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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준봉 Jul 10. 2021

고생 끝에 낙이 온다

길고 어두운 터널을 지나가면

     최근 약 한 달간, 정말이지 피아노 치기가 너무 싫었습니다. 아니, 그보다는 지겨웠다는 표현이 더 맞을 것 같군요. 전적으로 자발적으로 피아노 앞에 앉았습니다만, 연습을 하면 할수록 지쳐갔습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난이도가 상당한 곡을 연주하려고 하니까 그런 것이었습니다. 저는 작년부터 몇 곡을 선택해서 연습하고 있습니다. 하나같이 어려운 곡들입니다. 당연히 손에 익는 데에는 적지 않은 시간이 들겠죠.


     예전에 한 번 언급한 적이 있습니다만, 저는 인생이 다하기 전까지 반드시 쳐보고 싶은 곡들을 계속 연습하는 중입니다. 그중에는 일단 쇼팽 발라드 4번이 있습니다. 이 곡은 무진장 어렵기도 하면서, 또 길이는 얼마나 긴지 모릅니다. 곡을 감상할 때는 ‘긺’이 행복했지만, 곡을 막상 연습하려니까 ‘긺’은 불행 그 자체입니다. 한편, 쇼팽 소나타 3번 4악장도 자주 연습합니다. 다행히 악보는 다 보았는데, 속도를 붙여서 연습은 언제 할지 미지수입니다. 리스트 초절기교 연습곡 10번과 쇼팽에튀드 25-11인 겨울바람 연습곡도 위시리스트(Wish list)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런 곡들은 악보를 보는 데에만 한두 달이 걸립니다. 특히나, 하루에 평균 30분만 연습하는 제게는 더더욱 진도가 느릴 수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피아노를 취미로 치고 있으며, 음악을 좋아하고 즐긴다고 할지라도, 연습은 연습인가 봅니다. 똑같은 구간을 열 번, 스무 번 치고 있으면 그 순간만큼은 지루하기가 짝이 없습니다. 마치 예전에 피아노를 전공하려고 했을 때, 피아노 대회를 준비했을 때가 생각납니다. 피아노 연습은 한 부분이 제대로 마무리되지 않으면, 나중에 계속 틀리게 됩니다. 확실하게 짚고 익혀서 넘어가야 합니다. 발목을 잡는 부분이 해결되지 않으면, 더 이상의 발전은 없기 때문입니다.


     연습해야 하는 구간이 고도의 기교와 테크닉을 요구할 때에는 그야말로 절망적인 기분입니다. 어느 마디는 손가락 번호 외우기조차 쉽지가 않습니다. 손가락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는 부분도 있습니다. 이 모든 게 종합 세트로 들어 있는 연습곡을 만난다면…… 그야말로 피아노 칠 맛이 사라집니다. 오기로 버티거나, 다른 곡을 연습하든지 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요즘은 계속 어거지로 연습하고 있는데요. 피아노 뚜껑을 닫을 때마다 ‘내가 왜 이 고생을 하고 있나’하는 생각도 듭니다.


     물론, 이토록 지쳐가면서까지 연습을 하는 까닭은 분명합니다. 소위 ‘멋지고 화려하며 대단해 보이는 곡’을 치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비전공자가 이런 곡을 연주할 수 있다면, 상당한 매력과 강점으로 작용할 것도 자명합니다. 그뿐 아니라, 위의 제시한 곡들은 한때 피아니스트가 되려고 했을 때, 꿈에 생기를 불어넣어 준 추억의 플레이리스트이기도 합니다. 어쩌면 인생곡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요. 그만큼 연습하는 데에 시간이 얼마나 걸리던 꼭 한 번쯤은 연주해보고픈 곡들입니다.



     그러던 차에, 오늘도 어김없이 반복해서 똑같은 구간 연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오른손, 왼손 각각 따로 연습을 약 일주일 정도 한 다음에, 양손을 연습하는 날이었습니다. 쇼팽 발라드 4번의 맨 끝부분이었지요. 본 곡을 쳐보거나 들어보신 분들은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코다(Coda)라고 하는 마지막 부분은 무척 화려하고 빠르게 연주해야 합니다. 한동안 여기를 연습하기를 피한 상태였지만, 이번에는 직면하기로 한 것이죠. 그렇게 한 손씩 따로 연습하다가, 양손으로 쳐보았습니다. 비록 느리게 치기는 하였으나, 생각보다 자연스럽게 맞춰볼 수 있어서 기분이 참 좋았습니다. 무엇보다도 ‘마(魔)의 구간’을 제 손으로 치고 있다는 사실이 감격스러웠지요.


     바야흐로 학기가 끝나고 여름방학을 보내는 중입니다. 방학임에도 불구하고, 저는 그렇게 기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절망적인 순간이 더 많았습니다. 이제 다음 달이면 학부 졸업을 하게 됩니다. 다음 주에는 대학원 입시 면접과 시험을 볼 예정입니다. 그렇습니다. 대학원에 진학하고자 합니다. 대학원생의 본분으로는 공부와 동시에 ‘연구’가 있습니다. 이는 지식을 습득하는 것을 넘어서 새로운 지식을 창출함을 의미합니다. 그렇기에 대학원생에게 ‘영어’란 필수적으로 정복해야 할 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모든 지식과 정보는 영어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방학 중에는 앞으로 제가 전공하려는 분야의 영어 원서와 논문을 읽으려고 했습니다. 야심차게 계획을 세우고 책과 논문을 펼쳤습니다. 그런데 웬걸, 몇 페이지 읽지도 않았는데 뇌에 과부하가 오는 것이었습니다. 모르는 단어는 왜 그리 많은 건지… 처음에는 단어를 모조리 찾고 외우면서 읽었습니다. 그랬더니 진도가 나가질 않았습니다. 단어는 나중에 찾아보기로 하고, 쭉쭉 읽어나가는 데에 방점을 두었습니다. 이번에는 의미가 잘 이해가 안 되더군요. 이도 저도 손을 쓰기가 어려워지자, 한숨이 절로 나왔습니다. ‘나는 대학원에 갈 자격이 있는가?’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몇 날 며칠을 보냈습니다. 굼벵이처럼 느리지만 조금씩 텍스트를 읽고 독해하는 와중에, 오늘은 어떤 리뷰 논문[1]을 읽었습니다. 마침 읽은 부분이 쉬운 문장으로 되어있는 건지, 아니면 아주 조금은 익숙하게 된 건지 모르겠으나, 술술 읽을 수가 있었습니다. 논문을 통해 얻고자 하는 정보도 충분히 습득했습니다. 논문을 읽으면서, 컴퓨터로 출처를 확인해가면서 읽었는데, 생각보다 흥미진진했습니다. 다양한 학자와 대학, 연구소, 자료들을 찾았습니다. 훗날, 진학하고 싶은 대학원도 발견했습니다.


     “고생 끝에 낙이 온다”라는 격언이 있습니다. 피아노를 연습하면서, 그리고 대학원 진학을 준비하면서 이 말이 담고 있는 지혜를 흠뻑 느낄 수 있었습니다. 비록 현재는 앞이 보이지 않지만, 길고 긴 어두운 터널을 지나는 듯하지만, 그 길을 걸어가야만 합니다. 발걸음을 멈추지 않는다면, 언젠가는 터널 밖에 도달하게 될 테니까요. 발걸음의 방향은 얼마든지 바꾸어도 괜찮습니다. 모든 학생이 수능 점수를 잘 받아야 성공하는 건 아니니까요.


     그러나 한 가지만은 확실합니다. 우리가 무슨 일을 하더라도 ‘하기 싫을 때’는 올 것입니다. 깊은 어둠 속에서도 멈추지 않고 걸어가는 사람만이 결국 빛을 보게 되겠지요.


<주>


[1] 어떠한 연구 분야의 전체적인 지형도를 보여주는 논문. 주로 해당 분야에서 활발한 업적을 남긴 연구자가 집필한다. 그 연구 분야의 과거와 현재를 간략하게 요약해서 보여주기에, 특정 연구 분야에 입문하려는 학생이나 연구자가 자주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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