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헛헛하고 듬성듬성한 시간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아

by 주명



늦잠 자고 밍기적대는 날. 가만히 누워서 스마트폰만 보는 날. 부엌 서랍 속에 있는 과자를 꺼내 소파에 질펀하게 늘어져 먹는 날. 거실 바닥에 대자로 누워 지나가는 구름을 쳐다보는 날. 열 발가락에 코랄색 매니큐어를 바르고 발을 휘적휘적하는 날. 뜨거운 태양에 맞서기라도 하는 듯 페달을 밟으며 자전거를 타는 날. 친구와 카페에서 만나 카페인을 동력 삼아 수다 떠는 날. 꾀죄죄한 강아지를 목욕시키는 날. 버스에 앉아서 가만히 창 밖의 풍경을 보며 노래를 듣는 날. 도서관에 가서 많은 사람 틈 사이에서 조용히 의자를 끌어 자리를 잡고 앉아 책장을 넘기며 종이 냄새를 맡는 날. 아이스크림 하나를 사 먹고 동네를 한 바퀴 걷는 날. 좋아하는 화가의 전시회를 보기 위해 줄을 서서 기다리는 날. 대충 끼니를 때우고 맛있는 과일을 먹는 날. 사진이 예쁘게 나오는 화장실에서 셀카를 찍는 날. 귀찮음을 이기고 겨우겨우 빨래 너는 날. 더우면 창문을 열고 추우면 창문을 닫는 날. 샤워 후 발 뒤꿈치에 바디로션을 바르는 날. 나도 모르게 스르르 잠드는 날.

분명히 하고 있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은 날이 있다. 역량과 수치 그래프가 올라가지 않아도 되는, 세상이 꼭 해야 한다고 다그쳐서 힘주고 살았던 하루하루들을 보냈으니 힘 빼고 살아도 되는 그런 날.

마음을 느리게, 발걸음을 천천히 해도 되는 날.

너무 빠른 날들 사이에서 그런 날을 걸으면 나는 한결 부드러워진다.

매일 꽉 채워진 시간을 보내지 않아도 된다. 설렁설렁 보내는 날들에 초조해하지 않아도 된다. 내가 진짜 힘을 얻을 수 있는 시간은 과열된 열정의 시간이 아니라 헛헛하고 듬성듬성한 시간이다.

그리고 이 비어있는 시간을 사랑할 수 있어야 채울 수 있는 용기와 힘이 생긴다. 내 마음은 언제나 조금 힘 빠진 시간으로 든든하게 채워진다.

그렇게 부풀려진 마음으로 사는 게 난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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