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아면류학說]직장면식 전반부

나는 회사에 밥 먹으러 다녔다.

by Joo Jun


전격 고백!

사실 저는 그동안 회사에 밥 먹으러 다녔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밥 먹으러 다니고 있습니다.


첫 직장에선 백반집에 월 식사 끊어놓고 밥 먹는 낙으로 야근을 했습니다.

첫 직장은 구디단이었는데 6시에 업무가 끝나면 심리스하게(...) 야근으로 이어졌기 때문에, 지식산업센터풍 건물에 입주해있던 당시 회사 아래층으로 슬리퍼를 질질 끌고 내려가서는 매일 메뉴가 바뀌는 백반집에 털석 앉아 밥을 달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마치 퇴근하고 돌아온 못난 자식처럼 식당 구석에 놓여진 TV를 보며 우물우물 저녁을 먹었어요. 신발을 벗고 올라가 앉아 먹는 집이었는데 어째 먹다 보면 꼭 앉아서 한쪽 다리를 세우고 밥을 먹게 되곤 했습니다. 습관하고는.

양말 신은 발가락을 꼼지락꼼지락거리며 내일 날씨까지 다 보고 부스스 일어났었죠.

10시엔 집에 가야 하니까 3시간만 더하자!(52시간 근무제인 지금 생각해보면 이런 멘트 어처구니가 없지만)

팀 전체가 매일 와서 장부에 이름을 달아놓고 저녁을 먹고 가니까 사장님과도 친해져서 종종 이런저런 사이드 특식 반찬(잔치 국수라든지)을 얻어먹기도 했습니다.


다운로드 (4).jpeg 아시지요? 이런 느낌적인 느낌 나는 7천 원짜리 백반 (출처: 네이버 방문 리뷰 '봉태민 구디 8호점')


L 모 전자 회사에 다닐 때는 저의 직장 식사 역사에 전환점이 된, 그러니까 제 회사 생활의 구원자였던 수요폭식회, 목요먹여회가 있었습니다.

수요일 점심이 되면 6명이 동료의 모닝에 낑겨타고 가산동 근처 광명에 가서 정인면옥 냉면도 먹고, 시 외곽 밤일마을(마을 이름은 야하지만... 맛집이 모여있는 외식 단지일 뿐입니다.)에 가서 쌈밥도 먹고 그렇게 흥겨울 수가 없었습니다. 당시 저는 친했던 동료와 사이가 틀어져 심리적으로 위축되어 있었는데, 갑자기 다른 동료들이 '같이 먹으러 가요!' 라며 끼워준 모임이었죠. 제 인생에 그렇게 소환된 적도 처음이고, 그렇게 즐거웠던 외식 여정도 처음이었습니다. '너 우리의 먹동료가 돼라!'라는 느낌이었어요.

수요일이면 아침부터 흥겨웠습니다. 오늘은 무엇을 먹을까나아아 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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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인면옥 완냉의 추억들. 동료들은 서로를 독려하며 후회 없이 먹어 나아갔습니다.



그러다 회사가 연속 적자를 내면서 사업부가 계속해서 축소되었고, 같이 먹어 나아가던 멤버들이 하나 둘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그래도 남은 사람들은 꿋꿋이 목요 먹여회를 결성, 계속해서 먹어 나아갔습니다.

목요일이 되면 회사 앞 돼지 분식에서 뽀얀 수제비와 손만두를 시켜놓고 옹기종기 둘러앉아 점심을 먹었습니다. 헤어진 사람들을 생각하기도 하고 불안한 회사와 미래에 대해 이야기하기도 했지만 뱃속은 언제나 따뜻했어요. 모두 각자의 자리에서 먹어 나아가고 있겠지 생각하며 열심히 먹고 또 먹었습니다.

가끔 조금 떨어진 다른 건물에 있는 옛 동료들을 찾아가는 출동! 목요먹여회도 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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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의 맛 돼지 분식. 울 엄마도 손만두 이렇게 못 빚어 줍니다.



가디단에서 일했을 때에는 종종 저녁식사로 혼자 망향 비빔국수 매운맛을 먹고 집에 돌아갔습니다.

젊은 여자가 주 2회 혼자서 매운 비빔국수를 먹으러 오니까 사장님이 특이하다고 생각하셨는지 나중엔 막 만두 쿠폰도 주시고, 속버린다고 쿨피스도 주시고 했습니다. (맨날 매운맛만 먹으니까 조용히 육수도 떠서 스윽 올려주고 가시고. 육수는 셀프인데.)

국수 한 그릇을 말끔히 다 먹고 미니스톱에서 시즈널 소프트콘 하나 물면 하루가 개운하게 끝나는 느낌이었어요. 얼얼해진 입술을 달래며 문을 닫은 철공소 골목을 터벅터벅 걸어서 근처 자취방으로 돌아가곤 했습니다.

벌이는 좋지 못했지만 남 부러울 것 없는 평온한 저녁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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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이 맵게 해달라고 하면 위에 매운 고춧가루를 뿌링클처럼 뿌려주시곤 했어요. 아무리 생각해도 내 위장에 풍이 든 시기였던 듯.


회사 근처에 있던 가산동 W몰은 길티 플레저 직장면식의 성지였습니다.

다들 빡치는 일이 있으면 우르르 쇼핑몰 지하 틈새라면에 몰려갔었는데, 다함께 빨개면(매운 라면+계란)이나 빨개치(매운 라면+계란+치즈)를 시켜놓고 '으어 으어'하면서 다 먹고나서는, 그 옆에 롯데리아에서 아이스크림콘을 하나씩 물고 지상으로 올라왔습니다. 틈새라면식 덕분에 캡사이신 꿈나무(?)인 동료도 알아보게 되었고, 같이 일하던 한국계 미국인 리처드의 매운맛 한계도 시험해볼 수 있었습니다.

저는 무리 중에서 유일하게 빨개면 '아주 맵게' 버전을 먹을 수 있는 사람이었는데, 매번 시킬 때마다 사장님이 '아주~ 맵게요?'라고 꼭 물어봐주셨어요.

고맙습니다. 사장님.

저 아직 안 죽고 살아있어요.


S__17752091.jpg 약간 미친 것 같았던 시절. 이런 무서운(?) 라면을 점심으로 먹어 놓고도 오후에 일만 잘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당시 제 삶의 낙, 무한한 에너지원, 지방, 탄수화물, MSG의 결정체!

돈가스김치나베우동을 그곳에서 처음 만났네요.

어딜 가도 그 집처럼 기름지고, 맵고, 뜨겁고, 느끼하고, 감칠맛이 진하게 나는 그런 돈가스김치나베우동을 찾을 순 없었어요. 이거 한 그릇 먹으면 온몸으로 흡수되는 순도 100%의 불량한 기운으로 완충되어 회사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가산에 간다면 꼭 꼭 먹고 싶은 음식입니다. 마음의 고향이 뭐 별건가요 : )


내 생의 길티플레저 돈가스김치나베우동




직장면식 전반부는 여기까지.

돌아보면 무척 행복한 면식들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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