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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런 너를 벗겼더니

벗으면 생각보다 괜찮아

by 주명



20년이 훌쩍 넘은 너를 3일 전에 벗겼다. 초등학생이었던 내 얼굴처럼 새하얗던 너는 어느새 세월의 손 때를 타 내 얼굴빛을 닮아 누렇게 됐다. 매일 갈아입을 속옷도, 철마다 세탁소에 맡겨야 할 옷도 아니니 때와 얼룩이 덜 지워져도 내겐 크게 상관없었다.

피아노 커버를 벗겼다.

애초부터 피아노에 커버가 왜 필요한지 모르겠다. 피아노 위로 내려앉을 먼지를 커버에 앉히려는 건지 색이 진한 큰 악기에 화사함을 더하고 싶은 건지 그것도 아니면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방에나 있을 법한 레이스 커튼을 끼얹고 싶은 건지.

그 어떤 의미도 모르겠는 껍데기를 버렸다. 피아노 위에는 책이 즐비하게 서있었다. 세로로 세워놓은 건 물론이고 가로로도 쌓기 시작하면서 피아노는 악기가 아니라 지저분한 책장이 되었다. 나는 피아노를 버리고 책장을 사자 했고, 엄마는 책장을 사서 피아노 위에 올리자 했다. 그 가느다란 다리로 책장까지 떠받치라고 하는 건 양심상 미안했다.

그래서 피아노 위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최근 미니멀리스트의 삶을 살기 위해 아무런 거리낌 없이 물건을 버리기 시작한, 물건 버리기를 아까워하는 엄마와 나는 책과 앨범 밑에 깔린 커버를 낑낑대며 벗겼다.

누가 부여한 건지 모르겠으나 꼭 붙어있어야 할 의무감을 지니고 있던 커버를 벗기고 나니 훨씬 깔끔했다. 그걸 20년 동안 씌워뒀다. 우리 둘은 흰 가발을 벗은 갈색 피아노를 보며 왜 진작 벗기지 않았을까 하며 미소를 지었다. 자리를 차지하던 피아노는 이제 제법 멋스러운 가구가 됐다.

우리는 피아노 커버를 쓰고 산다. 떼어버려도 되는데 없어도 별 지장 없는데 누가 만든 건지 모르겠는 원칙과 기준에 맞춰 적당히 눈치 보고 체면치레하며 산다. 나를 반쯤 숨겨두며 껍데기를 쓰고 산다. 그냥 나 자체로 아름다운 소리를 낼 피아노인데.

떼어내면 큰 일 날 것 같지만 어쩌면 아무런 일도 안 일어날 수 있다. 그리고 벗어버리면 시원할 지도, 멋질지도 생각보다 괜찮을지도 모른다. 세상에 맞춰 사느라 찌든 누런 껍데기를 벗으면 새하얗고 조각 같은 얼굴은 아닐지라도 가장 나다운 얼굴이 드러난다.

벗을 것인가 말 것인가는 용기가 필요한 선택이다. 여전히 나도 껍데기를 반쯤 쓰고 있지만 반은 벗었다.

벗었더니 시원하더라. 왜 안 벗고 살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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