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읽지 않을 테니까 적는 고백

나의 달콤한 사람들에게

by 주명



‘와 주명아 축하해!’
‘주명이 멋지고 장하다!’
‘내가 왜 이리 뿌듯하니!’

브런치에 입성하기까지 나는 삼수생이었다. 별 거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엄청나게 별 거였다. 별을 따는 기분이랄까.

올해 3월쯤 나는 나와 조약을 하나 맺었다. 단 한 줄이라도 매일 적는 ‘글쓰기 조약’.

시든, 에세이든, 신앙고백이든, 철학적 사유든, 내 주접이 버무려진 글이든 무엇이라도 적어야겠다고 다짐했다. 다짐은 어렵지 않았다. 쓰는 것이 어려웠을 뿐이지.

그런데 매일 꾸준히 적으니 ‘오! 나도 뭘 되게 열심히 할 줄 아는 사람이네? 즐길 줄 아네?’라는 생각에 하루하루가 신나는 작가적인 삶이었다. 작가의 삶이라 말하지 않는 이유는 내 글의 질이 좋고 양이 풍성한 것은 아니니까. 어쨌든 남들 다 보라고 올리는 혼자만의 짧은 글은 내 안의 응어리를 해소시켜줄 뿐만 아니라 나를 훨훨 날게 해 줬고 타인을 위한 위안이란 목적까지 미약하게나마 달성하도록 도왔다.

2~3년 전부터 인스타그램에 끄적끄적 쓰고 뜨문뜨문 올렸던 내 행위는 이제 매일 적는 습관이 되었고, 그즈음 글쓰기 모임에서 66일 동안 에세이를 써냈다. 쓰니까 또 써졌다. 내가 매일 A4 한 장을 쓸 수 있는 사람이었다니! 어떤 날은 다음 날이 출근인데도 밤 11시에 시작해 새벽 4시까지 A4 4장 분량을 썼다. 단 몇 시간밖에 자지 않았는데 전혀 피곤하지 않았다. 이거 참 신기한 일일세.

그렇게 66일의 미션을 마치고, 작년에 도전했다 떨어진 브런치에 다시 덤비기로 했다. 그러나 체계적이지 못했던 나의 계획서 덕에 나는 또다시 탈락했다. ‘아니, 다들 내 글이 좋다고 하는데 왜 떨어지는 거야!’ 약간 짜증이 났다. 예전의 나였다면 ‘그래 역시 나는 안돼’하고 그날을 쉬었거나 아니면 ‘됐다 나 따위가 무슨 글이냐’며 그냥 다른 취미를 찾아봐야겠다고 생각했을 거다.

그러나 글쓰기를 통해 나를 세워가던 나는 ‘그래 탈락은 탈락이고 나는 또다시 하면 돼’라는 마음을 먹었다. 그리고 탈락 알림을 받은 그날 밤 약간의 복수심을 더해 또다시 써서 도전했다. 그리고 그다음 날 점심 한 숟갈 뜨기 전에 소중한 글을 기대하겠다는 브런치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내 합격비법은 나만 알아챌 수 있도록 적은 소심한 브런치 돌려 까기였다)

너무 좋아서 인스타그램에 합격 안내 메일을 캡처해서 올렸다. 나는 탈락한 날에도 탈락 메시지를 인스타그램에 올렸다. 거기에 사진을 올려야 어느 정도 나와 내 글에 부끄러움을 느끼고 다시 도전할 것 같았으니까. 공개적인 창피함은 사람을 바꾸게 한다. 그런데 참 극적인 피드 아니겠는가. 나도 생각하지 못한 때에, 그것도 탈락한 다음날 나는 통과했다. 드디어 브런치 문으로 들어가는구나! 에헤라디야!

올라간 사진에 피리 부는 사나이를 따라가는 쥐들처럼 늘어나는 사람들의 축하 댓글에 기분이 좋았고, 이상했다.

‘아니 이게 이렇게나 많은 사람들에게 축하를 받을 일인가? 내가 뭘 대단한 걸 한 것 같진 않은데'

날마다 올리는 글에 조용히 하트만 눌러주던 사람들. 간혹 달리는 댓글. ‘내 글에 관심이 있긴 한 걸까? 좋으면 좋다고 말해주고, 위로받았다면 위로받았다고 말해주면 좋겠는데. 그게 나에게는 리뷰고 피드백인데 왜 사람들의 반응이 없지?’ 쓸 때마다 했던 고민이었다. 나 좋자고 쓰는 글이었지만 누군가를 보듬고 안아주고 싶은 글이었다.

그렇게 아무런 말없이 하트만 눌러주던, 그리고 하트조차도 누르지 않던 사람들이 댓글을 달고 하트를 눌러주기 시작했다.

그들은 말없이 늘어가는 내 피드에서 나의 도전과 열정을 봤던 것 같다. 그러니까 그들은 묵묵히 나를 응원하고 내 꿈을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마치 골을 넣기 전 숨을 죽이고 선수를 쳐다보는 응원석의 사람들처럼. 그리고 그 골이 들어갔을 때 터지는 환호성. 나는 분명 환호성을 들었다.

나는 가끔 누군가 꿈을 이룰 때 사람들은 응원해주지만 한편으로는 꿈을 이루면 어쩌나 하며 질투하거나 시기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저 꿈이었던 것을 현실에서 이뤘으니까. 꿈을 이룬 사람이 별로 없으니까. 꿈은 이루기 어려운 것이니까. 그래서 꿈이니까.

그런데 나의 사람들은 모두가 하나가 되어 나를 축하해줬다. 누군가는 너의 열정과 노력이 헛되지 않아 자랑스럽다고 했고, 누군가는 지금 자기 어깨춤추는 게 보이냐 했고, 누군가는 너는 될 줄 알았다고 했다.

타인의 꿈을 함께 기뻐해 주는 그 사랑스러운 사람들이 내 곁에 있다. 나는 어떤 복을 타고났길래 이리도 좋은 사람들만 곁에 가득한 것일까.

나를 행복하게, 내 인생을 달콤하게 해주는 사람들. 이 달콤한 사람들은 내가 해외여행을 가면 더 많은 사진을 올려달라고 한다. 나를 통해 대리 만족하게. 나 같으면 조금의 부러움과 질투가 있을 텐데 이 사람들은 전혀 그런 것이 없다. 왜 이 사람들은 내 행복을 함께 기뻐할까 생각해 본 적이 있었는데 모두가 다 건강하기 때문이라고 결론지었다.

말하지 못할 아픔과 드러내지 못할 속내는 모두가 있겠지만 자신의 삶에 모두가 만족하고 있어서 타인의 행복에 전혀 배 아프지가 않은 것이다. 자신의 행복은 무엇인지 정확히 아는 사람들이다. 자신만의 행복을 가진 사람은 타인의 행복을 존중할 수 있는 사람이다. 타인의 행복을 축하해주는 건강한 사람들이 내 곁을 지키고 나를 응원해준다는 것이 나를 살게 한다.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게 한다. 그리고 나를 응원한 그들을 위해서라도 조금은 영향력이 있는 사람이 되고 싶게 한다. 거창한 척하는 것인지 몰라도 나를 통해 그들의 꿈을 이루고 싶다. 이 응원에는 그들이 이루지 못한 소원까지도 있을 테니까.

한동안은 에세이를 인스타그램에 올렸다. 그런데 인스타그램의 특성상 이미지가 주된 SNS라 사진이나 짧은 글을 잘 어울리지만 긴 글은 어울리지 않는다는 느낌을 받았다. 가독성도 떨어지고. 그렇다고 블로그를 하기엔 뭘 꾸미는 걸 귀찮아하는 성향이라 제한된 글자 수를 다 채우면 밑에 댓글을 더 달아서라도 썼다. 이젠 그곳에는 짧은 글들만 올릴 예정이다. 긴 글을 쓸 수 있는 내 집이 생겼으니까. 물론 함께 생각하고 이야기하고 싶은 내용은 또 올리겠지만.

달콤한 사람들이 브런치를 깔아 여기까지는 오지 않는다. 피드를 슥슥 훑으며 그냥 떡하니 있는 내 글을 읽을 여유는 있지만 브런치를 깔아서 이곳까지 오진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어플을 설치하거나 삭제한 어플을 나 때문에 다시 설치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 말은 그들을 나무라는 것이 아니라 아주 좋은 기회라는 걸 뜻한다.

원래 사랑고백을 많은 사람들 앞에서 하는 건 심장에서부터 얼굴까지 달아오르는 부끄러움이니까.


“내 달콤한 사람들아, 고맙습니다. 당신의 응원으로 내가 이 곳에 올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쓸 수 있었습니다. 내 글은 나 스스로 쓴 것이 아니라 여러분이 쓰게 했습니다. 나를 위로하고 싶었고 여러분을 위로하고 싶었습니다. 나는 여러분의 힘을 빌려 썼습니다. 이루지 못한 꿈이 있다면 나에게 더욱 실어주길 바랍니다. 당신의 꿈의 조각을 내게 덧대길 바랍니다. 그러면 내가 꿈을 이뤘을 때, 그때의 꿈은 오직 나만의 것이 아니라 우리의 것이니까요.”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