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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한 끝은 없어도 후한 끝은 있다"

명절마다 새롭게 듣는 이야기 보따리

by 전준수

“남00 어머님 아니세요?”

길 건너편에서 80세가 넘은 할아버지 한 분이 큰 소리로 외치셨다.
목욕탕에서 나오시던 91세 장모님을 부르신 목소리였다.

두 분은 70년 넘게 만나지 못했다.
그런데도 한눈에 알아보셨다.


장모님은 타고난 이야기꾼이다.
옛날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하면 쉬지 않고 풀어내신다.
이번 추석에도 새로운 이야기를 들었다.

(10년 전, 중학생이던 딸과 함께 어머님의 자서전을 기록한 적이 있다. 나는 질문하고, 딸아이는 옆에서 타이핑을 했다. 2박 3일 동안 식사하고, 듣고, 기록하고, 또 듣고… 그렇게 써 내려간 이야기가 어느새 80페이지가 넘었다.)


초등학교 시절, 장모님은 박00 담임선생님이 서울로 책을 사러 가는 길에 소매치기를 당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선생님은 창피하고 난감했는지, 장모님에게 편지를 한 통 주며 “가는 길에 뜯어보면 안 된다. 꼭 아버님께 드리거라”라고 여러 번 당부하셨다고 한다.


하지만 초등학생의 호기심은 이길 수 없었다.
논두렁길에서 결국 그 편지를 뜯어봤다.

“저희가 책을 사러 가다가 소매치기를 당했습니다. 도와주실 수 있겠습니까.”

장모님의 아버님은 지역에서 존경받는 유지셨고, 그 돈을 선뜻 변상하셨다.


지난주에 장모님을 알아보신 그 82세 어르신은,
그 박 선생님의 아들이었다.

담임선생님은 평생 그 은혜를 아들에게 이야기해주셨고, 그 아들은 수십 년이 지나도 그 이름을, 그 마음을 기억하고 있었다. 70년 만의 재회 자리에서 그 어르신은 짧게 인사를 나눈 뒤, 조용히 지갑에서 20만 원을 꺼내드리며 말했다.

“아버지가 참 고마워하셨어요. 그 은혜를 잊지 말라 하셨습니다.”


“악한 끝은 없어도 후한 끝은 있다.”
이야기 끝에 장모님이 덧붙이신 말씀이 오래 남았다.

은혜를 기억하고,

그 마음을 대물림하는 사람들.
70년이 흘러도 사라지지 않는 따뜻한 연결.


오늘 하루,
나도 누군가에게 ‘후한 마음으로 남는 사람’ 이 되고 싶다.


� 비하인드 스토리
논두렁에서 편지를 뜯어본 어린 장모님은 다음날 학교에서 “선생님이 돈을 도둑맞았다”고 퍼뜨렸다고 한다.
하지만 선생님은 그 일을 문제삼지 않았다. 오히려 아들에게는 그 ‘은혜의 이야기’만 전하셨다.

그 기억이, 세대를 건너 이토록 따뜻한 장면으로 돌아온 것이다.


“악한 끝은 없어도 후한 끝은 있다.”

오늘 나는 누군가에게 후한 마음을 건네고 있을까?
아니면 마음의 계산기부터 꺼내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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