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소하다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빈 펄롱뿐이다. 그러나 그가 행한 사랑은 보잘것없이 작지 않다. 거대하고 위대하다. 사랑을 받아 본 사람만이 사랑을 베푼다 생각하지는 않지만, 어떤 사랑의 형태는 독특해서 그 사랑을 받아본 사람만이 비슷한 사랑을 베푼다.
세상은 자꾸 편을 나눠 이권 다툼을 하지만, 그게 결국 다 밥그릇 싸움이고, 뒤돌면 서로가 다 같은 배를 타고 있을 뿐이다. 엘리트가 가꿔가는 세상엔 사랑은 없다. 그들에게 사랑은 껍데기며 수단일 뿐이지. 그들이 진정한 사랑으로 세상을 바꾼다 생각하나? 세상이 어지러울 때 결국 이름 알려지지 않은 작은 시민들의 용기와 태도가 세상을 바꾼다 생각한다.
나는 사람의 절망과 아픔을 이해할 순 있어도 실질적으로 용기를 가지고 행하지 못한다. 대의적 사랑은 하지 못한다. 펄롱은 사소하다고 여길 수 있는 그 작은 사랑을 미시즈 윌슨의 여사와 네드를 통해 켜켜이 삶에 쌓아갔다. 가난과 미혼모의 자녀로 살아갈 수도 있었던 여린 삶은 이들을 통해 성장한다. 곁에 아이를 측은히 여기는 마음, 그러나 불쌍하다 여기며 동정으로 끝내지 않고 그 삶을 품어내는 사람들이 있었기에 펄롱도 석탄광에서 세라를 꺼내올 수 있었다.
세라를 꺼내온다는 건 마을의 암묵적인 규율을 깨는 일이다. 고요하게도 숨겨져 있는 진실을 꺼내면 손과 얼굴이 까맣게 되어 모두가 알아버린다. 그럼에도 용기를 내고 사람을 구하는 위대한 일을 해내고야 만다. 사소하다 치부될 수 있는 모든 것이 펄롱을 구원했고, 펄롱은 또다시 가엾은 소녀를 구원한다. 해내는 일처럼 보이지만 어쩌면 펄롱에겐 당연한 삶의 수순일지도 모른다. 사소함이 쌓여 누구도 하지 못할 일을 하게 한다.
결코, 진정한 사랑을 해낼 수 있는 순간이 내게 오긴 할까. 모두가 외면하는 순간에 감히 석탄광에 뛰어들 수 있을까. 그러나 어렴풋하게 기대해 본다면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은 나라면 신이 허락한 순간에 무언가를 할 수도 있지 않을까. 무한의 사랑을 받아본 나라면. 세상이 줄 수 없는 영광의 사랑을 안다면.
이처럼 사소한 것들이라 치부해 버리기엔
삶의 모든 걸 걸고 해내는 위대한 사랑이 있다.
세상엔 이름 없이 사라지는 작은 사람은 있겠지만,
그가 작은 사랑을 했을 거라고 확신할 수 있는가.
영화의 잊히지 않는 마지막 장면의 소설 원문은 가끔 내 마음을 두드린다.
“두 사람은 계속 걸었고, 펄롱이 알거나 모르는 사람들을 더 마주쳤다. 문득 서로 돕지 않는다면 삶에 무슨 의미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나날을, 수십 년을, 평생을 단 한 번도 세상에 맞설 용기를 내보지 않고도 스스로를 기독교인이라고 부르고 거울 앞에서 자기 모습을 마주할 수 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