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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콜라 Oct 15. 2020

털게 해주자

어눌한 카운슬링

 
커지는 몇 년 간 네일케어와 헤어 컷팅을 해오면서 나와 조금은 각별했던 손님들이 생각난다. 캐시 아줌마와 앤 마리, 그리고 재키. 나보다 열 살 위였던 백인 여인 캐시 아줌마는 화학약품에 대한 알레르기가 심하여 모든 생활용품을 무색무취 무공해 유기농 제품을 사용해야 했다. 그녀는 개인용 손톱 손질 도구 박스를 항상 소지하고 네일 샾에 나타났다. 그녀에게 네일케어를 해주기 전에는 꼭 라텍스 장갑을 먼저 착용해야 했다. 까다로운 손님은 서비스를 해주는 중에도 피곤할 뿐 아니라 돌아간 후에도 집에 가서 보니 뭐가 맘에 안 들었다며 다시 찾아올 확률이 높기 때문에 매니큐어리트들은 서비스를 서로 미루며 꺼렸다. 거기에다가 대부분 영어도 어눌했기에  작업 중에 손님이 뭔가 마음에 안 들어 트집을 잡으면 원하는 대로 고쳐줘야 했는데 자신들의 말을 제대로 이해 못한 것 같이 여겨지면 손님들의 표정이 바로 굳어졌다. 그때부터 직업인인 우리들은 더욱 버벅거리기 일쑤라서 까다로운 손님은 특히나 서로 안 하겠다고 고개를 내저었다. 화학제품 알레르기가 있는 캐시의 발톱 손질을 왕초보인 내가 하게 된 이후로 그녀는 나한테서 손발톱 손질받기를 원했다. 영어에 능숙하진 않았으나 나이와 연륜으로 공감력은 늘어나 나의 짧은 영어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다양한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며 조금씩 친해지기 시작했다.
그녀 부부는 자식이 없어 중국에서 아이를 입양하여 키워왔고 그 아들이 열여덟 살이 되었다고 하였다. 아들이 청소년기를 거치는 동안에는 참으로 힘들었으나 그 시기를 무사히 넘기고 이제는 요리사가 되겠다고 진로를 정하여 훨씬 마음이 편해졌다는 가정사도 이야기하였으며 청소년 문제 상담 사무실을 운영하고 있다고 했다. 육십이 넘은 나이에도 좋은 몸매를 유지해온 비결을 물었더니 줌바와 힙합댄스를 오래 해온 덕분인 것 같다고도 하였다. 네일 샾에는 정확히 이주마다 나타났는데 예약 없이 들른 날에 샾에 내가 없으면 돌아갔다가 다시 왔다. 까다로운 그녀의 요구를 다 맞춰주어 속 이야기를 털어놓기가 편했던 모양이다. 한 걸음 더 들어가 시키지 않았어도 그녀의 도구 통 속의 물품들을 다 꺼내어 닦아 알코올 소독까지 하여 원위치로 정리해주면 참으로 고마워했다. 어느 크리스마스이브 아침에 가게 문을 열자마자 그녀가 들어왔다. 지금 여행을 떠나다가 부랴부랴 들렀다며 이십 불을 손에 쥐어주었다. 마음만 받겠다고 정중히 거절을 해보긴 하였으나 그 마음씀이 고마워 결국 받을 수밖에 없었다.
스물아홉 살의 앤 마리는 직장 때문에 동부에서 볼더로 이사를 오면서 키우던 개 한 마리를 데리고 아파트에서 살았다. 손톱 손질을 받으면서 스마트폰에 저장된 자신의 개와 남자치구, 그리고 가족들의 사진을 보여주면서 이야기 나누는 것을 좋아했다.  크리스마스가 가까워오자 그녀가 내게 선물 상자를 건네주었다. 열어보니 향수와 때밀이 장갑이 들어있었던 것이 두고두고 생각난다. 재키는 사십 중후반의 비즈니스 우먼이었다. 그녀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다가 내가 한 마디씩 해주는 것이 자신의 맘에 맞았던 모양이었다. 영어가 어눌해도 자세히 들어보면 내용은 쓸 만하고 또 감동을 받기도 하였는지 그 큰 눈에 눈물이 그렁거리기도 했다. 어쩌면 우울증 초기 증상이었을 수도 있다. 어느 날은 찾아와서는 시어머니가 갑자기 돌아가셨다며 울먹였다. 긍정적이고 주변 사람들을 즐겁게 해 주던 시어머니는 자기의 베스트 후렌드였었기에 그분을 잃은 상실감이 너무 크다며 손질해주는 내내 눈물 콧물을 철철 흘리며 울었다. 다 듣고 난 뒤 해줄 말이 이것밖에 없었다. 돌아가신 시어머니가 당신이 이렇게 슬퍼하며 밥도 못 먹고 건강을 축내고 있는 것을 좋아하겠는지 아니면 당신은 떠났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잘 먹고 잘 자고 매일 매 순간을 즐겁고 행복하게 사는 것을 좋아하겠는지를 생각해보라고. 평범하고도 평범한 말에도 위로를 받았는지 그녀는 눈물을 거두고 눈을 반짝 빛내며 나를 힘주어 끌어안고는 조금 가벼워진 발걸음으로 샾을 나갔다. 엄마가 돌아가시고 난 뒤 나 역시 울고 슬퍼하다가 병까지 났었는데 그렇게 해봐야 망자에게도 산 자에게도 좋을 게 하나 없다. 물론 지금도 살다가 문득 엄마가 보고 싶어질 때가 종종 있고 그때마다 가슴이 저며 오지만 그것을 알아차리고 지금 하고 있는 것에 마음을 붙이면 다시 심심하게 행복하고 평화로워진다. 저 너머에 있는 죽음과 여기 이 생생한 삶 사이에는 그렇게 딱히 큰 경계가 없다는 것을 알아가는 중이다. 카운슬링도 겸하는 동네 이발사라는 직업은 황혼의 내 나이에 딱 맞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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