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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중희 May 18. 2021

생각도 다이어트가 필요해


우리 부부는 맞벌이 부부 이자 직장 동료다.

그렇다고 알콩달콩 직장 로맨스 뭐 그런 것은 아니고..

남편 입장에서 볼 때는 본인은 고용주님 되시고 나는 고용인.

내 입장에서는 "나 내일 병원 출근 안 한다!"라는 배째라식 협박을 미소 띤 얼굴로 날릴 수 있는 말하자면 사업? 파트너 이시다.

그렇게 우리는 출퇴근도 같이 하고 병원에서 함께 일하고 있다.


부부가 같은 일을 하다 보니 서로 전후 사정을 훤히 꿰뚫고 있어 병원의 무언가를 빠르게 결정해야 할 때 일사천리로 정 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어느 때는 병원 근무 시간으로도 모자라? 퇴근하고 나서도 그날 있었던 병원 이야기로 계속 시간을 보낸다. 이거야 몸만 퇴근했지 정신적으로는 야근인 셈이다




그런데....

병원 일을 하다 보면 때때로 팽팽한 긴장감도는 드라마나 영화에나 나올법한 응급실 장면이 연출되기도 하고 또 어느 때는 "너는 어느 별에서 왔니?"라고 묻고 프게 특별한 환자나 보호자들에게 시달리? 는 날도 있다.

또 그 어느 날은 그런 특별 고객님 들께서 동창회라도 여시는지 "이기 머선 일이고?" 싶게 근무하는 내내 비슷한 분들을 만나며 같은 말들을 반복하고 득도 없는 실랑이를 지치도록 해야 하는 때도 있다.

그런 날이면 기분이 별로다.(내식으로 말하자면 엿같다)


보기에는 축 처진 눈에 포커페이스 쌀쌀맞은 말투라 그런 일들이 있어도 눈 하나 깜박 안 하게 생겼지만 나는 사실 소심한 면이 많다.

생긴 거에 비해 뒤끝도 쩌는 타입이라 집에 와서 이불 킥도 많이 날리고 있었던 일을 자주 되감기 하기도 한다.


몸도 마음도 노곤하고 머릿속은 복잡한 날이 면...

뒤끝 만리장성인 마누라를 잘 아는 남편은 평소 가지 않던 길로 산책을 나가자고 제안한다.


가까이서 본 헤라클레스 전경 , 사진출처 Die welt , Wikipedia

사람은 익숙한 것을 좋아한다. 그래서 늘 앉던 자리 그리고 다니던 길을 선호한다. 그런데 그 익숙함에 빠져 있다 보면 자연스레 발은 가던 길을 가고 눈은 보던 풍경을 쫒으며 머리로는 했던 생각을 또 하고 또 하기 마련이다.

이 모퉁이 돌면 뭐가 나올지 익히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남편은 우리가 평소 멍뭉이 나리를 데리고 잘 다니지 않던 골목길을 선택해서 산책을 앞장선다.

따끈한 커피 한잔 손에 들고 익숙지 않은 길을 걷다 보면.....

낯섦 위로 전에 보지 못했던 소소한 모습들이 여럿 눈에 들어온다. 그런 것들을 보노라면 어느새 머릿속에서 생각 되감으며 만리장성 쌓을 틈이 없어진다.


저 멀리 먹구름 옆에 끼고 뾰족한 탑처럼 보이는 우리 동네의 상징 헤라클레스 동상을 이각도에서 보는 것은 정말 오랜만이다.

다른 골목길에서는 집과 집 사이의 간격에 가려져 저 동상이 이렇게 마주 보이지 않는다.

300년이 넘은 헤라클레스 동상과 흘러내리는 수로를 보유한 저 산 위의 공원은 유네스코의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고 이 동네 사람들의 자랑 거리이다.  

그러나 혹자는 우리 동네 비가 찔끔찔끔 자주 내리는 것이 지나가던 먹구름이 저 헐벗은 아자씨 동상에 걸려서 라는 말을 하기도 한다.



그렇게 걷고 또 걷다보면 ..

어느덧 먹구름은 지나가고 건물과 건물 사이에 숨어있던 길 건너 언덕 위의 집들도 빼꼼히 들여다 보이고...

그 집들 위로 유유히 떠다니는 하얀 뭉개 구름도 만나게 된다.


아는 길로 다닐 때는 머릿속으로 다른 생각 하느라 바빠 늘 그 자리에 서 있는 것만 같았던 구름이 사부작사부작 움직인다.

나는 그 작은 움직임에 마치 하얀 구름이 떠다니는 것을 처음 보는 아이처럼 들떠서 소리친다.

" 여보야 구름이 움직여..!"

굉장한 것을 함께 발견이라도 한 듯 남편이 대답한다.

"그러네 구름이 진짜 움직이네!"

모르는 사람이 보면 덤 앤 더머가 따로 없다.


그러나 저러나 기분이 좋아진 내게..

낯선 골목길 어귀에서 만난 하얀 구름이 가까이 다가와 마치 이렇게 속삭이는 것만 같다.

"내가 쪼까 슬로 모션이다만 계속 움직이고 있었거든? 니들이 숨 가쁘게 댕기느라 보지 못한겨, 그니께 쬐금 천천히 댕겨... 머릿속은 한가롭게 발걸음은 가쁜허게 오케이?"




한층 여유로워진 마음속으로 한 자락 바람이 인다.

이에 질세라 머리 위로 방향 맞춰 팔랑팔랑 선풍기 같은 바람이 불어 온다.

그 바람에..

올봄에는 처음 만나는 핑크색 겹벚꽃이 초록색 풀밭 위로 후두둑 떨어진다.

꽃비다 꽃비 분홍색 꽃비...


남편은...

몽롱하게 꽃잎 흩어지는 모습을 바라보며 사진을 찍고 있는 내게 말했다.

"했던 생각 또 하고 또 하면 홧병나, 이렇게 종종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머릿속을 비울 필요가 있어,

몸만 다이어트가 필요한 게 아니야 머릿속에 떠다니는 생각도 다이어트가 필요해."라고..


나는 남편의 찰떡같이 맞는 말에 입꼬리가 올라간다.

아마도 그 빙그레한 표정이 딱 우리집 멍뭉이 나리가 저 좋아 하는 간식 받아먹고 흡족해하며 앉아 있을 때와 똑같을 것이다.

무념무상 오 해피 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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