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친구 따라 강남 간다

染: 물들여지다

by 준비

친구 따라 강남 간다, 아니 친구 따라 자존감을 찾았다. 친구 사귐의 중요성은 동서고금을 막론한 진리다. 내가 절실하게 느꼈고, 그 친구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지금의 내가 존재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한다. 그래서 그 친구 이야기를 잠깐 해볼까 한다.


거의 30년 전으로 거슬러 가야겠다. 공무원인 아버지 덕에 평범한 중산층의 삶을 살았지만, 누구나 그렇듯 드라마틱한 가정사 하나쯤은 있지 않은가? 그 덕에 어렸을 때부터 돈을 아끼는 것에 굉장히 신경 썼다.

창피한 이야기지만 내가 알파벳을 뗀 게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하마가 영어로 "hama"가 아니라 "hippo"라는 사실을 깨달은 게 초등학교 5학년 여름이다. 시골 할머니 댁에서 친척 동생이 영어 단어를 읊조리다가 하마가 영어로 뭔지 물어봤다. 자신 없는 목소리로 "에이치 에이 엠 에이?"라고 말했더니 자지러지게 웃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

빨개진 얼굴과 엄청난 수치심을 느낀 나는 집으로 돌아가 어머니께 윤선생 영어를 해보고 싶다고 말했다. 어머니는 내심 안 했으면 하는 마음과 아들 교육에 돈을 아낄 수 없다는 마음이 교차하는 표정을 지으셨다. 결국 6개월간 영어를 공부하고 중학교 1학년에 진학했다.


처음 반 배정을 받을 때 반배치고사를 보게 되는데, 총 8개 학급에 한 반에 45명 정도의 학생이 있었다. 나는 26등으로 들어갔고, 우리 반 1등이자 전교 1등인 친구와 같은 반이 되었다. 전교 1등이라는 사실 하나만으로 친구들과 선생님의 많은 관심과 인기를 한 몸에 받고 있던 친구와 나 사이의 거리는 상당히 멀었다.

몇 개월씩 돌아가며 짝꿍이 바뀌었는데 마침 그 친구와 짝이 되던 때가 있었다. 아마 내 인생의 전환점이 바로 이때일 것이다.

그 친구는 수업 시간을 제외하고는 늘 친구들과 함께 복도에서 접은 우유갑을 발로 차며 축구를 했고, 점심시간에도 운동장에서 축구를 했다. 공부 잘하는 친구들 중에는 공부 못하는 친구를 내심 무시하는 경우도 있지만, 이 친구는 그런 장벽이 없었다.

영어 시간이었다. 당시 콩글리쉬 발음의 문법 위주의 수업을 하는 선생님들이 대부분이었는데, 우리 담당 선생님은 혀에 버터를 바른 발음으로 유명했다. 열심히 선생님 발음을 따라 해서인가, 어느 날 나를 일으켜 세워 본문을 읽게 했고, 내 발음을 듣고 극찬해 주셨다.


그 친구는 "야! 너 발음 엄청 좋다"라며 나를 인정해 주었다. 전교 1등 친구가 인정해 주다니, 나도 공부를 잘하고 싶다는 생각이 가슴 깊은 곳에서 끓어올랐다. 그렇게 우리는 베스트 프렌드가 되었다.

어느 날 내가 그 친구에게 "넌 왜 서울대 법대를 가고 싶어?"라고 물었다. 그 친구는 "공부를 하다 보니 잘했고, 잘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제일 높은 목표를 잡았던 것 같아"라고 답했다.

전교 1등과 많은 시간을 보내다 보니 내 성적도 급격히 올랐다. 그 친구는 시험 2주 전부터 공부 계획을 잡고, 주말에는 아침 8시에 방에 들어가서 10시쯤에 나왔다. 나도 무작정 똑같이 따라 했다.


내 친구 덕에 성적이 오른 것도 사실이지만, 내가 인생에서 이 친구를 알게 된 것을 큰 행운이라고 생각한 이유는 자존감 때문이다. 그 친구는 본인이 가진 능력을 자랑하지 않고, 자기만족에서 끝낸다.

내 친구는 서울대 법대를 들어가 사법고시를 패스하고, 과 동기와 결혼했다. 친구의 와이프는 김앤장에 들어갔고, 집도 와이프 부모님이 해주셨다. 하지만 친구는 변하지 않았다.

결혼식 이후로 몇 년이 지나도록 연락하지 못하다가 어느 날 친구로부터 전화가 왔다. "준비야! 나 지금 전주 법원에 왔다가 네 광고를 보고 있어. 용산역에서 얼굴이나 보자." 그 친구는 여전히 변함없는 모습이었다.


서로의 안부를 묻지도, 어떻게 사는지 잘 모르지만 친구로서의 존재 자체가 큰 힘이 되어주는 진정한 친구가 이런 게 아닐까 생각한다.

과거의 나는 열등감이 많았고, 남의 시선을 신경 쓰는 내향적인 사람이었다. 그런 내가 그 친구를 알게 되면서 삶의 태도를 배웠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대기업을 나와 비정규직으로 일하면서도 자존감을 잃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온전히 그 친구 덕이다.

우리 인생에서 어떤 친구를 두느냐에 따라 우리는 강하게 그 친구의 영향을 받는다. 좋은 친구를 곁에 두는 것이 인생에서 제일 중요한 과업 중 하나다. 그 친구가 나를 변화시킨 만큼, 나도 내 주변 사람들에게 긍정적이고 주체적인 삶의 태도를 물들여 가면서 서로에게 빛이 되는 관계로 나아가고자 한다. 오늘 하루를 더 열심히, 의미 있게 보낼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돈 앞에 양심을 버린 의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