절감을 느꼈습니다.
만약 저 이미지의 보라색 영역에 (?), (!) 또는 (i) 인포 아이콘을 넣고 버블 툴팁으로 '옵션 거래 과정에서 일시적으로 마이너스로 표시될 수 있습니다. 실제 발생한 부채가 아니니 안심하세요.'라는 안내를 해줬더라면,
buying power가 곧 부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정보를 메뉴 디스크립션으로라도, 수치가 마이너스로 바뀌었을 때 1회성 팝업으로 설명했더라면 혹시라도... 정말 혹시라도 그의 죽음을 막을 수 있었을까 하는 그런 쓸쓸한 생각이 들었어요.
노동 소득만으로는 생계를 영위하기 어려운 초인플레이션의 시대에, 저는 더 많은 젊은 세대들이 자신의 자산을 잘 굴려나가길 바랍니다. 저도 그 청년 중에 하나라서 더욱 절실한 마음이에요.
하지만 저는 무엇보다도 그 누구도 유혹과 조장으로 판단력을 잃고 자책하거나 고통스러워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가능하면 모두가 차분하고 이성적인 투자를 할 수 있기를,
그들의 준비된 의지가 적절히 발현될 수 있도록 우리 서비스가 역할을 할 수 있기를,
우리 손으로 만든 앱이 사용자의 삶을 해하는 일은 없기를, 저는 직업인으로서 바라고 있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금융 UX writer의 책임은 다음 세 가지입니다. 첫째, writer는 금융을 모르는 사용자에게 어려운 금융 용어와 거래 과정을 설명, 인지, 반복 학습시켜야 합니다. 사용자의 야매(?) 금융 선생님은 바로 나(!)라고 생각하세요. 둘째, UX writer는 언어 국적과 상관없이 사용자가 금융 생활을 영위할 수 있도록 보편적/글로벌 금융 개념에 대해 관심을 갖고 용어 및 개념 적용, 번역에 주의해서 작업해야 합니다.
셋째, UX writer는 사용자에게 금융 행위의 무게를 인지시켜야 합니다. 특히 초보 투자자에 '이 행위가 당신의 소중한 자산을 잃게 할 수 있는 무거운 행위이므로 반드시 준비된 상태에서 신중하게 진행해야 한다'는 점을 보이스& 톤, 마이크로카피 등에서 우아하게 드러내면 좋습니다.( disclaimer만 쓰지 말고 쫌!)
혹여라도 투자를 조장하거나 사용자의 후회, 불안, 조급함을 불러일으키는 문구를 쓰고 있지 않은지 항상 경계해야 합니다. 덧붙여 금융 서비스의 레이블은 여타 서비스 대비 압축적이고 간결해야 한다는 사실도 잊지 마세요. 내가 쓴 UI 텍스트가 금융 데이터로써 정보의 질과 양을 모두 충족시키는지에 대해 냉정하게 바라보십시오.
덧 1 : 워렌 버핏의 오랜 파트너이자 전설적인 투자자인 찰스 멍거 옹이 지난 2월 주총에서 로빈후드의 투자 도박화 경향을 세게 비판하자, 로빈후드 측에서 '시대 변화를 이해하지 못하는 엘리트주의다'라고 맹 비난했습니다.
고인 물 타령을 하며 길길이 날뛰는 로빈후드에게 투자 경력만 근 80년인 우리의 멍거 옹은 이런 뼈 때리는 일침을 남겼습니다. 멍거 옹... 무병장수하셔야해요.
덧 2: 긴 글 읽으시느라 고생하셨어요. 어려운 금융 레이블에 대해 내리 세 편을 쓰니 저도 재미가 없네요. 다음에는 '한국어 UX writing을 망치는 개노답 3형제' 같은 걸 써볼까 합니다.
아무렴 뭘 써도 이 글보다야 재미있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