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 모임에서 경기도 광명에 있는 기형도 문학관을 탐방하였다. 문학관 밖 벽면에 머리숱 짙은 젊은이의 모습과 ‘엄마 걱정’, ‘빈집’ 시가 먼저 눈에 들어온다. 40여 년 전 친구를 만난 것 같은 낯익은 얼굴과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첫 구절은 친근한 느낌으로 다가왔다. 아마도 시인과 내가 같은 세대이기 때문일 것 같다.
문학관 1층 전시실에는 1960년 출생, 유년 시절부터 1989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삶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게 되어 있다. 시인의 유년 시절 학교 성적표, 각종 상장 등 추억 물건이 있었다. 또박또박 꼼꼼히 정리한 노트, 다양한 예능 활동에서 시인의 성격과 재능을 짐작할 수 있었다. 아버지가 뇌졸중으로 쓰러져 가정 형편이 어렵게 되고 중3 때 바로 위 누나가 불의의 사고로 목숨을 잃었다. 이 무렵부터 시를 쓰기 시작했다고 한다. 1979년 연세대 입학하고 교내신문‘연세춘추’ 문학상에 소설‘영하의 바람’. 시‘식목제“ 등 입선하였다. 1984년 중앙일보사에 입사하고 198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 안개‘가 당선되었다. 짧은 생애만큼 전시물은 간소하지만 나에게는 친숙하였다.
‘위험한 가계家系 1969’에서는 시인이 초등학교 때인 1969년 늦봄 “유리병 속에 알약이 쏟아지듯 힘없이 쓰러진 “ 아버지에 대한 기억, 그 이후 집안 생계를 책임진 엄마의 고달픔, 선생님의 가정 방문을 피하고 싶은 마음, 상처를 진솔하게 표현하고 있다. 안갯속에서 방황하고 두려움을 견뎌야 했을 것이다. ‘안개’로 자욱했던 유년 시절을 지나 ‘대학 시절'에 이르러 문학에 몰입하게 되었다.’ 나는 플라톤을 읽었다. 그때마다 총성이 울렸다. 목련 철이 오면 친구들은 감옥과 군대로 흩어졌고 시를 쓰던 후배는 자신이 기관원이라고 털어놓았다 ‘ 그 시절 학교 분위기와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
나도 잠시 유년 시절과 학창 시절로 되돌아가보았다. 나는 부산 영도에서 자랐다. 집 근처에는 해안가에는 소형 선박들이 늘 몇 겹으로 정박해 있고 도로 한쪽에는 검은 판자 가건물 임검소가 있었다. 해상에서 인명사고나 변사체가 발견되면 이곳으로 옮겨와 사체 검안후에는 임시 흰 천막이 설치되어 장례까지 치르는 장면을 볼 수 있었다. 그 옆으로는 보세창고가 있었다. 하역 꾼들이 배에서 창고까지 짐을 어깨에 메어 옮겼다. 선원들의 거친 말과 하역 꾼들의 노동가가 늘 울리고 있었다. 안개 대신 늘 거친 해풍이 가뜩한 곳이었다. 그 시절 두 친구가 떠올랐다.
시인을 닮은 K는 초등학교, 중학교 동창이며 늘 함께 붙어 다닌 친구다. 리더십도 있어 늘 반장을 했고 노래, 운동 등 재능도 탁월했다. 대학은 연세대 경영학과로 진학했었다. 몇 년 직장 생활 후 1995년에 인터넷 벤처 사업을 시작하고 투자를 받아 주식 상장까지 했었다. 나는 직장에서 밑바닥을 헤매고 있을 때, 이 친구는 CEO가 되었다. 중간에 연락이 뜸하였다. 처음에는 사업이 바쁜 것으로 생각했다. 오랜만에 연락을 준 친구는 회사의 큰 계약이 문제가 되어 갑자기 어려워졌다고 했다. 수습하고 재기를 위해 백방으로 힘을 다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어느 날부터는 전화를 받지 않는다. 수신 차단 메시지가 나오고 나중에는 번호 없음 메시지다, K는 거친 파도 속에서 헤어나질 못한 것 같았다.
C는 야학 봉사 동아리 멤버다. 여학생으로 늘씬한 키에 차분한 성격으로 수수하고 친절했다. 며칠 전까지 동아리 활동을 같이 했는데, 석간신문에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 관련자 명단에서 낯익은 이름이 있었다. 미문화원에서 공부하던 또래 학생이 화재로 사망하고 반미 이슈의 대형 시국사건이었다. C가 가담한 것이 믿기지 않아 주변 친구들을 통해 확인했으나 자세한 내막은 알 수 없었다. 그 후에도 교내에서 대자보 게시하거나 시위하다가 붙잡혀 가는 친구들의 모습은 수시로 볼 수 있었다. 나는 3학년 때 동아리 활동도 접고 입대하면서 점차 잊었다. 벌써 40여 년이 흘렀다. 그 친구들은 지금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시인 기형도의 집에서 풋풋했던 그 시절 친구를 잠시 떠올렸다. 재능과 열정이 있었지만 안타깝게 고난의 한순간 안개 속으로 사라졌다. 잠시라고 생각했으나 완전히 연락이 끊어졌다. 위로의 말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다. 지금 나는 글로 제대로 표현할 수 없다. "사랑은 잃고 나는 쓰네" 가 오랫동안 마음속에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