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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중희 May 15. 2021

라일락 꽃 향기 맡으며...



밤새 후드득후드득 지붕을 두드리며 요란스레 내린 비 덕분 일까? 동네 길바닥도 하늘 위로 높이 뻗은 가로수들도 사이사이 고개 내민 푸릇푸릇한 풀밭 들도 이름 모를 잡초들도 말끔해져 있고..

뺨으로 코로 입으로 전해지는 공기마저도 왠지 다른 날 보다 더 상큼해진 느낌이다.

그 수박 내음 품은 공기를 깊게 들여 마시며 아침 산책을 나간다.


아이들 미술 시간에 쓰는 파란색 물감을 대책 없이 여기저기 뿌려 놓은 듯한 하늘.

그 파란 하늘 배경 삼은 구름,손가락 하나 들어 콕하고 찔러보고 싶게 몽실 몽실한 하얀 구름도 지금 날씨 맑음을 그려 낸다.

길 건너편 이웃집인 헬가 할머니네 정원은 이제는 때지나 져버린 색색의 튤립 꽃 대신 흐드러지게 핀 보라색 꽃들이 우리를 반긴다.

정원 넘어선 가지마다 줄지어 피어 난 라일락...


우리 집 멍뭉이 나리와 둘이 산책을 나올 때면 헬가 할머니네 집을 끼고 걷는 이 길을 참 좋아한다. 나리에게 이 길은 노다지 길이다. 군데군데 있는 풀밭 사이로 지나다니던 다른 강아지 들의 흔적들이 시간대 별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나리는 마치 아침 신문의 기사 하나라도 놓칠세라 드려다 보는 아버지처럼 고개를 숙인체 꼼꼼히 냄새를 맡는다.


그런 무아지경의 나리를 보며 이 길을 지날 때면.... 나 또한....

모닝커피 들고 현관문 앞에 서서 자기 집 정원을 드려다 보며 "산책 가요?"라고 다정한 인사를 건네 오는 헬가 할머니와 멀찌감치 나마 서로 정겨운 안부를 나눌 수 있어 좋다.

그렇게 몇 걸음 걷다 보면 어느새 머리 위로 연보라색이 알알이 박힌 라일락 꽃이 포도송이 처럼 드리워지는 꽃길이 더없이 아름다워 연신 흥얼흥얼 콧노래가 흘러나온다.

라일락 꽃 향기 마시며...


라일락 꽃 향기 마시며....

라는 첫 소절로 시작되는 노래는 한국에서 학창 시절 친구들과 즐겨 부르던 노래다.

이 노래는 그 시절 우리들의 오빠였지만 지금은 발라드계의 전설 이라 불리는 가수 이문세 님의 가로수 그늘 아래 서면 이다.

우리가 청춘일 때 길을 걸으면 어디선가 들려오던 인기곡 중에 하나다.

그때는 대학가 골목마다 있었던 레코드 가게에서도... 복사된 노래 테이프를 팔던 거리의 노점상 에서도... 버스 기사 아저씨가 틀어 놓으신 라디오 속에서도...흘러 나오던 그야말로 틀면 나오던 노래.. 참 많이도 따라 부르던 노래 중에 하나였는데....


문득...

얼마 전 남편과 함께 재밌게 본 '안녕 나야'라는 드라마가 생각난다.

평소 내가 좋아하는 최강희 배우가 나오는 드라마 여서 보게 되었지만 어느날 17세 이던 내가 미래의 나 ,즉 현재 37세의 나를 찾아온다는 줄거리가 묘하게 관심을 끌었다. 기존의 드라마 나 영화 속 주인공이 과거 또는 미래로 타임슬립 해 가는 내용은 많았다. 그런 익숙한 테마들에 비해 17세 과거의 내가 20년 후인 37세의 나를 만나러 왔다니 신선 하지 않은가?

17세의 나와 37세의 나 두 명의 내가 잠시지만 동시간대에 존재한다는 설정은 그야말로 기발했다.그설정이 조금은 무리스러웠던지 드라마 곳곳에 약간은 억지스러운 장면들도 만들어 냈지만 내겐 충분히 흥미롭고 설득력 있었다.


드라마 속에서 17세의 나는 상상할 수 도 없던 20년 후 미래의 세상 속으로 하늘에서 뚝 하고 떨어지듯 어느 순간 갑자기 투입되었지만 좀 전까지 있었던 20년 전의 세상과 맞닿아 있다.

드라마는 17세 주인공을 통해 20년 전 그 시절의 속어를 담은 말투, 좋아하던 노래 춤, 가수... 간식들.. 그리고 37세의 내가 잊고 있던 추억들을 당연하다는 듯 속속 소환해 내고 있었다.

그 시절 벌써? 아이 둘의 엄마 아빠였던 우리도 어머 맞아 저거라고 하는 것들이 많았는데..

주인공처럼 그 시절 고등학생이었던 사람들에게는 얼마나 많은 향수 돋는 것들을 떠올리게 해 주었을까?


그런데 만약에....

그 어느 날이 내게도 거짓말처럼 찾아온다면.. 궁금해진다.



어느 날 이 익숙한 길모퉁이를 돌아 드라마에서 처럼..

까마득하게 오래 전인 17세의 나와 마주 한다면.. 우린 서로 에게 무슨 말을 건넬까?

다소 내성적이며 말수가 적고 어리숙 하던 17세의 나에게 폭풍 수다가 전문이 된 50세의 나는

"야 세상 만만치 않아 어금니 꽉 물고 눈 크게 뜨고 두 주먹 불끈 쥐고 살아!"라고 말문을 틀까?

어쩌면...

시를 좋아하고.. 친구들과도 말하는 것보다 주로 듣는 편이던... 나이에 비해 차분하던 17세의 나는 목소리 톤부터 달라져 있는 살짝? 배 나오고 잘못 말 걸면 완 빤치 쓰리 강냉이는 너끈해 보이는 지금의 나를 보고 기겁 할런지도 모른다.


마땅치 않게 어리바리 하던 17세의 내게 지금의 내가...

"야 너 그렇게 고상한 척해 봐야 50세 되면 딱 요렇게 된다. 내가 미래의 너야!"라고 한다면....

아마도 17세의 나는 뜨나 감으나 별 차이 없는 눈을 크게 뜨고는 동네에 사라진 지 오래인 공중전화 박스를 찾아 헤맬지도 모른다.

119에 전화를 걸기 위해서 말이다."저기요 여기 좀 아픈 아주머니 한분이 계세요 어떻게 하죠?" 라는 말을 하기 위해....


또 어쩌면 ....

이상형이 딱하나 뭐든 가리지 않고 잘먹는 남자 였던 뭘모르던 17세의 내게 이젠 쪼매 알게된 지금의 내가....엄청난 것이라도 전수해 주듯 속삭 일지도 모른다.

"야 내가 살아 보니까 기왕이면 이상형을 조목 조목 상세히 가져야 가능성이 높다 알았지?"

그리고는 나의 이상형에 자기처럼 안성맞춤인 사람이 어딨냐며 "너는 인생 성공 한거야 !" 라는 남편에게 썩소를 날릴런지 모른다

인생 성공은 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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