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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앙성 산문 20화

조팝

이 강인한 나무에 경의를

by 시준

성토하여 다진 땅에 오도카니 집이 들어섰다. 모과나무, 무궁화, 소나무 몇 그루로 조경 시늉을 냈지만 여전히 허허로운 대지에 미안하여 종묘사에서 풀 같은 조팝나무 묘목을 묶음으로 사다 심었다.

풀같이 작고 여린 조팝 묘목이라 뚝뚝 떼어 심으면 심은 티도 안나는 것 같아 촘촘하게 심었다. 그런데 오 년도 안되어 이렇게 빨리 무성하게 자라 서로 부대끼며 잔 가지들이 얽힐 줄은 몰랐다. 나무들이 커가면서 자리다툼, 뿌리다툼 하는 것을 보는 내가 스트레스 상태가 된다.


중간중간 몇 그루를 뿌리째 캐냈다. 조만간 어디에 옮겨 심어야겠다 하고 일단 캐내어 한쪽으로 치워놓고 잊었다. 바쁜 초보 농부의 할 일 우선순위에서 한참 밀린 것인데, 햇볕 잘 드는 곳에서 몇 달을 방치했을까. 유난히 추웠던 겨울이 지나고 봄기운이 돌 때, 쓰다 버린 빗자루처럼 잔가지들이 말라비틀어진 조팝나무 무더기가 눈에 띄었다.

몇 달째 까맣게 존재를 잊고 있었지만 한때 잘 살아있다가 제 잘못 없이 운이 나빴던 식물에게 너무나 미안했다. 애초에 생각 없이 다닥다닥 심은 무지(無智) 죄에 더해 말라서 사망에 이르게 한 무심(無心) 죄가 더해진 미안함이었다. 속죄하는 심정으로, 이미 말라죽었을 거라 여기면서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바짝 마른 조팝나무 네 그루를 언덕아래 밭 가장자리 화단 한편에 정성스레 심고 물을 주었다.


기온이 오르자 원래부터 심긴 채로 무사히 제자리를 지킨 조팝나무는 가지마다 물이 오르고 일제히 푸릇푸릇 새 잎의 움이 텄다. 그런데 눕혀져 쌓여 죽었던 채로 있다가 다시 심긴 네 그루 조팝은 여전히 빗자루를 거꾸로 심어놓은 비쩍 메마른 모습이었다. 온 천지에 봄이 한창이건만 이들 불운한 조팝은 여전히 겨울이었다. 그래도 화초에 물을 줄 때마다 이 조팝들에도 똑같이 물을 뿌려주었다.

초여름에 들어설 무렵 결국 흉물이 되겠구나 하고 뽑아버리려던 때 마른 조팝의 밑동에 아주 작은 푸른 새싹이 보였다. 다른 조팝도 살펴보니 조팝마다 밑동 근처에 작은 싹이 두세 개씩 돋고 있었다. 뿌리째 뽑혀서 흙이 털린 채로 여름 가을 겨울 동안 내팽개쳐져 있었는데도 희망의 싹을 틔우다니! 살아있다는 것 자체가 경이롭고 고마웠다.

싸리 빗자루처럼 말라죽은 줄기는 정성스레 짧게 잘라주고 새로 나오는 새싹 줄기가 잘 뻗을 수 있게 다듬었다. 아침마다 물을 주며 감탄을 섞어 응원하는 마음으로 들여다봤다. 새 줄기가 줄줄이 뻗어 나왔다.

장마가 지나자 네 그루 모두 부활했다. 그해 꽃을 피우지는 못했지만 그해 내내 나를 사로잡았던 것은 초라해 보여도 강인하게 부활한 그 네 그루 조팝이었다. 조팝에 관심을 두고 찾아보니 참으로 인류에게 엄청난 도움을 준 나무였다. 자연에서 아름다운 꽃을 피우고 가혹한 환경에서도 강인하게 살아남는 식물은 분명 동물에게 약이 되거나 독이 된다.

조팝나무는 약리학적 역사에서 중요한 식물로, 단순히 아름다운 꽃을 피우는 나무 이상으로 생명력과 자연의 의학적 가능성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1


영지의 구석구석에 자리 잡고 잔 가지를 쭉쭉 뻗은 조팝을 잘라줄 때가 되었다. 겨울 찬바람 속에서 한 그루씩 차례로 만져주며 가지를 짧게 다듬어 준다. 잔가지를 싹둑싹둑 자르는 전동 전지가위 소리가 경쾌하다.



뱀다리- *1 호기심에 메모해 놓은 것: 조팝나무(Spirea)엔 아스피린 원료가 들어있다. 조팝을 포함한 여러 식물(버드나무, 자작나무 등)에서 살리신(salicin)이라는 물질이 발견되었으며, 이는 체내에서 살리실산(salicylic acid)으로 변환된다.

살리실산은 염증을 완화하고 통증을 줄이는 효능이 있어 의약품 아스피린의 기초 물질로 사용되는데 조팝나무의 학명(Spirea)이 아스피린(aspirin)이라는 이름의 유래와 연관이 있다.

독일의 제약회사 바이엘(Bayer)이 처음으로 아스피린을 상업적으로 개발할 당시, 조팝나무속 식물에서 발견된 살리실산에서 영감을 받아 약물의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A”는 아세틸(acetyl)을, “spirin”은 조팝나무속(Spirea)을 의미한다.)

오늘날 아스피린은 주로 화학적으로 합성되지만, 조팝나무와 같은 식물에서 발견된 천연 살리신은 아스피린의 개발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런데 조팝의 꽃말이 ‘헛수고, 하찮은 일’이라니 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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