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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령, 그리고 태움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by 준비 Mar 03.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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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개월이 좀 안 되는 기간 동안 동고동락 하면서 이제 좀 미운털이 빠지기 시작하나 했더니 갑작스럽게 발령이 났다. 통상 꼭 붙잡고 싶은 후배는 그 지역팀에 남게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는 로테이션을 하기 때문에 예상대로 내가 가게 되었다. 이 점포를 떠나기 전에 발주나 한 번 넣어보라고 해서 발주를 넣었는데 마지막까지 나는 사고를 치고야 말았다. 발령일을 한 일주일 남겨뒀을 때였나? 오후 출근이라 여유롭게 준비하며 나가려는데 선배에게 전화가 왔다.


"빵 발주 이거 준비씨가 넣은 거죠? 이거 어떻게 된거에요?하..일단 와서 얘기해요"


심장 박동수가 급격히 증가하기 시작했다. 도대체 무슨 일이지? 발주를 잘못 넣은 건가? 그냥 기존에 넣던 대로 넣었는데? 근데 매장에 도착하고 나니 전화했던 선배는 굉장히 환한 얼굴로 나를 맞이해 주며, 


"준비씨! 대박! 이거 예상하고 발주 넣은 거예요? 아니죠?"


평균적으로 2박스 조금 안되게 들어오는 빵이 7박스나 들어왔고, 그 거대한 물량을 보고 선배는 까무러칠 뻔했다고 한다. 도저히 매장에서 소화가 안 되는 물량이라 저걸 다 폐기하면 상부에는 뭐라고 보고해야 하나 등등 머리가 지끈거렸다고 한다. 그런데 정말 세상 일은 아무도 예측할 수 없다고 그랬던가? 그날 마침 인근 고등학교 사생대회가 열리는 날이었고 엄청난 수의 학생들이 매장 앞에 집결하게 되면서 그 많던 물량이 다 팔리고 매장에는 오히려 빵이 하나도 없는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천하의 역적에서 영웅이 되어버린 순간이랄까. 너스레 떨며 당연히 예상하고 넣은 거라고 할 여유는 없었고, 천만다행이라는 생각 밖에 들지 않았다.


그리고 마지막까지 에피소드로 장식을 하며 나는 새로운 점포인 세브란스 병원으로 향했다. 

신촌 세브란스 내에 입점되어 있는 편의점은 전국 모든 편의점 중 매출이 압도적으로 1등인 점포라, 나름대로 상징적인 의미가 있는 곳이다. 하루에 몇 천만 원의 매출이 발생하는 곳이니 사실상 편의점이 아닌 마트라고 볼 수 있을 수준이다. 그렇기 때문에 근무하는 직원들과 아르바이트생들도 많고 그 점포의 점장은 나름 인정받는 사람만 할 수 있다. 물론 인정받은 사람만 점장이 될 수 있다는 말은 그 매장의 점장의 입을 통해 들은 것이다. 첫 만남부터 자기 자랑을 은연중에 하는 모습들을 보고 이 사람과는 결이 맞지 않겠다를 직감했다.


170cm가 조금 넘는 왜소한 체격에 부리부리한 눈, 그리고 외모와 어울리지 않는 다정한 말투. 하지만 그 다정한 말투가 따뜻하게 느껴지지 않았던 것은 앞으로 내가 이 점포에서 겪을 험난한 일을 암시하는 듯했다. 이곳은 철저하게 상명하복의 수직적인 문화를 추구했고, 회사의 조직문화 방향과 전혀 반대로 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들이 매출 1등 점포라는 프라이드에 취해 그런 것들은 신경도 쓰지 않는 듯했다.


화장실에 갈 때에도 말을 하고 다녀와야 하고, 작은 실수에도 늘 한숨과 큰 소리로 직원을 혼내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었는데, 그 혼나는 직원은 예상했겠지만 나였다. 나는 그리 부드러운 성격은 아니나, 처음에는 내 본모습을 잘 보여주지 않고 친절하고, 내성적이고, 조용한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에 호구로 보는 사람들이 더러 있다. 게다가 사회 초년생이고 큰 회사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명확히 판단이 서지 않았기 때문에 더 눈에 띄지 않으려 조용히 있는 모습이 그 점장에게는 호구로 보였을 수도 있었겠다. 


그래서인지 나를 대할 때 목소리가 더 올라갔고, 시덥지도 않은 일들로 트집을 잡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가령, 점장 여자친구가 선물해 준 실리콘 제형의 스파이더맨 손목 보호대가 노트북 마우스 옆에 항상 자리하고 있었다. 어느 날 나에게 왜 청소를 제대로 안 하냐면서 스파이더맨에 쌓인 먼지를 보며 "여기는 청소 안 해요?" 라며 그 물컹거리는 걸 내 눈앞에서 흔들어대며 소리를 지르는 모습을 보며 "아, 얘가 나를 진짜 만만하게 보나보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소리를 지르고 난 후 몇 시간 뒤면 또 굉장히 다정한 말투로 힘들지 않냐고 묻는 모습을 보면 다중인격인가라는 생각이 들면서 더욱더 거리를 두게 만들었다.


다른 동기들은 그래도 점장한테 말도 걸고, 친해지려 나름대로의 노력은 했지만 나는 단 한 마디도 먼저 말을 거는 적이 없었기 때문에 우리 둘의 사이는 멀어져 갔다. 그래서일까? 야간 근무를 점장을 제외한 직원들이 돌아가면서 해야 하는데, 점장을 제외하고 5명이 있지만 내가 15일 이상을 하게 된 게 그의 소심한 복수였을지도? 그리고 야간 근무를 서고 나면 이틀간의 휴무가 붙는데, 이상하게 내가 야간 근무가 끝나는 날엔 휴무가 하루가 붙고, 심지어 휴무 다음날 아침 출근으로 되어 있다 보니 그냥 하루를 날릴 수밖에 없었다.


늘 야간 근무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퇴근길에 집 근처에 있는 방앗간에서 갓 나온 것처럼 따끈따끈한 가래떡을 사 먹었는데 어찌나 맛있던지 고된 하루의 소소한 보상 같았다. 물론, 야간 근무를 마치고 아침에 퇴근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왜냐하면 점장은 나에게 단 한 번도 퇴근하라고 했던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점장이 출근하는 8시 20분경 특이사항을 전달해 주고 9시가 되기 전 퇴근을 하면 되지만 점장은 늘 잠깐만 매장 좀 봐달라고 하고 백룸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전 퇴근시간이니 이만 가보겠습니다" 이 말 한마디를 한 번도 해보지 못한 나도 바보 같지만, 그 당시엔 점장이 퇴근하라고 하기 전까지 계속 추가 근무를 하면서 10시 30분이나 11시 정도에 집에 갈 수 있었다. 그 시각이 되면 점장은 백룸에서 나와서 "아!너무 미안해요!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네요. 고생했어요. 얼른 들어가 봐요" 라며 세상 착한 얼굴을 하며 걱정하듯 말해주었다. 이런 상황을 지켜보는 알바생들이 나를 가련하게 봤는지, 어느 날은 야간 근무를 같이 한 알바생이 점장에게 가서 "아니 형! 왜 준비형 집에 안 보내요. 집에 좀 보내요" 라고 하자 점장은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얼른 퇴근해 보라고 했다. 그날이 정시 퇴근한 유일한 하루였다. 그 날도 나는 가래떡을 질겅질겅 씹으며 그날의 기억을 지웠다. 


아무런 기대가 없으면 오히려 마음이 평온해진달까. 아니, 평온이라기보다 바짝 말라버린 나무처럼 감정이 말라버린다는 표현이 맞을 것 같다. 그 매장에서 근무하는 기간에 나의 감정상태는 늘 바짝 마른 나뭇가지 상태였던 것 같다. 무관심, 그리고 감정쓰레기통의 역할을 맡으면서 제대로 된 휴무를 보장받지 못하고 그저 야간 수당 덕에 동기들보다 월급은 많이 받았던 것 같다. 인생에 돈이 전부가 아니다라는 생각을 어렴풋이 했던 것도 그때였던 것 같다. 


몇 년 전에 한창 이슈였던 간호사들의 태움 문화가 보도되었을 때, 태움을 당하는 사람들의 심정이 어떤 건지 알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내가 그 태움을 당했던 사람이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나는 한 명한테만 당해서 그 정도가 심하지 않았을 수 있는데, 사람이 어떻게 피가 말라가는지는 공감할 수 있었다. 


그 일이 있은 후 15년이 좀 넘게 흘렀다. 오늘 그 선배의 부고 소식을 전해 들었다. 단톡방에서 그 소식을 들었을 때, 사실 아무런 감정도 들지 않았다. 나를 괴롭히던 사람이 죽었다니 다행이다라는 생각도, 그래도 사람이 죽어서 너무 슬프다는 감정도 아니었다. 그냥 아무런 감정이 들지 않았다. 슬퍼해야 할 이유도 없고, 잘됐다 좋아할 일도 아니니까. 굳이 그 사람을 미워하면서 어떻게 복수해야지라는 생각을 하며 살아온 게 아니기 때문에 그 사람은 어차피 내 인생에 아무런 의미도 없던 사람이었으니 이 감정이 맞을 듯하다. 다만, 굳이 세상을 떠난 사람에 대한 미움의 감정을 남길 필요는 없으니 오늘부로 나는 그 사람에 대해 남아있는 작은 미움의 흔적도 지우려고 한다. 


죽음이란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것이고, 나에게도 언제 찾아올지 모르는 피할 수 없는 것이다. 그렇기에 나의 삶은 부귀영화가 아닌 나의 가치와 재미를 추구하는 삶이어야 하고, 비워냄의 미학을 실현하려는 삶이어야 한다. 그렇게 인생은 허무하기도 하며 찬란하기도 하니까...


지독히도 나를 괴롭히고 미워했던 사람이지만, 인생의 절반을 남기고 세상을 떠난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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