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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앙성 산문 21화

콩 심는 때

원초적 신경전

by 시준

콩 심은 데 콩 나야 하는데, 콩 심은 데는 표가 난다. 표가 나니 노리는 놈도 많다.

콩을 심은 다음날 콩이랑을 들여다보니 콩심은 자리마다 살짝 파헤쳐진 흔적이 보인다. 혹시나 하고 그 자리를 파보니 있어야 할 콩알이 없다! 줄줄이 마찬가지다. 땅속의 콩을 몽땅 도둑맞은 게 분명했다. 그야말로 깡그리, 여지없이 쏙쏙 빼먹은 것이다. 영지로 떼 지어 날아오고 날아가는 새떼를 보며 콩 농사는 재배 품목에서 아예 제외하기로 했다.

그런데 여름이 한창일 때 이웃 농가의 밭두렁에는 콩줄기가 잘도 자라고 있었다.


"올해는 뭘 심었어?" 초보의 초라한 밭이 궁금한 마을 대동계장님이 관심을 보인다.

"이것저것 푸성귀에 고추, 토마토 좀 심었네요"


"콩도 좀 심지 그래?"

"작년에 심었다가 심자마자 새들한테 다 바쳤어요"

"허허~ 콩은 심을 때를 잘 잡아야지"

"인터넷도 찾아보고 해서 심었지요"

"그 말이 아니여"

"그럼 뭔 말씀이신데요?"


노련한 농부께서 애잔한 초보에게 넌지시 팁을 하나 알려주신다.


“새들은 날면서 땅 위에 기어 다니는 쬐깐한 벌레까지 다 훑어봐. 인간들이 땅 위에서 하는 짓을 다 보고 있다는 말이제”


새들은 하늘을 날다가도, 덤불에 숨어서도 인간들이 언제 맛난 콩을 땅속에 숨기는지, 그 콩이 언제 땅 위로 싹을 내미는지를 작은 눈으로 다 노려 보고 있단다.


“근데 새들이 한눈파는 일주일이 있어. 딱 그때가 콩 심을 때여”

“그때가 언제랍니까? “

“하여간 모르는 것도 많어~ 오디가 익을 때지 언제겠어. 콩은 그때 잽싸게 심어야 새한테 안 뺏기는거여 “

산뽕의 오디가 검푸르게 익어 새들이 오디에 한눈을 파는 그 일주일이 딱 놈들을 속일 수 있는 절호의 찬스라는 말씀이다.


이런! 세상사 귀찮아서 틀어박히고 싶은데 산골에서 새들하고 신경전을 해야 하다니!

그런데 냉정하게 들여다보면 이건 단순한 신경전이 아니다. 심오한 동물의 세계에서 자연의 도움을 받아 식량을 얻으려는 농경 인간과 그 인간을 등쳐먹는 야생 조류 간 생존 투쟁이다. 새들에겐 이 먹이 쟁탈기회도 자연의 일부이고 이에 필요한 타이밍을 잘 잡았을 뿐이다.


"걔들은 언제나처럼 수렵시대에 산다는 것을 명심해야 혀. 수렵시대엔 당장 제 입에 들어올 먹이 만이 중요 하제."


진득하게 기다리면 수십 배, 수백 배 배당을 주는 오묘한 농경의 이치를 날개 달린 것들이나 네발 달린 것들이 알리가 없다. ‘수렵시대를 사는 것들은 오늘 제 입에 들어올 것만이 중요하다’는 말은 진리다.

수렵시대는 먼 선사시대에나 있었던 전설로 치부하는 두발 달린 호모사피엔스도 입이 궁해지면 언제든 아귀가 되어 수렵시대로 돌아가지 않았던가?


믹스 커피 한잔으로 타이밍의 지혜와 수렵시대로 살아가야 하는 동물 심리를 논하는 지적 횡재의 날이다.


듣고 보니 산새들은 산뽕나무 열매인 오디를 정말 좋아하는 것 같다. 오디를 실컷 먹고 나중에 먹을 요량으로 물고 오다가 영지 아무 데나 오디를 떨어뜨린다. 아마도 부리에 오디를 문채로 날면서 동무들과 수다하다 아차차 떨어뜨렸을 거다. 그래서 이곳저곳 무차별로 뽕나무가 자란다. 영지에서 잡초만큼 귀찮은 게 뽕나무 싹과 버드나무 싹이다.

뽕나무는 새들이 물어오고 버드나무는 바람이 실어온다. 무심히 일 년만 놔둬도 뿌리를 제법 깊이 내려 손으로 뽑아내려면 용을 써야 한다. 뿌리내려 두 해를 넘기면 할 수 없이 약으로 고사시켜서 제거해야 한다. 올해부턴 버드나무만 뽑아내고 뽕나무 솟아나면 밭 가장자리로 옮겨서 아예 오디 농사를 지어볼까 하다가, 아서라 꿈 깨자 그러다 게으른 머슴이 누에까지 치고 싶을라!


자신을 얻어 늦은 강낭콩을 심었다. 콩심은 자리 위에 싹이 올라올 때까지 종이컵을 덮고 돌로 눌러 놓았다. 싹이 터서 올라오고 보니 넝쿨 강낭콩이다. 모양 같은 강낭콩에 직립하는 콩이 있고 넝쿨로 자라는 종류가 따로 있다는 것을 새롭게 배운다.

한 톨의 콩이 싹 틔우고 무탈하게 자라서 콩을 몇 개씩 담고 있는 콩깍지로 돌려주리라. 파종해서 수확하는 곡물 농사가 다 마찬가지겠지만 그중에서도 강낭콩 콩깍지를 벗기며 굵은 콩을 털 때의 기분은 되게 오질 것이라 생각하니 여린 넝쿨만 봐도 흐뭇하다. 미리 김칫국을 마시는 것은 초보의 특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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