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 속의 경이로움
거미 - 모든 벌레와 곤충을 내편인가 아닌가? 텃밭에, 정원의 나무에 아군인가 적군 인가로 구분하는 이분론적 분류에 익숙해져 갈 때 헛간과 나무 가지와 다니는 길목마다 보일 듯 말듯한 그물로 진을 치고 있는 거미를 어떻게 규정해야 할지 헷갈렸다.
거미는 곤충도 아니고 벌레도 아니다. 생물 분류 용어로 말하면 ‘거미류’에 속하는 절지동물이다. 몸이 머리가슴(두흉부)과 배로 나뉘어 있고 다리가 8개이니 곤충 보다 2개가 더 달렸다.
‘벌레’는 과학적인 생물 분류 용어는 아니지만 일반적으로 작고 기어 다니는 동물을 통칭하니 기어 다니는 거미를 보고 ‘벌레가 기어간다’라고 해서 틀리다고 지적하기는 어렵다. 그래도 생물학적으로 정확한 표현은 아니다.
산전수전 겪어본 노회 한 만물의 영장(萬物之靈長)이라 하더라도 거미를 알고 나면 어느 정도 경외심을 갖게 된다.
어느 날 마당의 소나무 가지 끝에서 5미터는 족히 떨어진 집 지붕 처마 끝까지 긴 거미줄이 허공에 가로질러 있었다.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허공에 보일 듯 말 듯 그어진 선을 보며 그것이 어떻게 생겨났을까 상상해 보는데 나의 공학적 지식으로는 이해 불가였다. 거미줄이니 분명 시공자는 거미일 것이다.
소나무 가지 끝에 거미줄 한쪽을 붙여놓고 거미줄을 쭉 빼내어 매달려서 제 몸뚱이를 진자처럼 좌우로 요동쳐서 진폭을 크게 하여 처마에 도달했을까?
솔가지 끝과 지붕 처마 끝 두 꼭짓점의 높이와 거리, 그리고 마당에서의 높이를 가늠해 보니 진자운동을 가정한 원호 궤적이 가능하지 않다. 그리고 진자 운동 중에 매달린 거미의 원심력으로 늘어질 거미줄을 생각하면 더욱 가당치 않은 가설이다.
거미가 처마를 겨냥하고 꽁무니에서 거미줄을 일시에 품어내어 쐈을까? 아니면 꽁무니에서 거미줄을 풀어내며 소나무 끝에서 마당으로 내려와 처마로 기어올라간 후 거미줄을 팽팽하게 잡아당겼을까? 아마도 그렇게 힘세고 멍청한 거미는 없을 것 같다.
미스터리는 수수께끼로 남기고 장대로 허공의 거미줄을 일단 걷어내었다. 상당히 난폭한 짓을 쉽게 한 셈이다.
그런데 며칠 후에 보니 그 허공에 다시 긴 거미줄이 비슷하게 쳐 있는 것 아닌가. 아무리 궁금하다 해도 거미줄을 또 걷어내고 다시 거미가 그 허공에 거미줄을 치는 현장을 잠복하듯 지켜보고 있을 만큼 끈기도 우둔함도 내게 있을 리 없다. 그러나 호기심은 점점 더 커졌다.
비비시 자연 다큐멘터리 영상을 찾아보고 무릎을 탁 치게 의문이 풀렸다. 거미가 바람을 이용하는 것이었다. 거미라는 생명체를 경이롭게 보게 되었다. 마음속으로 영지 내의 모든 거미에게 사면령을 내리고 보호 동물로 선포했다.
거미의 신분을 올려주고 기념하여 영지의 곳곳에 펼쳐진 다양한 거미줄을 관찰하는 것이 한때의 취미가 되었다. 햇살과 어우러진 거미줄은 취미 사진 촬영의 좋은 대상이 되었다. 내가 지나다니는데 방해되지 않는 거미줄은 모두 그대로, 거미가 원하는 대로 두었다. 큰 우산 만한 거미줄이 도처에 펼쳐졌다.
관심을 갖고 눈여겨보니 긴호랑거미가 나무와 나무 사이 공간에 커다란 거미줄을 치는 공사 현장이 보인다. 오며 가며 들여다보다가 나도 모르게 빨려 들어간다. 고수가 바둑판 옆 훈수꾼을 무시하듯 거미는 구경꾼을 무시하고 설치 작업에만 몰두한다. 8개의 다리가 절묘하게 협동하며 수직으로 세운 거미줄 안테나의 나선형 가로줄을 쳐나가는 광경을 넋을 잃고 보게 된다.
어느 날 완벽하게 쳐져 있던 거미줄 그물의 씨줄과 날줄. 그 스파이더 레이다 망에 잠자리가 걸려 몸부림을 쳤는지 그물 한쪽이 찢어진 채로 기진한 잠자리 한 마리가 날개를 펴고 붙어있다. 생생한 생존 투쟁의 현장이다. 거미줄 주인인 무당거미가 통통한 배를 자랑하며 거만하게 포즈를 취하고 있었다.
아침이면 이슬이 걸린 거미줄이 방패처럼 태양을 향해 펼쳐져 있다. 거미줄 사이로 아침 바람이 빠져나간다. 감탄하며 카메라 파인더에 들어오는 거미줄의 아름다움을 담는다.
집뒤편에 이어 붙인 테라스에 기둥을 세우고 비를 가릴 유리 지붕을 씌우니 여름이면 지붕 아래로 파리, 모기, 온갖 나방과 날개 달린 곤충이 날아들었다. 테라스 허공을 가로질러 기둥과 기둥사이, 기둥과 지붕사이에 무당거미가 친 거미줄이 어지럽게 펼쳐졌다.
여름 내내 처마에도 헛간에도 온통 회색 거미줄 천지가 되어 거미가 미처 먹어치우기 어려울 만큼의 날벌레들이 처절하게 붙잡혀 있다. 가히 공포영화의 한 장면을 연출해도 될 만큼 거미 왕국이 되었다.
영지엔 울긋불긋한 무당거미와 긴호랑거미가 대세를 이룬다. 모두 거미줄을 통 크게 치는 대형 거미다.
날벌레들이 모여드는 뒤편 테라스 비가림 지붕아래 엄지손가락 마디 만한 통통한 거미들이 거의 스무 마리 넘게 상주하니 테라스의 나무 데크 바닥이 희끗희끗 쌓이는 거미 똥으로 지저분 해졌다. 바닥을 보면 거미 한 마리가 벌레를 얼마나 왕성하게 먹어치우는지 알 수 있다. 테라스가 온통 거미 소굴이 되자 이층 화실에서 뒤편 테라스로 가끔 바람 쐬러 나오시는 화가의 잔소리 톤이 달라진다.
거미가 줄에 걸린 날벌레를 바로바로 잡수는 것이 아니라 거미 실크로 대충 감아 거미줄에 매달아 놓고 식량창고로 사용하니 위를 쳐다보면 하얀 거미줄과 날벌레 사체들로 어지럽다.
거미는 나방류를 좋아한다. 거미가 거미줄에 걸려 버둥거리는, 제 몸보다도 더 큰 나방을 거미줄로 칭칭 감는 것을 보고 있으면 그 포박 기술에 놀랄 수밖에 없다. 거미줄에 감겨 매달린 나방 사체가 늘어나면 보기에 좀 흉측하다.
테라스의 거미줄을 다 걷어내라는 작전 명령이 하달되지만 ‘늦가을에 일괄 정리’를 복창하며 시간을 벌어준다. 한편으로는 겨울이 오는 길목 어느 날 사용할 뿌리 붙은 옥수숫대 몇 개를 골라 준비해 놓는다. 거미줄을 일제히 걷어내는 데는 이만한 도구가 없다.
(글제목을 거미줄 1로 한 바 이는 거미줄 얘기가 길어져서 거미줄 2로 이어질 거라는 의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