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특별한 나무
오뉴월 감나무 이파리는 싱싱하다 못해 검푸르다. 꼭지에서 떨어진 바나나 우윳빛 감꽃이 감나무 그늘 짙은 마당에 지천으로 널려있다. 심심한 아이들은 텁텁한 감꽃을 맛본다. 떫은맛에 달짝지근한 맛도 아삭한 식감에 섞여있다. 감꽃 많이 먹으면 똥 누기 힘들다고 할머니는 나무 그늘아래 평상에 앉아 손자를 말리지만 할머니가 마땅히 내줄 것이 없는 애매한 오월이다. 감꽃은 이 계절의 심심한 과자다.
여름 아침이면 감나무 아래 여기저기에 굵어가던 초록 생감이 몇 개는 꼭 떨어져 있다. 어느 가지에서 아깝게 떨어졌을까 한번 올려다보고 주운 땡감을 옹기그릇 소금물에 차곡차곡 담갔다. 하루 이틀 떫은맛이 우려진 감을 담갔던 순서대로 건져먹는다. 땡감 우린 감 먹다 하얀 셔츠에 감 물 묻혀 어른들께 야단도 맞아보셨으리라.
땡감을 노리고 감나무를 타고 올라가다 가지가 부러져 제 몸을 다쳐본 아이는 커가면서는 탈 없이 잘 자란 어른이 됐을 것이다. 어렸을 적 떨어져 본 사람은 조심 감각이 발전하게 마련이다. 감나무의 추억이 꼬리를 문다.
집 지을 자리를 찾아보면서, 주변 경치나 편의 시설보다는 햇볕 잘 들고 감나무와 탱자나무가 자라는 곳이면 좋겠다는 막연한 바람이 있었다. 남도의 마을마다 흔하고 잘 자라는 감나무도 서울 근처로 오면 귀하다. 한강 북쪽에선 더욱 보기 어려운 나무가 감나무다. 탱자나무도 서울에서 보기 어려운 나무다. 은연중 너무 춥지 않은 곳을 희망한 셈이다.
그런 바람이 도왔는지 자리 잡은 이 마을에 들렀을 때 팔려고 내놓은 네 마지기 논의 북쪽과 동쪽의 가장자리에 나무줄기 밑동이 한 자는 됨직한 굵은 감나무 두 그루가 서있었다. 거간(居間)을 돕던 이장을 지낸 분께 물었다.
‘이 논을 사면 저 감나무도 갖게 됩니까?’ 참으로 멍청한 질문이었겠다.
‘당연히 그렇지요’라는 대답에 끌렸다. 본질보다 지엽적인 것에 끌리는 체질이라 종종 유사한 사고를 친다. 감나무 두 그루를 사다 보니 논 네 마지기가 딸려온 셈이라고 놀려도 빙그레 미소 지을 뿐이다. 내심 사과꽃 복숭아꽃 만발한 마을에 감나무도 자라서 더 좋다며 흐뭇해했다.
감나무는 다른 과일나무에 비교하면 병충해가 거의 없는 편이다. 감껍질에 있는 탄닌(tannin)의 살균과 항균 작용으로 벌레나 미생물의 침입을 어느 정도 방지해 준다. 농약을 치거나 거름을 준 적 없으니 힘들일 것도 없다. 해준 것도 없지만 지난 십여 년 두 그루 감나무는 매년 넘치게 감을 내어주며 늙어간다.
주렁주렁 천 개 넘게 감을 맺은 해도 있고 쉬어가고 싶은지 이삼백 개만 달린 해도 있지만 두 그루에 열리는 감은 나와 까치와 직박구리에겐 항상 충분하다.
무거운 장대로 감 따기는 가을마다 고역인 행사다. 누구든 와서 따가도 좋으련만 요즘 시골의 감은 홀로 익을 대로 익어 중력이 끄는 대로 자유낙하하여 땅바닥에 철버덕 으깨져 있거나 가지에 붙은 채로 까치밥이 된다. 대한민국 국민들은 언젠가부터 동네 감나무에 주렁주렁 남은 땡감 따위는 탐하지 않는다. 그저 관상용으로 쳐다만 본다.
그래도 감나무에 끌려서 이 땅에 딸려온 셈인 나는 아무리 게으르게 바쁘더라도 영지의 감을 따며 가을에 수확하는 기분을 만끽한다. 감나무가 높이 커서 거의 절반은 감 따는 장대가 닿지 않아 포기한다. 어쩔 수 없지만 한편으로는 기꺼이 새들에게 넘기는 것을 다행으로 여긴다. 하늘에 닿은 감까지 다 따려면 어깨 쑤시고 허리가 부러지겠다.
실험정신 왕성한 백수로서 감으로 할 수 있는 놀이는 사부작사부작 가지가지해봤다.
먼저 당연하게도 곶감 만들기.
두 그루에 달리는 감이 모두 네모난 모양의 사각감(四角柿)이라 곶감으로 만들기엔 적당하지 않다. 알이 크지도 않고 사등분된 골이 깊어 과도로 껍질을 깎아내기가 쉽지 않다. 그래도 뭐든지 해보려는 의욕으로 일삼아서 한 접을 깎아 한겨울 온실에 줄을 걸어 매달았다. 줄줄이 걸어 매달은 감은 한 달 정도는 그 자체로 예쁜 인테리어 장식이다. 기어이 곶감이 되라고 노려보며 기다리면 아이 주먹만 하던 감이 딱딱하고 짙은 갈색으로 말라가며 쪼그라든다. 대추만 해져서 캐러멜 같은 곶감이 되기는 됐다. 맛은 기가 막혔지만 어디다 ‘곶감이요’ 하고 내놓을 모양이 아니어서 혼자만의 간식으로 오며 가며 빼먹다 보면 봄이 온다.
혼자 다 먹는다고 오해하지 마시길~ 아내는 감을 못 먹는 특이한 체질이다. 혹시나 하고 시험 삼아 홍시를 먹었다가 며칠을 가슴앓이로 혼나고 나서는 어떤 감도 아예 쳐다보지 않으신다.(사 먹는 단감은 예외!) 영지에서 열리는 모든 감은 오롯이 물까치, 직박구리 그리고 내 것이 됐다. *1
다음, 감 조청 만들기.
애초에 목표는 곶감이었다. 곶감을 좀 더 빨리 만들어 볼까 하고 잔머리를 굴렸다. 어렵게 깎은 감을 채반에 가득 늘어놓고 햇볕에 말리는데 감마다 끈끈한 단물이 배어 나와 채반 아래로 흘렀다. 어쩔 수 없이 곶감대신 감조청이라도 되기를 기대하며 유리병에 넣어 어두운 창고에 넣어두었다. 그런데 잡다한 일과 계절마다의 숙제에 묻혀 까맣게 잊었다. 수년 후에 우연히 창고 청소하다 그 유리병을 발견했다. 유리병에 절반쯤 찬 굳은 고약 위를 약효를 알 수 없는 곰팡이가 덮고 있었다.
감식초 담그기.
이론적으로나 육체적 수고량으로 보나 제일 쉽다. 매년 담그지만 솔직히 즐겨 먹지는 않는다. 감식초 효능은 거의 만병통치약 수준이라는데, 만들어진 것 먹는 것도 부지런해야 먹는다.
따낸 감을 물로 씻지 않고 일일이 마른 천으로 닦고 꼭지를 다듬어서 항아리에 차곡차곡 가득 넣고 입구를 한지로 덮고 고무줄로 묶는다. 아무것도 더 넣을 필요 없이 진득하게 기다리면 항아리가 알아서 식초로 바꿔준다. 다음 해 여름쯤 햇살 강해 한가한 날 항아리 뚜껑을 열어 보면 질퍽해진 수면 위에 하얀 초막이 덮고 있다. 하얀 초막은 식초가 잘 되고 있다는 징표다. 좀 더 뒀다가 햇감 따기 전에 항아리도 비울 겸 채로 걸러내며 유리병에 담는다. 포도주를 마시고 빈병은 모아둘 일이다. 땡감 백개 정도 담그면 감식초가 와인병으로 5개 정도 나온다. 두껍게 덮인 초막도 남들은 유용하게 활용한다는데 정서적으로만 부자인 게으름보는 그냥 버린다.
당연하게도 뜻밖의 사유로 실패한 적도 있다. 벌써 한 삼 년 됐나? 식초가 익어가려니 하고 확인차 감식초 항아리 속을 들여다보는데, 이상했다. 물기도 초막도 없이 떡처럼(리얼하게는 똥처럼) 뭉개진 과육만 보였다. 좀 황당했다. 식초가 돼 가는 중에 항아리 바닥에 금 이 가서 슬금슬금 오랫동안 다 새어버린 것이다. 항아리를 들어보니 받쳐 놓은 보도용 블록이 초산으로 삭아 움푹 패어 있었다. 감식초가 약한 초산인데도 시멘트를 녹여버린 것이다. 살펴보니 항아리 근처의 잔디도 시들했다. 쉬운 일도 방심하면 초를 칠 수 있다.
홍시 셔벗
귀찮지만 상대적으로 쉽다. 땡감은 노랗게 익은 감이 아직 딱딱할 때 따야 한다. 남들 딱딱할 때 벌써 홍시가 된 성질 급한 놈도 있는데, 감 따면서 아니면 밭일하면서 간식으로 바로 따서 먹어 치운다.
딱딱한 감을 마른 천으로 닦아 종이 상자에 신문지를 깔고 덜 익어 더 딱딱한 순으로 가지런히 담는다. 한 층을 담으면 그 위로 신문지를 덮고 마찬가지로 또 한 층을 쌓는다. 한 상자에 2층으로 만 쌓아도 50개 이상 보관할 수 있다. 4 상자 이백 개 정도 보관한다. 딱딱했던 것이 며칠만 지나도 홍시가 되는 감이 있으니 매일 살펴야 한다. 몇 개씩 홍시가 되는대로 꼭지를 따내고 숟가락으로 달콤한 과육만 긁어내어 얇고 넓적한 뚜껑 있는 용기에 담아서 냉동고에 얼린다. 이로써 여름 내내 홍시 셔벗을 즐길 준비는 다 됐다. 즐기는 자는 나 혼자 거나 혹은 나와 운 좋은 손님만이다. 즐기는 자가 주인인 것은 동서고금, 만고의 이치다.
귀찮고 게을러서 홍시를 그대로 냉동시켜 놓기도 하는데 마나님의 좁은 냉동실에서 퇴출 우선순위가 되어 아직 쌀쌀한 봄날에 냉동 홍시를 녹여서 맛없게 먹어 치워야 하는 수가 있다.
감을 맛난 먹거리로만 적다 보니 이 글을 시작할 때생각한 주제에서 좀 멀어졌다. 특별하고 서정적인 감나무의 미학(美學)을 얘기하려던 것이 맛있는 땡감 홍시 생각에 잠시 옆길로 돌아갔다.
오월 감나무 그늘아래 연노랑 감꽃, 시월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주렁주렁 달린 주황빛 감 그리고 찬바람 속 앙상한 가지에 달린 빨간 홍시는 감나무가 서있는 시골 풍경의 주연이자 계절이 바뀐 것을 알려주는 계절의 신호등이다.
몇 년 전 11월 하순 함박눈이 펑펑 내리던 날 까치밥으로 남겨둔 빨간 홍시 위로 하얀 눈이 덮였다. 복상골에 지내면서 내 안목으로 매긴 겨울 자연미의 극치이자 해마다 다시 볼 수 있기를 애틋하게 바라는 풍경이다.
집 뒤편 테라스 데크에 삼각대를 세우고 눈모자를 쓴 홍시를 카메라에 담았다. 때마침 눈 속을 날아온 직박구리들이 하얀 눈을 털어내며 빨간 홍시를 탐한다. 운수 좋은 날이다. 홍시와 하얀 눈과 직박구리를 함께 담은 날이다.
이런 날, 이런 순간은 참으로 드물고 귀하다.
아직 홍시가 모양 좋게 잔가지에 붙어 있는 11월이 가기 전에 함박눈이 푸짐하게 내려주고, 때맞춰 직박구리떼가 배고파 날아와 줘야 하는 데다 그때 마침 내가 카메라를 들고 기다리고 있어야 하니 말이다. 십 년 동안 그런 기회는 딱 한번 있었다. 더 좋은 렌즈로 담아야겠다 하고 감나무 윗가지에 남은 까치밥을 바라보며 기회를 엿보지만 몇 년째 공치고 있다.
지난해 모처럼 11월에 첫눈이 흠뻑 내렸다. 그런데 무겁게 젖은 눈이 한꺼번에 너무 많이 내렸다. 눈보라와 눈 무게를 못 이긴 소나무 가지들이 여기저기 부러지고 감나무 윗 가지를 장식하던 홍시도 눈과 함께 일시에 다 떨어져 버리고 감가지도 몇 군데 부러졌다. 올 겨울도 허탕이다.
까치밥까지 다 떨군 겨울 까만 감나무 나목(裸木)을 보고 있다. 눈멍 대신 나무멍이다. 찬 바람 속에 늙어가는 자태가 사뭇 다르게 다가온다. 저 검은 가지마다 새로운 신호를 반짝일 준비를 겨우내 하고 있다는 것을 안다. 마르고 거친 거죽조차 우아하다.
뱀다리: *1 커피의 카페인과 탄닌이 반응하면 뱃속에 탈이 난다는 것과 커피를 참고 홍시만 먹어도 탄닌이 위산과 결합해서 탈을 내는 체질이 있다는데 하필 이층의 마나님이 그 체질인가 보다. 홍시를 먹지 못하신다니 혼자 먹기 미안하고 안타깝다.
반중 조홍감이 고와도 보이는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