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의 화두
동쪽을 향해 완만하게 경사진 동네라 집들이 대부분 동쪽을 향해있다. 부지의 비탈 방향과 모양으로 보면 내 집 또한 동향으로 앉히는 게 자연스럽지만 나는 풍광과 한낮의 햇볕을 오롯이 갖고 싶어 정남향을 원했다.
영지 높은 곳에 정한 거처는 나의 고집과 바람대로 정남향으로 앉아 국망산을 정면에서 마주한다. 따스한 온실에 앉아 눈을 들면 그늘진 산의 어두운 북편 등판이 펼쳐져 보인다.
그 그늘 자락이 어느 날부터 파헤쳐지더니 시야에 골프장이 들어섰다.
입춘이 한참 지난 초봄에 눈이 제법 내리더니 며칠이 지나도 바라보이는 산등성이에도, 골프장의 페어웨이에도 케이크 접시에 남은 크림 조각처럼 잔설이 남아있다.
아직 바람이 차다. 그래도 햇살에 제법 온기가 느껴진다. 아랫마을 형님이 지나가다 들리셨다. 온실 탁자에 모시고 차 한잔~ 달달한 믹스커피이지만 복상골에서 인기 있는 대중 차다~ 내놓고 이런저런 마을 얘기를 나눈다.
아직 겨울인 응달진 산그늘을 함께 바라보다가,
‘양달 토깽이는 굶고 지내고 응달 토깽이는 배를 채운다’는 얘기 알제? ‘
‘뭔 토끼 얘기 다요?’
‘유식헌 양반이 정말 첨 들어보는 거여?’
‘글쎄~ 언제 들어 봤겠어요?’
‘양지 녘에 토깽이 굴을 파고 깊숙이 들어앉은 토깽이는 작은 구멍으로 보이는 앞 능선 응달에 눈이 쌓여 있으니까 아 아직도 겨울이구나 하면서 주린 배를 참고 다시 잔다는 구만~
근디,
응달에 굴을 판 토깽이는 구멍 밖에 비치는 환한 햇살과 아지랑이를 보고 와~드디어 봄이 왔구나 외치면서 춥고 배고팠던 굴을 뛰쳐나와 지천에 솟은 풀로 포식한다는 얘기여~‘
커피잔을 탁 내려놓으며 말이 튀어나왔다.
‘딱 내가 바로 양달 토끼네요!’
마을 형님이 가시고도 내내 머릿속에 양달 토끼굴이 맴돌았다. 아침의 우연한 멜로디 한 소절이 종일 읊조리는 음률이 되듯 시골에선 누구나 아는 이 속담에 담긴 진정한 뜻이 뭘까 종일 화두가 됐다. 여러 의미로 다가왔다.
양지에 자리 잡고 응달을 바라보는 나는 영락없이 게으른 초보 토끼다. 따스한 온실에 앉아 앞산의 잔설을 바라보며 아직 봄이 멀었구나 여유만 만만한 토끼다. 지난해를 살아봤으니 이맘때면 찾아서 해야 할 것이 얼마나 많을지 짐작할 수 있으면서도 애써 아직 때가 안되었노라고 마음 느긋한 토끼가 아닌가.
맞아. 거울이 없는 세상에선 내 얼굴이 어떻게 생겼는지 볼 수가 없지 하는 생각으로 옮겨간다.
남을 보고 나를 안다. 다른 사람의 얼굴에 검댕이 묻었으면 내 얼굴에도 묻었을 거라 짐작하고 일단 씻는다. 마주 보는 사람의 얼굴이 깨끗하면 내 얼굴에 때 자욱이 민망해도 깨끗하려니 믿고는 태연할 것 아닌가. 내가 모를 나한테 묻은 것은 뭔가.
결국 내식대로의 결론에 이른다. (나는 유식헌 양반이니까.)
겉모습만 보고 상황을 판단하지 말라는 교훈이 아닐까? 에 이르렀다. 내 눈구멍으로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고 또한 눈에 보이는 것이 다 진실이 아닐 수도 있다는 충고가 아닌가. 틈틈이 굴 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주변을 좀 살펴보라는 얘기로 들린다.
굴속이 너무 아늑해서 마냥 게을러진 토끼야 나와서 세상을 좀 둘러보라는 목소리로도 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