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인 탈출기
입사한 지 1년도 되지 않는 신입이 그 자리에 왔다는 사실에 모두가 의아해했다. 그도 그럴 것이 내가 발령받은 자리에 티오가 났을 때, 꽤나 많은 직원들이 우리 팀장님께 오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는데, 다른 지역에서 완전 생짜 신입이 올 거라고는 아무도 예상을 하지 못했다고 한다. 아무래도 지원부서다 보니 소위 말하는 짬이 좀 있어야 이리저리 치이는 일이 안 생기는데 대전 사무실에 새파랗게 젊은 26세의 신입이 왔다고 하니 이래저래 말이 많았다. 그런 우려 때문인지 팀장님은 초반에 나한테 거는 기대가 굉장히 컸고, 빨리 업무를 배워서 에이스가 돼야 한다라고 강조하셨다.
그래서 내가 오자마자 팀장님은 단순 작업을 시키면서도 내가 어떻게 일을 하는지 유심히 지켜보고 계셨던 듯하고, 나도 모르는 사이에 진행된 테스트를 내가 완벽하게 통과하면서 매끄럽게 시작할 수 있었다. 어떤 공문을 10장 정도 복사해 오라고 시키셨는데, 그걸 받으신 후에 나를 포함한 팀원들을 데리고 옥상에 올라가 커피를 마시면서, 첫 질문을 던지셨다
"아까 너한테 시킨 그 공문 내용이 뭔지 알아?"
복사를 하면서 어떤 내용인지 궁금해서 읽어봤던 터라, 내용은 완벽히 이해하지 못했지만 이런저런 내용들이 담겨 있었다고 말씀을 드렸더니, 팀장님은 호탕하게 웃으시면서,
"야~됐네됐어. 통과! 기본은 됐네"
라고 팀원들에게 나에 대한 칭찬을 쏟아내셨다. 똑같은 일을 시켜도 시키는 것만 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시키지 않은 일을 찾아서 하고, 그 일을 왜 시켰을까를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걸 테스트하기 위해서 시키셨다고 하셨다. 평소에 궁금한 게 많은 나의 성격이 이럴 때 빛을 볼 줄이야. 그렇게 좋은 분위기로 시작을 함과 동시에 모든 팀원들이 정말 늦둥이 막내 대하듯 너무나 아껴주시는데 '이런 게 사랑받는 기분인가'라는 느낌이 들었다. 항상 지적받고, 부족한 사람으로 직영점 생활을 했는데 이곳에서는 신입 에이스로 탈바꿈되어 있었다. 미운 오리 새끼에서 사랑받는 백조가 된 기분이었다.
그리고 팀장님은 사무실에 있는 다른 부서 팀장님들께 나를 데리고 다니면서 인사시키고, 항상 '우리 팀 신입 에이스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를 잊지 않으셨다. 물론 팀장님과 이런 좋은 관계가 지속된 것은 아니고 갈등 관계로 치닫은 상황도 생겼지만 내가 팀장님을 미워하지 않았던 이유는 바로 처음에 이런 모습 때문이었을 수도 있다. 우리 팀 대리님들은 과장 진급을 앞둔 연차였기 때문에 사무실에 있는 대리급들 중에서도 고참 대리였고, 그러다 보니 든든한 방패막이 되어주었다. 혹시나 영업팀에서 절차를 무시하고 나에게 요청하면, 바로 그 직원에게 전화해서 뭐 하는 거냐고 혼내주는 등 태어나서 나를 이렇게까지 챙겨주는 무리에 있어본 적이 없어서인지 회사 다닐 맛이 났다.
그렇게 인정해 주는 만큼 더욱더 잘하고 싶어 지는 게 사람인지라, 최대한 빠르게 계약 관련 내용들을 숙지하고 프레젠테이션 하는 연습을 했다. 내가 하는 업무는 결국 편의점 창업을 알아보러 오는 예비 창업주들에게 계약 조건을 설명하고, 그들이 궁금해하는 것들에 대한 답변은 물론, 현재 회사에서 보유하고 있는 계약 가능한 점포에 대한 계약을 이끌어 내야 하기 때문에 단 하나의 실수도 용납되지 않는 업무였다. 아무래도 계약이라는 게 말 한마디 잘못하면 엄청난 후폭풍이 불어닥치기 때문에 이제 곧 인수인계를 마치고 떠날 대리님도 꼼꼼하고 냉철하게 가르쳐주셨고, 팀장님도 별도의 과제를 내주시면서 바로 현장에 투입할 수 있는 실력을 갖출 수 있기를 바라셨다. 역시 업무는 처음에 하드트레이닝을 받으며 확실하게 깨우쳐야 된다는 것을 다시금 느꼈다.
많은 기대를 받은 만큼 기대에 부응하고 싶어서일까. 단순 페이퍼 작업 및 수백 통의 우편 보내는 일 등 단순작업도 아주 전광석화 같은 속도로 마치며, 대리님들이 미뤄놨던 자질구레한 일들을 하나하나 마무리 지어가다 보니 매일이 칭찬받는 일의 연속이었다. 특히 내 인생의 은인이 된 이대리님은 매일 나를 볼 때마다 "우리 준비~ 우리 준비"를 반복하셨다. 밥을 먹을 때도 뭘 먹고 싶은지, 회식을 할 때도 뭘 먹고 싶은지, 어떻게 하면 저렇게 예뻐해 줄 수 있을까 좋으면서도 신기했고 동시에 얼떨떨했다.
어느 날은 일을 하다가 화장실을 다녀오고 싶어서, "대리님 저 화장실 좀 다녀오겠습니다"라고 했더니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한참을 쳐다보시다가 "그걸 왜 나한테 말해? 너 나랑 사귀냐? 갔다 와" 라며 너털웃음을 지으며 말하셨다. 옆에서 그걸 들은 다른 팀 선배도 "준비씨~뭘 화장실 가는 걸 말하고 가요" 라며 허허허 웃음을 지었다. 세브란스 점포에 있을 때에 늘 말을 하고 갔어야 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말을 한 건데 이곳에서는 굉장히 기이한 행동으로 보였나 보다. "직영점에서는 늘 말을 하고 갔어야 해서요"라고 말을 하니 대리님은 "하~그 짬밥도 안 되는 것들 이상한 똥군기 잡는 거 아직도 안 고쳤나 보네"라고 말하며 네가 고생이 많았겠다라고 위로해 주셨다. 나중에 회식자리에서 직영점에 있었던 일들을 말을 하니 대리님은 나를 측은하게 바라보면서
"준비야~네가 거기서 인정 못 받았다고 해서 네가 능력이 없는 게 아니야. 우리는 네가 에이스라고 생각해. 그러니까 그때 일들은 다 잊어버려 알겠어?"
순간 울컥하며 그동안의 설움이 씻은 듯 사라지는 기분이 들었다. 인정받는 기분. 팀원들이 나를 대하는 모습을 보며 내가 나중에 선배가 되면 후배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정립되어 갔다. 동기들은 지방 발령에 본인들이 뽑히지 않았다는 사실에 이곳에서 본인이 인정받고 있다는 자부심으로 자리 잡았는지 가끔 우스갯소리로 "너 튕겨나간 거잖아"라고 놀려댔다. 만약 대전 사무실에서 내 삶이 직영점 때의 모습과 같았다면 굉장히 불쾌하고 자존심 상해서 한 판 싸웠을지도 모를 발언이었지만, 대전 사무실에서의 내 회사 생활은 퍼펙트 그 자체였기 때문에 아무런 타격감이 없었다. 오히려 그런 거에 자부심을 느낀다는 것 자체에 살짝은 어리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렇게 좋은 환경 속에서 1년 뒤면 다시 광주 사무실로 가야 한다는 사실이 너무 싫기도 했지만, 최대한 이곳에서 기대에 부응하면서 뭔가를 보여주겠다는 각오들이 넘쳐났다. 이곳에 있는 동안 단 한 번의 야근도 없었다고 하면 얼마나 나를 아껴줬는지 설명이 될까. 역시 모든 일은 사람이 힘들지 일이 힘든 게 아니다는 말이 딱 맞다. 나를 아껴주는 사람들을 만나니 일은 힘든 것이 아니라 배워가는 즐거움이 되더라.
하지만, 이런 좋은 환경 속에서도 묘한 정치판의 장기짝이 되어 갈등을 겪게 되는 일이 생기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