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분과 함께한 세월
이 이야기는 좀 길고 지루하다. 우리들과 함께 커오고 아버지의 일생과 함께했던, 토분에 담긴 평범한 화초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아버지는 농업고를 나와 대학에 가셨다. 그래서인지 화초 가꾸는 것과 무엇인가를 기르는 일에 즐거워하시고 아주 열심이셨다. 부임하는 학교의 온실관리를 자청해 맡으셨고 온실이 없으면 새로 만들어 스스로 온실장이 되셨다고 자랑하셨다.
어린 시절 겨울방학에 아버지를 따라가서 학교 온실에서 놀던 때가 아득한 영화 속 풍경 같다. 그래서 어릴 때에도 풍란, 춘란, 제라늄, 튤립, 온갖 선인장 등등의 온실 화분의 꽃들이 익숙했다.
화분의 꽃나무는 땅에 심은 식물보다 관리하기가 어렵다. 화분에 물이 마르면 고사(枯死)하고 물이 많으면 뿌리가 썩기 쉬워 매일같이 들여다보고 돌봐 주어야 한다. 추운 겨울에도 온실 안은 따뜻하여 화초가 동해 입을 위험보다는 오히려 건조하여 말라서 죽는 경우가 많다. 염려되어 부지런히 물을 주다가 뿌리를 썩게 해서 죽이는 수도 있다.
잔뿌리가 왕성하게 뻗어 나가려는 꽃나무를 화분에 가두어 놓으니 예외 없이 화분 속의 나무나 화초의 뿌리는 좁은 화분을 금세 꽉 채우고 답답해한다. 화초를 잘 기르려면 무엇보다 적기에 주기적으로 분 갈이 해서 숨통이 트이게 해줘야 한다.
화초 기르기를 좋아하나 경제적인 여유가 없는 선생님에게 널찍한 마당이 있는 집은 꿈이었지만 심은 대로 잘 자라고 있는 화분은 현실이었다. 좁은 집에 비해 화분이 많았다. 많아도 너무 많았다. 여름엔 덥고 겨울엔 아주 추운 나라에서 좁은 집에 화분이 많으면 필연적으로 관리할 노동력이 필요하다.
어리지만 건강한 아들이 많은 아버지는 노동력은 무한할 것으로 생각하신 것 같다. 세월 속에 형제들이 소년에서 청년이 되어갈 때 살던 단층집을 허물고 그 자리에 이층으로 다시 지었다. 조금이라도 경제적인 식견이 있었더라면 당연히 그 돈이면 좀 더 변두리나 다른 곳에 터가 넓고 마당도 더 넓은 집으로 이사하는 것이 마땅했는데, 아버지는 그 집이 우리 형제들이 탈 없이 자란 좋은 집터라 생각하시고 이사하는 대신 집을 거의 허물고 이층으로 새로 올렸다. 돌이켜보면 그 집을 다시 짓는데 1980년 당시 서울 강남에 웬만한 아파트를 구입할 수 있는 거액의 돈이 들어갔다.
이층 집이었던 앞집에 가려 항상 일조량이 부족한 집터에 그런 큰돈을 들여 집을 새로 지을 이유가 없었는데 왜 그러셨는지 의문이지만, 좋은 집터 덕분에 우리가 그리고 너희들도 탈 없이 자랐다고 위안을 삼는다. 아무튼 집이 이층이 되니 화분은 좁은 마당과 일층과 이층의 빈자리마다 빽빽하게 놓였다.
휴일이면 형제들은 아버지의 지휘에 따라 무거운 문주란, 용설란, 공작선인장, 소철, 군자란 등등의 육중한 화분을 이리 옮기고 저리 치우고 가끔은 이층으로 올리고 마당으로 내리느라 저절로 힘쓰는 운동이 됐다.
일요일 한바탕 화분들과 씨름하는 날이면 나는, 그리고 아마도 형제들 모두, 나중에 독립하면 절대로 어떤 화분도 화초도 가꾸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아버지는 군청 소재지나 면소재지 시골 학교에 근무하시며 주중에는 학교 사택에서 지내다 일주일이나 보름 만에 집에 오셨다. 주말이면 아버지가 대문에 도착해서 집의 현관에 들어서시기까지 십 분은 족히 걸렸으니 우리 집은 엄청나게 큰 저택인 셈이었다. 대문에서 현관까지 5미터 거리이지만 마당의 화분을 보시고 이층의 테라스를 죽 둘러보시기까지 형제들은 줄지어 따라다니며 아버지의 화분 상태 점검에 입회하고 아버지는 아들들의 맡은 바 돌봄 노력에 대한 평가를 끝내야 집안으로 들어오셨기 때문이다. 어머니의 그냥 들어오라는 성화도 별 무소용이었다.
휴일이면 친구들과 여기저기 마냥 싸돌아 다니던 고교시절, 무등산에 올라갔다 오겠다고 한 날 아침에 아버지께서 모처럼 당부하셨다.
‘산골짜기에 부엽토가 많이 쌓여 있을 텐데 한 자루 담아 오너라’
커다란 반섬들이 마대 부대를 배낭 짐에 넣고 무등산에 올랐다. 중머리재에서 새인봉 능선 따라 하산하는 길에 갈색 낙엽이 수북이 쌓인 골짜기에서 함께 간 친구들과 ‘부엽토’가 무엇인가 토론이 벌어졌다.
부엽(腐葉)이면 썩은 나뭇잎이니 위에 마른 낙엽을 대강 걷어내고 아래에 습기를 머금은 썩은 낙엽을 자루에 담으면 될 것인데, 나름 똘똘한 우리들은 ‘부엽토’이니 나뭇잎이 썩어 흙이 된 것이어야 할 것으로 해석했다. 습기 머금은 썩은 나뭇잎 아래에 기름져 보이는 흑갈색 흙이 있었다. ‘아 이게 부엽토구나 ‘ 의견 일치를 보았다.
나와 친구들은 손으로 그 부드러운 흙을 마대 자루 가득 퍼 담았는데, 도저히 들고 내려갈 수가 없었다. 마대 자루가 찢어질 것 같았다. 할 수 없이 반을 덜어 냈어도 족히 사십 킬로는 될 무게였다. 친구들과 교대로 등에 지고 무등산 입구 버스 종점까지 겨우 내려왔다. 친구들과 헤어져 버스를 타고 돌고개 정류장에 내려서 혼자 배낭 위에 겹쳐 흙부대를 어깨에 지고 1km 거리를 걸어 집에 도착하니 기운이 다 빠져버렸다.
아버지가 그 흙자루를 보고 깜짝 놀라셨다. “아니 이거 흙 아니냐? 이 무거운 걸 산에서부터 어떻게 가져왔다냐! 부엽토를 좀 담아 오랬더니 생흙을 퍼왔구나”
아버지가 원하신 것은 썩은 낙엽이었다. 낙엽 한 자루는 큰 마대 부대에 꽉꽉 눌러 담아도 아마 이십 킬로그램도 안 됐을 것인데 아버지는 필요 없는 흙’ 토’ 자를 붙여 유식한 녀석들을 고생시키신 셈이다. 그날 종일 가파른 능선을 오르내리느라 많이 걷기도 했지만 어깨가 쑤셔서 밤에 잠을 자기 어려웠다.
아버지는 부엽과 깻묵을 분 갈이용 화분 흙에 섞어 버무려서 여러 개의 새 화분을 만들려고 하셨던 참인데 마침 내가 친구들과 퍼온 흙을 섞어 분 갈이 작업을 오히려 수월하게 하셨다. 아마도 큰 화분 5~6개는 족히 분 갈이 할 만한 흙을 퍼왔으니 그때 나와 친구들의 등짝이 꽤 튼튼하기는 했다.
화분의 꽃들이 피어날 때 이웃들과 골목을 지나가며 구경하는 낯선 행인들의 부러움과 칭찬을 들으면서 ‘보기에 좋은 것엔 아랫것들의 숨은 고생이 많다’는 것을 저절로 알게 되었다.
아버지의 정성으로 화초들은 무럭무럭 자랐다. 뭐든지 아버지 손길만 닿으면 싱싱해지고 우람해졌다. 기다란 잎 가에 줄줄이 솟은 가시가 용의 등에 난 무서운 뿔 같은 용설란 몇 개는 장정 두 명이 맞들어야 겨우 들 수가 있었고 어느덧 큰 화분의 직경은 한자 반짜리가 되었다. 붉고 화려한 꽃을 줄줄이 피워 장관인 공작선인장도 키가 우리들의 어깨 높이로 커서 도열했다. 주황색의 고고한 자태의 꽃을 피우는 군자란도 왕성하게 새끼를 쳐서 분 갈이 할 때마다 화분 개수가 서너 배로 늘어났다.
당신이 좋아하고 아끼셨던, 하얀 꽃이 청초하게 피어나는 문주란은 바깥 기온에 까다로우면서도 아버지 손길에 새끼를 잘 쳤다. 아버지의 문주란 덕분에 가수 문주란의 쉰듯한 목소리도 친근해졌다.
동일 식물의 동일한 자손이 화분에 담겨 한 분단씩 늘어서 있게 되니 이건 꽃집도 아니고 농장도 아닌 곳에서 아들들의 무한한 노동력을 요구하는 무거운 짐이었다. 무럭무럭 자라면서 풍성하게 늘어나는 화초에 아버지는 늘 흐뭇해하셨다.
아들들은 겉으로는 효자연하고 묵묵히 노동력을 제공했지만 화분 개수가 늘어나고 화분 몸집이 커져 감에 은근한 짜증과 함께 반항심도 함께 자랐다. (어렸을 적 외가에 까지 소문난 집안의 꼴보로 반항심 많았던 내가 유독 더 그랬을 수도 있다.)
봄에서 여름까지, 아버지가 집에 오셔서 분 갈이 하는 일요일이면 다른 일에 우선해서 형제들은 분갈이 작업을 도와드렸다. 겨울이면 추위에 얼게 되는 화초를 담은 화분들이 위아래층 거실을 빼곡히 차지하고도 안방, 건넌방 할 것 없이 방마다 방 윗목을 촘촘히 차지했다. 그리고 겨울 볕 좋은 날이면 화분들에게 일광욕 봉사를 해주어야 했다. 우리 형제들은 주말이면 다음날 월요일에 학교에서 월말 고사, 중간고사를 보더라도 우선 닭똥도 치우고 칠면조도 돌보고 화분 노동을 했다.
세월이 흘러 어느덧 작은형은 공군에 있었고 학교 다니기 심드렁했던 나도 군입대를 앞두고 있었다. 주요 노동력이 둘이나 빠지게 되면 남은 형제들의 고생은 배가 될 판이었다.
형제 중에 항상 불만은 많았어도 다섯 형제들의 중간 위치에서 균형 잡힌 사고로 제법 획기적인 발상을 하려고 애쓰는 셋째 즉 내가 형제들을 위해 총대를 멜 생각을 했다. 당시 통과 의례였던 입대 축하주 몇 잔 마시고 취한 척 미친 척 화분을 절반쯤 박살 내어 개수를 대폭 줄여 집에 남은 형제들의 수고를 절반으로 덜어주고 군대로 도망가는 게 좋겠다는 마음을 굳혔다가 술이 깨면서 돌아온 이성이 말렸다. 박살 난 화분 복구하느라 집에 남은 형과 동생들이 더 고생할 것 같았다.
세월과 함께 형제들은 순서대로 하나둘씩 결혼하고 분가했다. 아버지는 화초에게는 미다스의 손을 가진 은인이셨다. 시들어가는 화초도 아버지의 손에 닿으면 싱싱하게 되살아났고 아버지의 손에 닿으면 꽃을 활짝 피웠다. 그리고 화초라면 무엇이든 아버지 손길이 스치면 그 수가 불어났다. 당연하게도 집안의 구석 공간마다 포화상태가 되었고, 아버지도 지치실 때가 되었다. 언젠가부터 본가에 간다고 전화드리면 ‘차 가져오는 거냐?’를 먼저 물으셨다. 분가한 아들들이 모처럼 집에 오면 아버지는 거의 의무적으로 화분을 몇 개씩 실어가라고 압박하셨다.
아들들은 질색하지만 며느리들은 고마워하며 실어가는데, 하얀 코끼리를 받은 아들들은 아내가 도시의 아파트 베란다에서 시아버지가 하사한 그 화분들을 잘 키울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하지 않는다. 생각해 보면 불쌍한 화분들이 강제로 차에 실리고 성의 없는 새 주인을 따라와서 많이도 시들었다.
큰형이 무등산 자락 넓은 맨션으로 아버지를 모시고 이사를 했지만, 우리들이 자랐던 월산동 이층 집의 화분이 문제였다. 많은 화분을 여기저기 떠넘기다시피 주고도 남은 화분이 여전히 많았다. 아버지는 산자락의 두암동으로 거처를 옮기신 후에도 옛집에 남아있는 화초를 돌보기 위해 한참 먼 월산동으로 출퇴근하셨다. 큰형과 형수님은 옛집에서도 아버지가 낮 동안 편히 쉬고 뭔가 드실 수 있게 배려하느라 또 애를 쓰셨다.
아버지가 여든이 넘으시자 차량 운전을 하지 않으시도록 권하고 대신 전용 택시를 이용하도록 조치했다. 아흔이 가까워 오자 형님은 연로해진 아버지를 설득하여 월산동 집의 화분을 여기저기로 무상 분양하며 떠맡기는 기부를 하고 형님의 아파트에서 기를 수 있을 만큼만 옮겨왔다. 무려 육십 년에 걸친 아버지의 화분과의 대장정 역사가 정리된 셈이다.
큰형도 은연중에 아버지의 친화초 유전자가 흘렀는지 아니면 아버지를 오래 모셔서인지 아버지의 기운이 남아 여러 화분이 기적을 유지하고 있다. 한겨울에 화분에 심은 한라봉이 두 주먹만 한 노란 열매를 주렁주렁 달고 있다.
아버지의 화분 중에서 꼭 남기고 싶어 아껴둔 얘기로 마무리하고 싶다. 80년대 초 어느 날, 아버지는 어디선가 소철 씨앗 6개를 얻어다가 형제들을 불러 모아 지켜보는 가운데 싹 틔우는 긴 화분의 모래 속에 심고는 우리에게 날마다 아침저녁으로 물 뿌려주는 것을 잊지 않도록 부탁하셨다. 우리는 기약 없이 그러나 약속한 대로 꾸준히 물을 주었다. 한 달, 두 달, 석 달 화분의 모래 위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이 그대로였다. 모래 속을 파헤쳐 보고 싶은 충동을 참으며 넉 달 다섯 달 여섯 달 일곱째 달이 되자 기적처럼 소철의 푸르고 작은 싹이 모래를 뚫고 내밀었다. 우리는 환호했다. 긴 시간을 기다려야 생명이 싹을 틔운다는 거시적인 안목과 바늘처럼 작은 새싹의 미시적인 아름다움을 동시에 가져본 의미 있는 귀한 경험이 되었다. 그날 싹이 올라왔던 소철중 하나가 우람한 위용으로 큰형댁에서 지금도 잘 자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