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선을 다하지 않음’에 대한 단상
현재는 기말고사 주간이다. 정확히 말하면, 기말고사 대체 과제를 준비하는 주간이라고 해야겠다. 학부 고학년 때부터 시험의 형식이 단기간 내에 뭔가를 외워서 써 내려가는 방식이 아니라, 주어진 기간 내에 완성된 학술적인 글을 요구하는 방식으로 바뀌었다. 특히 코로나19의 영향도 컸다. 더 이상 감시의 눈초리에서 시험 기간이 지나면 금방 휘발되어버릴 지식을 외우지 않아도 괜찮다. 이건 어쩌면 코로나바이러스가 학생들에게 선사한 축복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에는 한 가지 전제 조건이 있다. 학생이 그만큼 충분히 공부하고 준비했는가.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이러한 형식의 시험도 그다지 의미는 없다. 뭔가를 정말 알고 싶어서 연구하며 글을 쓰는 것과 단지 써야만 하기에 글을 쓰는 것은 천지 차이다. 나는 지금 이 순간만큼은 후자에 속한다. 현재는 수요일 밤, 이번 주 금요일 오후까지 10장이 넘는 텀 페이퍼를 제출해야 한다.
소논문을 준비하기 시작한 시간이 너무 늦어버렸다. 나는 어제부터 자료 조사를 시작했기 때문이다. 오늘은 예기치 않은 보강이 잡혔고, 내일은 두 개의 실시간 세미나에 참여할 예정이다. 물론, 두 가지 모두 선택사항이기는 한데, 꼭 만나고 싶은 선생님들을 뵙는 시간이라서 일정은 그대로 강행할 것이다. 자, 그럼 남는 시간이 어떠한가. 금요일은 학교에 직접 제출하러 가야 할 터이니 왕복 6시간이 소진된다. 그럼 그날은 없는 거다.
실질적으로 페이퍼를 써야 할 시간은 이틀 남짓이다. 물론, 이 시간에 주구장창 써대면 분량은 채울 수 있다. 하지만 이토록 한정된 기간에 방대한 분량의 글을 작성한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된다. 억지로 내용을 채우다 보면, 글의 퀄리티는 한없이 낮아질 것이다. 나는 이러한 상황 자체가 불편하다. 나 자신이 초래한 일이기는 한데, 그렇다고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 하여도, 열심히 썼을 것 같지는 않다. 참 역설적인 상황이다.
제출 마감 기한을 아예 넘겨버리면서까지 질 좋은 글을 쓰고 싶은 마음도 없다. 솔직한 심정은 적당하게 분량 채우고, 적당히 좋은 점수를 받아서 끝내고 싶을 뿐이다. 즉, 글쓰기의 목적이 ‘무언가 새로운 것을 공부하고 연구하여 나의 언어로 재조명·재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점수 잘 받기 위함’이다. 이게 현재 여과 없이 표현한 내 마음이다.
어쩌면 현재 이 브런치 글을 쓰는 나의 행동과는 정반대의 상황이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겠다. 나는 지금 이 글을 ‘정말 쓰고 싶어서’ 쓴다. 따라서 독자 여러분이 읽고 있는 이 글은 ‘글쓰기 그 자체에 목적이 있는 글’이다. 칸트식으로 말하자면 정언명령을 충족한 글쓰기 행위라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내가 기말 과제로 쓰는 글은 ‘글쓰기 자체에 목적이 있지 않은 글’이다. 그건 학점을 위한 글, 담당 교수에게 보여주고 점수를 얻기 위한 글일 뿐이다. 이때 글쓰기는 무언가를 얻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므로, 가언명령의 성격을 갖는다.
“네 의지의 준칙(격률)이 언제나 동시에 보편적 입법의 원리가 될 수 있도록 행위하라”[1] - 이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1724~1804), 제1 정언명령 ‘보편의 원칙(The Formula of Universal Law)’
물론, 내가 기말 페이퍼를 이렇게 쓰고 있다고 해서, 이번 학기의 학업을 말아먹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정확하게 이야기하면 그 반대가 더 가깝지 않을까 싶다. 주어진 코스웍 이외에도 여러 가지를 잡다하게 건드려보면서, 상당한 배움을 얻었기 때문이다. 학교에서 제시하는 커리큘럼, 누가 떠먹여 주는 것만을 받아먹지는 않았다는 말이다. 나름 새로운 것들을 시도하고 도전하였고, 거기에서 얻은 성취감과 깊은 배움도 있었다.
따라서 현재 내가 봉착한 문제는 ‘모든 것을 완벽하게 할 수는 없다’라는 명제라고 할 수 있다. 솔직한 마음으로는, 이 기말 페이퍼도 내가 쓸 수 있는 한, 최대로 잘 써보고 싶다. 기왕 집필하는 건데, 좋은 글이 탄생한다면 나야 좋지 않겠는가? 중요한 건 그럴 만한 시간이 남지 않았다는 것이다. 학부생의 나처럼 학점 따위에 신경을 쓰지 않고 살 수도 없는 처지이다. 이게 딜레마이다.
지금까지 글을 쓰면서 여러 감정을 느껴보았다. 가장 많이 느낀 점은 ‘잘 쓰고 싶은데 왜 이렇게 잘 못쓰지?’였다. 물론, 지금도 이 마음은 외국어 글쓰기를 할 때, 뼈저리게 느끼는 감정이다. 자, 그렇다면 한국어 쓰기에 한정해서 생각해보자. 전에는 ‘글을 잘 쓰고 싶다’ 혹은 ‘이걸 언제 다 쓸까?’라는 감정이 주로 느껴졌다.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마음이 답답했다. 하지만 이제는 약간의 자신감이 붙었는지, 조금 다른 류(類)의 생각이 든다. ‘충분히 잘 쓸 수 있는데도 왜 이렇게밖에 하지 못하지?’라고 말이다.
당연히, 가용 시간과 노력이 무한하다면, 이런 감정을 느끼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제한된 시간과 기회 속에서 일부를 선택할 수 있을 뿐이다. 모든 걸 완벽하게 해낼 수는 없다. 어쩌면 이와 같은 감정은 애초부터 오지랖이 넓은 나에겐 필연적인 감정이었을지도 모른다. 이토록 바쁜 순간 속에서도 이렇게 브런치 글을 쓰고 있는 이유는, 평소와는 다른 색다른 느낌이 들어서이다. 한편으로는 조금 성장한 것 같다는 뿌듯함이, 또 다른 한편으론 남겨진 글 언제 다 쓰나 하는 걱정이 교차한다.
그래, 단도직입적으로 말한다. 나는 현재 최선을 다하지 않고 있다. 기말 소논문을 쓰는데, 학술적인 가치는 생각하지 않고, 그냥 분량을 채우기 위해 쓰고 있다! 이게 무슨 시츄에이션이람? 그건 나도 잘 모르겠다. 그저 내 상태가 이렇다는 것이다. 뭐, 여기에는 다양한 의미를 부여해볼 수 있다. 잠시 쉬어가는 순간이라든지, 나사가 빠졌다든지, ‘놀고 있네’라든지, 그럴 수도 있다든지…… 등등.
세상에는 글이 무척 많다. 매일같이 쏟아지고 있다. 그중에서 대개의 자서전이나 자기계발서는 한결같이 이야기한다. “나처럼 최선을 다해라. 그럼 성공한다.”라는 식의 메시지를 말이다. 맨날 열심히 해라, 노력해라 이런 말을 듣는 것도 지겹지 않은가. 그건 나도 여러분도 모두 다 아는 사항 아닌가. 그럼 이렇게 글을 쓸 수도 있어야 한다.
“난 지금 억지로 글을 쓰고 있습니다. 그깟 점수를 잘 받기 위해 꾸역꾸역 타자기를 두드린다는 것입니다. 최선을 다해서 쓰지 않은 페이퍼를 제출할 예정입니다. 그리 올바른 선택은 아니겠지만요!”
- 주 -
[1]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국정도서편찬위원회, 《고등학교 윤리와 사상》, 지학사, 2003, 112-113, Wikipedia에서 재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