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아버지와 참새구이
어릴 적에 우리 집 마당에는 참새들이 수시로 날아와 앉아 뭔가를 쪼아 먹곤 했었다. 오빠는 참새를 잡아보겠다고 마당 한가운데에 끈을 매달은 작대기에 소쿠리를 받혀 비스듬히 세우고 그 밑에 쌀알을 뿌려놓는 줄 끄트머리를 잡고 툇마루에 앉아 기다렸다. 참새 두어 마리가 마당에 내려앉아 소쿠리 밑으로 들어가면 즉시 끈을 잡아당겨보지만 소쿠리가 닫히기 전에 참새들은 잽싸게 날아가 버려 한 번도 성공해본 적이 없었다. 한국에서는 보기 귀해진 참새를 여기선 자주 본다. 참새를 보면 시골 작은 아버지가 떠오른다. 아버지를 비롯하여 세 동생들은 진즉에 모두 서울로 올라와 자리잡고 살았으나 둘째 작은 아버지는 충청도에서 농사짓고 방앗간을 하며 살고 계셨다. 여름방학이 오면 우리 남매들은 서울역에서 기차 타고 시골 작은 아버지네 집으로 방학여행을 갔다. 작은 엄마는 방학 때마다 내려오는 큰집 애들이 반가울 리가 없었겠지만 귀찮은 내색을 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명절이나 친척들 경조사, 혹은 서울의 큰 병원에 갈 일이 있을 때마다 우리집에 몰려와 안방과 건넌방을 점령하고 몇날 며칠씩 신세를 졌었기 때문이다. 사촌남매들과 들판을 돌아다니며 놀다가 밭에서 잘 익은 수박과 참외를 따가지고 원두막에 올라가 깨뜨려 먹었고 느닺없이 소나기가 내려도 원두막으로 피해 올라갔다. 원두막에 옹기종기 모여 앉은 우리들의 어린 얼굴들이 떠오르고 수박밭에 쏟아지던 빗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밤이 되면 냇가에 나가 목욕을 했다. 시냇물에 나뭇가지를 드리운 커나란 능수버들은 전날 밤에 사촌들이 들려 준 이야기가 떠올라 보기만 해도 등골이 오싹했다. 밤에 대청마루에 있는 테레비 앞에 모여 앉아 보았던 '전설의 고향'은 그 어느 때보다도 스릴이 있었다. 옛날 생각이 나서 전설의 고향을 다시 뒤져서 보기도 했는데 범람하는 폭력물을 봐와서 그런지 순수하고 정감이 있었다. 어느 날 밤에 작은 아버지께서 참새를 구웠다면서 자는 우리들을 깨웠다. 작은 아버지의 손에 들려있는 접시위에는 짧은 다리와 몸통과 머리까지 까맣게 그을려진 참새들이 올려져 있었다. 잡기 어려운 참새를 공기총을 쏴서 간신히 잡았다며 어서 먹어 보라고 채근 하셨다. 우리들이 바라다 보고만 있자 작은 아버지께서 먹는 시범을 먼저 보이셨다. 짧은 참새다리를 손잡이 삼아 집어 들고 참새의 머리부터 씹으셨다. 에구구, 눈깔 터져 뿌렸다, 워쪄어...하시면서 쩝쩝쩝. 보고 있던 우리는 우웩! 서울에서 내려온 조카들한테 밥에 김치만 먹이는 마음이 거시기하여 닭이라도 한 마리 잡았으면 좋겠으나 작은 엄마 눈치가 보여 그러지도 못하니 참새라도 구워 먹이고 싶으셨던 모양이다. 사격실력도 좋아야하는데다가 공기총은 쏠 때 마다 매번 공기를 밀어 넣어 줘야했는데 그러는 동안 참새는 날아가 버리기 일쑤였다. 이래저래 쉬운 노릇이 아니라 나중엔 낱 알갱이에 농약을 섞어 뿌려놓아가며 잡는 바람에 결국엔 참새 씨가 말라 버렸다고 했다. 겨울 방학의 시골추억도 있다. 밥 때가 되어 작은 어머니가 아궁이에 짚으로 불을 때시면 곁에 쪼그리고 앉아 아궁이 불을 쬐던 것도 좋았다. 겨울이라 해가 일찍 떨어져 밤이 너무 길어 무료하다 싶을 때엔 고개 너머에 있는 외갓집을 향해 길을 나섰다. 언니와 붙어 걸으며 지난 봄에 나무에 목을 매달에 죽었다는 사람의 귀신이라도 보일 새라 땅만 보고 걸었는데 낮에는 가까웠던 그 길이 어찌나 길게 느껴졌는지 모른다. 외삼촌 할아버지의 집에 도착하면 당시 처녀, 총각들이었던 당숙들은 쌀자루가 켜켜이 쌓인 사랑방에 우리를 앉혀놓고 부엌 아궁이에 남아있는 불을 화로에 담아들고 들어왔다. 화롯불 속에 고구마를 박아 넣고 양철 쓰레받기에 땅콩을 구워먹었다. 날이 추워지기 시작하니 아궁이가 있는 부엌에서 몇 날 며칠 불을 때보고 싶고 화롯불을 쬐며 땅콩을 구워먹고 싶다. 얼마 전 가족 모임에 모두 모여 달고나 뽑기를 하면서 많이 웃었다. 돌아오는 추수 감사절 가족 모임때엔 뒷마당에서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를 해보기로 했다. 몇 십년 만에 추억의 게임들을 하나씩 해보니 삶이 더욱 즐거워지고 있다. '오징어게임'덕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