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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앙성 산문 19화

도토리

잘 지은 열매 이름

by 시준

집을 둘러싼 도랑 건너 뒷산으로 이어지는 깎아지른 절벽에 크고 작은 나무들이 위태롭게 뿌리를 내렸다. 뿌리를 내린 후에 흙이 무너진 곳도 있다. 단면이 드러난 절벽의 아래쪽은 무른 암석이지만 윗부분 1~2미터는 풍화되어 뿌리가 암석을 파고들었다. 겨울이면 굵은 뿌리가 드러난 모습이 훤히 보인다. 비스듬히 선 큰 나무들이 언제나 쓰러질까 불안하다.

그래도 여름이면 숲을 이뤄 울창한 녹음으로 녹색의 커튼을 드리운 것처럼 절벽을 가려준다. 낙엽이 우수수 바람에 날리는 가을을 보여주고 겨울이 와도 가지마다 마른 갈색 이파리 몇 잎이 떨어질 듯 붙어 바람에 흔들리며 노래를 부른다.

복상골에서 들어앉았어도 심신은 여전히 분주하지만 머릿속은 한결 느긋하다. 소소한 것에도 관심을 두고 찾아보게 된다. 그중에 하나가 눈에 띄는 나무 이름, 풀이름을 익히는 것이다. 대개는 이건 이런 이름을 가졌구나 하고 넘어가지만 가끔은 찾아보고 차마 입으로 말하기 민망한 이름도 익힌다. (그런 이름을 공식적으로 나름 이쁜 풀에 붙인 이의 인성을 의심하면서)

둘러보다 눈에 띄어 조용히 불러보면 새삼 이름 참 정감 있게 잘 지었다 공감하게 되는 이름도 있다.

도토리.

나무 열매에 붙인 이름 중에서 내가 꼽는 잘 지은 이름은 단연 ‘도토리’다. 왠지 모르게 생김새와 맛까지 이름과 딱 들어맞지 않은가? ‘도토리 키재기’란 비하성 비유마저 상큼하게 귀엽다. 싸이월드의 도토리를 떠올려도 기분 좋아진다.


겨울에 스산한 영지를 둘러보니 개울가 큰 바위 위에 도토리 껍질과 뚜껑 같은 받침('각두'라 한다)이 수북이 쌓여 있다. 아마도 뱀도 제 굴로 들어가고 솔개도 배가 불러 방해할 천적이 없는 늦가을에 평화로운 다람쥐들의 야외 만찬 회식 자리 같다. 껍질 무더기를 헤쳐보니 그 속에 아직 온전한 도토리들이 보인다. 그중에서도 유독 굵은 도토리 한 톨이 눈에 들어와 주어 들었다. 털 달린 각두를 쓰고 있어 인터넷에 알아보니 상수리의 도토리다.

도토리는 멧돼지가 먹는 밤이라서 ‘돼지돝밤’에서 도톨밤으로 그러다가 밤이 아니라 도톨이가 되고 결국 도토리가 되었다고 한다. 그냥 믿기엔 좀 억지스러운 구석이 있는 이름 변천 이력이지만 거친 이름이 구르고 굴러 매끈하게 둥글어진 모범 사례를 보는 것 같기도 하다. 실제 모양도 매끈해서 도토리가 받침과 함께 땅에 떨어져 구르면 왠지 그냥 주어서 손에 쥐고 싶다.


초등학생도 알고 있는 것처럼 도토리는 참나무에 열리는 열매이다. 그렇게 알고 있었다.

놀랍게도 참나무라는 이름의 나무는 없다는 것을 나는 이 골짜기로 거처를 옮긴 후에야 알았다. 온실에 무쇠 난로를 들여놓고 '진짜 참나무 장작'을 판다고 길가에 광고를 붙인 문촌리 장작집에서 ‘진짜 참나무 장작’을 톤 단위로 들여놓으면서 알게 되었다.


장작을 톤백에 가득 담아 트럭에 실어온 장작집 총각에게 ‘진짜 참나무 맞제’? 하고 하나마나 한 확인을 하는 셈으로 물었다가 가르침을 받았다. 나 말고도 이미 돈을 건넨 고객들이 다짐차 자주 묻은 질문이었을 것이다. 간결하게 정리해 준다.

‘상수리나무, 떡갈나무, 굴참나무, 갈참나무, 졸참나무, 신갈나무처럼 도토리가 열리는 나무를 모두 참나무로 대충 부른다’는 것을 알았다. 우리말 ‘참’ 자의 새로운 발견이자 ‘참나무란 이름의 나무란 없다 ‘는 나만 모르고 있었던 상식을 알았다.

그런데,

산중에 숲을 이룬 무수한 다른 나무들 기분 상할 만하게 몇몇 나무에만 차별적인 참 자를 붙여 그들 만의 그룹을 만들게 된 근원을 알고 싶어 파고들었지만 끝내 알 수 없었다. 여러 책을 찾아봐도 답을 얻지 못했다. 도토리를 맺고 나무가 다른 잡목보다 단단하고 질이 좋아 좋은 의미의 ‘참’ 자를 붙였을 것이라는 추정으로 호기심 종결했다. 참나무보다는 차라리 ‘도토리나무’로 그룹을 만들었으면 더 좋았겠다 생각하며.


덕분에 ‘참나무’란 것은 없다는 것을 다시금 확실히 알았고, 그 없는 참나무가 전 세계적으로 600여 종이나 있다는 것도 알았다. 참 헷갈리게 모순적이지만 아무튼 ‘참나무류’ 나무에 대한 이런저런 지식은 늘었다.

가을에 잎이 갈색으로 변해도 다른 나무의 낙엽처럼 그냥 순하게 떨어질 줄 모르는 것은 참나무류의 잎자루에는 떨켜가 없어서라는 것도 알았다. 모진 바람에 말라 푸석해진 잎자루가 부러져 떨어지지만 그래도 겨울 내내 잎자루 질긴 이파리 몇 개는 가지에 붙은 채 남아 겨울 찬 바람을 맞는 것을 본다.


떡갈나무, 상수리나무는 어린 나무의 잎이라도 손바닥만 하게 크다. 낙엽이 되어 겨우내 개울가에 켜켜이 쌓인다. 겨울이 지나면 꺼멓게 변하면서 반쯤 썩은 낙엽 뭉치를 퍼 올려 밭 흙을 삽으로 제쳐가며 흙 사이사이에 섞어 넣어 준다. 게으름에도 지친 겨울 백수가 봄 노동의 시작을 알리는 연습 삼아 땀 흘려보면서 자연의 순환을 느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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