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 레이블은 어떻게 써야 하는가?(2): 카카오 뱅크의 사례
첫 글에서는 '매도, 매수'와 '판매, 구매', Toss 증권 사례에 대해 이야기했는데, '그깟 용어 좀 부정확하게 썼다고 뭐 큰 문제가 일어나는 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 유난이냐?'라고 하실 분들이 계실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번 글에서는 '왜 금융 서비스의 UI text는 이 모양인가?'에 대해 이야기해 보려고 하는데, 어쩌면 이 글이 왜 UX에서 '그깟 용어'가 문제가 되는지, 왜 제가 UI text 하나 잘못 쓰는 걸 두려워하는지에 대한 답이 될 수도 있을 것 같네요.
앞 글에서 언급했다시피 일제 강점기 일본의 침략적 금융 체계가 도입되면서 일본식 한자어가 한국 금융업 전반에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한국어와 일본어 모두가 한자어를 많이 사용하는 언어이고, 개중에는 반드시 일본식 한자어라고 할 수 없는 것들도 있어서, 크게 문제 삼지 않고 넘어간 면이 있죠.
법률 용어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대륙법을 근간으로 한 일본의 법률 용어가 아직까지도 널리 쓰이고 있기에, 법조계에서도 끊임없이 법률 용어 순화를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여기에서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금융 용어와 법률 용어의 긴밀한 연관성입니다.
돈과 분쟁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이죠. 금융은 재화에 대한 권리를 둘러싼 법적 계약을 근간으로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민법의 물권과 채권이 동산과 부동산, 즉 재화, 권리, 금융에 관련된 사안을 다루고 있는 것을 보면, 금융과 법은 거의 샴쌍둥이 같은 관계라고 해도 무방하겠습니다. 개인과 조직에 작은 금전적 손해나 문제가 발생해도 바로 법적인 조치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은 것만 봐도, 역시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는 관계네요.
이것이 제가 생각하는 금융 용어가 어려울 수밖에 없는 첫 번째 이유, 즉 금융 자곤을 한 금융 서비스에서 독자적으로 순화하기가 어려운 이유입니다. 금융 관련 사안을 설명할 때에는 분쟁에 대비해 검증된 용어를 사용하는 게 좋고, 그 용어 자체도 추후 소송에 대비해 법률 용어와 어느 정도 맞닿아 있는 어휘를 사용하는 게 여러모로 안전하니까요.
만약 내가 담당하는 금융 서비스가 독자적으로 용어를 바꿔서 서비스하다가 분쟁이 났을 때, 사용자와 따로 문제 해결이 잘 안 되어서 결국 소송으로 가게 된다면, 그때부터 내가 쓴 모든 용어에 대해 법적인 책임 소재를 따지게 됩니다.
내가 주의 깊게 정의하여 사용하지 않은 용어가 금융 소비자에게 어떤 혼란을 주었는가, 오해의 여지를 줬는가, 계약 사항을 부정확하게 인지하는 데에 일조하지 않았는가, 금융 소비자를 보호하는 데에 부족함이 없었는가, 모호하거나 낯선 표현을 쓴 것이 금융 소비자를 속이려는 고의성은 없었는가 등등을 따지게 되면...
그때부터는 writer로서의 삶이 정말 괴로워지죠.
아니, 사실 법정까지 가기도 전에 금감원에서 한 마디 하기 시작하면 헬게이트 오픈!...
오우... 생각하고 싶지 않군요.
그래서 writer들은 중요한 금융 용어 대신 대체 표현을 쓰려고 할 때에는 정말 정확한 대체어를 찾으려고 노력합니다. 중간중간 기존 금융 자곤을 병기하거나, 금융 용어인 한자어를 풀어서 기술하는 방법도 같이 쓰죠. 물론 그것만으로도 부족하면 하단에 작은 글씨로 법적 대응력을 가지는 disclaimer를 기재하고, 최종적으로 각 금융사마다 있는 준법팀에게 컨펌을 받습니다.
문제가 있을 수 있는 용어나 표현을 준법팀이 철저하게 검토한 후 현업(금융사 실무진)들의 의견도 수렴하면 그제야 준법 필 도장을 '꽝' 받을 수 있습니다.
그렇게 최종 앱 화면에는 걱정이 넘쳐흐르는 방어적 문장이 가득 차게 되는 것이죠.
어려운 금융 자곤을 쉽게 고칠 수 없는 두 번째 이유는 금융 앱 뒤편에 있는 금융사 현업들, 더 근본적으로 소위 '금융권'이라고 불리는 단단한 문화 때문입니다.
현업이라고 불리는 금융 실무진은 보통은 공채 출신으로 수년, 수 십 년간 창구에서, 본사에서 고객과 만나고 통화하고 기존의 금융 시스템을 이용하고, 고치고, 연동하고, 에러 나면 대응하고, 그렇게 했는데도 문제 생기면 고객에게 찾아가 사과하고... 아무튼 이런저런 산전수전을 다 겪은 분들입니다. 금융사 수십 년의 역사 동안 이 금융 실무진들이 수기에서 타자로, 워드프로세서에서 컴퓨터로 금융 시스템을 발전시켜 왔죠.
그런데 이 현업들은 상당히 보수적입니다. 금융사에서는 금융 사고가 나는 걸 극도로 꺼려하기 때문에 매뉴얼 중심으로 움직이고 안전하게 행동합니다. 조금이라도 위험할 수 있는 안내문, 용어 등은 철저히 업무에서 배제합니다. 사고를 방지하기 위해 가능하면 대고객 용어와 내부 전산 (처리계) 용어를 일치시키려고도 노력합니다.
이 현업들은 또한 해당 금융사의 문화뿐만 아니라 금융권 공통의 전문 용어와 문화에 잘 단련된 사람들입니다. 저는 금융사 실무진들을 보면서 금융권 전체가 가능하면 동일한 용어를 쓰고, 동일한 방식으로 사고하려고 노력한다는 인상을 받았어요. 같은 용어, 시간과 법이 검증한 말을 쓰면 금융사간 사고가 일어나지 않을 확률이 크니까요.
그렇게 현업에 의해 잘 정립되어 내려온 어려운 금융 자곤은 오프라인 금융 창구와 금융 앱에서 동일하게 쓰이게 되었고, 또 바로 다름 아닌 그 실무진들이 차세대(왜 금융권에선 '차세대'라는 말을 좋아하는지 모르겠습니다만) 금융 앱을 만들 수행사를 찾고, 외주를 주고, RFP를 쓰고 , 요구사항을 내고, 피드백하고...
그래요, 결국 금융 앱을 만드는 건 금융사에 스카우트된 유능한 UX designer나 외주 수행사가 아니라 금융사 실무진, 현업입니다. 오프라인의 경험(그것이 정말 별로인 경험일지라도)을 그대로 온라인으로 옮긴 거죠.
그렇게 '사고는 잘 안 나는데 굉장히 쓰기 불편한' 금융 앱이 탄생하게 됩니다.
이런 상황에서 2017년 여름, 카카오 뱅크가 인터넷 전문 은행으로 영업을 시작했습니다.
여러분 카카오 뱅크 앱이 처음 론칭했을 때를 기억하시나요?
당시 금융권에 엄청난 반향을 불러왔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카뱅의 선전에 업계 1위 은행장이 빡쳐서 일주일 만에 카뱅같은 거 만들어오라고 했다는 루머(뉴스?)가 돌고, 금융권에서 UX 인력을 대량으로 차출해가던 이직 호시절(?)이기도 했네요. (그러나 누가 화난 은행장 밑으로 들어가 일주일 만에 처리계랑 연동되는 은행 앱을 만들고 싶겠습니까?)
아무튼 저는 카뱅 앱을 처음 봤을 때 '와.. 진짜 노련하다'라는 생각을 멈출 수가 없었어요.
마치 평균대 위에 가볍게 올라 선 체조선수처럼 균형감 있게 정보를 다뤘으니까요. 당시 카뱅은 기존 금융 자곤 중에서 필요한 것을 최소한으로 제공하고 어려운 용어나 방어용 disclaimer는 전략적으로 한 뎁스 안쪽으로 들여 넣어 배치하거나 또는 과감하게 표시하지 않았습니다.
진행 중인 과업 하나에 집중할 수 있게 과정을 단순화하고, 단계별로 '당신은 이성이 있는 성인이니까 분명히 이걸 읽고 이 과정을 따라올 수 있어요.'라는 식의 군더더기 없는 가이드를 제공했습니다.
무엇보다 카뱅은 무리해서 기존 금융 자곤을 순화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Toss의 사례에서 보듯이 자곤이라는 것이 순화를 잘못하면 틀린 말을 쓰게 되고, 잘한다고 해도 공간을 많이 쓰게 되어서 간결성이 훅! 떨어지게 됩니다. 보통 한자어가 2, 4음절로 압축적인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에, 그걸 과하게 풀어쓰면 북한 문화어(!) 같이 되거나, 질질 늘어지는 느낌을 받을 수밖에 없거든요.
카뱅은 기존 용어를 쓰되, 막연히 금융을 어려워하는 사용자에게 인지적으로 부담을 주지 않을 만큼 화면 내 노출 빈도를 낮췄고 정보량을 조절했습니다. 한자어 금융 자곤과 생소한 용어 설명을 위해 평이한 일상어를 적절히 혼용한 UI text가 제공되었습니다.
요컨대 제가 본 카뱅의 writing 전략은 '안 쓰는 게 아니라 적게 쓰고, 소화 가능할 만큼 나눠서 쓴다. 사용자가 금융 자곤을 화면 내에서 바로 이해하고 학습할 수 있게 설명한다'입니다.
정확성과 간결성, 사용자 친화력을 모두 쥐고 가겠다는 전략이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처음 만난 카카오 뱅크의 UI와 텍스트에서는 기존 금융 앱에서 진하게 베어 나오던 금융 사고에 대한 두려움이 느껴지지 않았어요.
보통 서비스의 욕망과 두려움은 UI text에 잘 드러납니다. 사업이 잘 안돼서 갈급하게 뭔가를 팔고 싶거나 또는 클릭률, 도달률 등 지표가 안 올라서 미칠 것 같으면 그게 투명하게 텍스트에 반영되거든요. 질척거리는 톤 앤 보이스, 계속 내가 혜택을 주겠다 어서 받아라 받아라 하거나, 지나치게 흥분해있거나, 같은 포인트를 반복적으로 강조하거나... 뭐라도 해야 한다는 절박한 마음이 행간에서 느껴지곤 해요. 시쳇말로 '걱정 레이블'이 화면에 넘쳐나는 것이지요.
그래서 종종 바뀐 UI text만 봐도 ' 아이고 이 회사에 뭔가 문제가 생겼구나...' 싶을 때가 있습니다.
아무튼 당시 카뱅은 말로 고객을 위협하거나, 긴장시키지 않았습니다.
마치 '우리 앱은 안전해. 그래서 우린 굳이 여러 말로 당신을 힘들게 하지 않을게'라고 말하는 것처럼 간결하게 필요한 정보와 금융 용어만 표시했죠. 당시 저는 사실 이게 가장 놀라웠습니다.
텍스트에서 돈 사고에 대한 두려움이 느껴지지 않는 금융 앱은 당시의 카뱅이 처음이었거든요.
이런 앱을 만들어 낼 수 있게 한 원동력은 아마도 개발의 단단함, 보안에 대한 자신감, 서비스 철학에 대한 확신, 그리고 대형 금융 사고라는 나쁜 경험이 없는 깨끗한 멘탈(?)이 아니었을까... 돌이켜 생각해 봅니다.
아무튼 그렇게 카뱅은 금융 서비스에서 왕따도 되지 않고, 서비스가 우스워지지도 않은 채로 겁 없는 메기가 되어서 업계에 파란을 일으켰습니다.
금융 용어가 어려운 이유는 법률 용어와 맞닿아 있기 때문입니다. 검증된 용어를 사용하면 사고를 방지할 수 있고, 분쟁이 생겼을 때도 대처하기가 쉬우니까요. 또한 보수적인 금융권 문화가 통일된 금융 자곤을 사용하도록 독려하는 측면도 있습니다. 요컨대 금융 자곤은 '돈 사고에 대한 두려움'과 관련이 있다고 할 수 있죠. 물론 이 두려움은 다음 글에서 이야기할 '사용자 삶에 대한 책임감'과는 다릅니다.
카카오 뱅크는 2017년 기존 금융 서비스에 짱돌(!)을 던지며 등장했습니다. 카뱅의 글쓰기 전략은 기존 금융 자곤을 쓰되 되도록 적게 쓰고, 소화 가능할 만큼 나눠서 쓰는 것입니다. 금융 용어를 화면 내에서 바로 이해하고 학습할 수 있게 설명함으로써 정확성과 간결성, 사용자 친화력을 모두 놓치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두려움과 걱정이 없는 카뱅의 자신감은 텍스트에 그대로 반영되었습니다.
다음 글은 이번 시리즈의 마지막 글입니다.
이 '금융 레이블은 어떻게 써야 하는가?' 시리즈를 쓰려고 했던 목적(?)과 하고 싶은 말을 마저 써볼까 합니다.
덧 1: 저는 금융사에 2년 남짓 짧은 기간 동안 일했었는데 그때의 경험은 정말이지 여러 가지 의미로 (?) 센세이셔널했습니다. 금융사 IT 부서에 입사한 UX designer들은 종종 문화 충격을 겪곤 하는데, 특히 업계와 현업의 보수성에 부딪혔을 때 굉장히 놀라곤 합니다. 전에 일하던 스타트업, IT 회사에서는 경험한 적 없는 철옹성 같은 조직 문화에 좌절하기도 하고, 멘탈이 탈탈 털리기도 하죠.(이런 분위기에서 혁신은 무슨 혁신이야! 이런 데에서 카뱅같은 걸 어떻게 만들어?!! 아아악!)
다만 혹시라도 글을 읽으신 분들 중에서 위에서 언급한 금융사 현업분들에 대해 오해하시는 분이 계실까 걱정입니다. 언뜻 혁신을 거부하고 변화를 싫어하는 고인물이라고 생각하실 수도 있겠습니다만, 고객의 전재산일 수 있는 귀중한 돈을 운용하고 관리하는 사람이기에 금융사 분들의 그런 보수성이 고마울 때가 더 많았습니다. 같이 일해보면 다 좋으신 분들입니다.
덧 2: 저는 카뱅과 1도 관련이 없습니다. 혹시나 궁금해하실까 해서요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