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늘게 내리는 비 가랑비다. 유쾌하게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를 들으며 우리말에는 어쩜 비 하나에도 이렇게 만져질 듯한 단어들이 많을까? 하고 다시금 감탄한다. 우린 표현력이 풍부한 요샛말로 갬성 충만한 민족 임에 틀림없다.
나는 입속에서 또로롱 굴러 떨어져 내릴 것 같은 가랑비를 되뇌며 우산을 꺼내 든다.
현관 앞 우산 꽂이 에는 우산도 여러 개다 그런데 우산을 펴보면 죄다 옆으로 기울었거나 우산살이 빠져나온 것들 뿐이다.
괜찮다 찢어지지 않았다면 사용하는 데는 큰 문제가 없다.
특별히 알뜰한 사람이어서가 아니다. 비가 자주 오는 독일에 살고 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우산 쓸 일이 많지 않다 보니 우산을 자주 사지 않게 된다.
왜냐하면 이 동네는 한나절 안에도 흐렸다 비 오다 다시 개는 이랬다 저랬다 변덕스러운 날씨의 날들이 많고 그럼에도 자전거도 타고 강아지 데리고 산책도 가야 하니 우산 대신 비에 덜 젖는 아웃도어 바람막이 점퍼 들을 많이 입고 다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비 오는 날 아침, 길에서는 우리로 보면 등산복 차림으로 출근길에 나선 사람들을 많이 만나게 된다.
몇 가지 필요한 것이 있어 근처에 유일하게 있는 작은 쇼핑센터로 향한다.
아침에 우리 집 멍뭉이 나리와 산책할 때 젖어 아직 마르지 않은 바람막이 점퍼와 운동화는 벗어 두고 들고 다니기 조금 귀찮지만 우산을 쓰기로 한다.
그 덕분에 우산에 부딪쳐 오는 빗방울이 들려주는 투명한 소리는 덤으로 받는다
한국 같으면 주택가 라 해도 집 앞에 슈퍼부터 빵집, 화장품 가게, 등등 크고 작은 상점들이 즐비할 테지만 이 동네 주택가 에는 진짜로 주택만 있다.
이런 단어에 충실한 동네 같으니라고.
평소 장을 보려면 마트가 있는 곳까지 걸어가던가 시내 또는 큰 쇼핑몰까지 자동차로 이동을 해야 한다.
주택가인 우리 동네에서 유일하게 약국부터 옷가게, 마트, 은행 등이 한데 모여 있는 작은 쇼핑센터를 가기 위해 서는 버스 정류장 세정거장을 가야 한다.
30분에 한대 오는 버스를 기다리느니 그냥 걷기로 한다.
걷는걸 워낙 좋아하고 잘하는 운동? 중에 하나이기 때문이다 거기다가 지름길도 있다. 그 지름길을 따라 걷다 보면 적어도 8분은 절약할 수 있다.
지름길이 어디 인가하면...
집에서 한참을 걸어 나와 걷다 보면 우리 동네 마을버스 같은 25번 버스 정류장 이 나온다. 그 길을 걷다 예술이라고 크게 쓰여 있는 건물 (국견이네, 가까이하기엔거시기한당신 )을 돌아 작은 골목을 걸어 나오면 제법 큰 대로변이 나온다. 여기서부터 상점들이 띄엄띄엄 하나둘 눈에 띄기 시작한다. 오른쪽에 터어키 케밥집 왼쪽에 금은방이 나오고 그 길 건너편에 비어 가르텐이 나온다.
길 건너서 사이 골목을 돌아 들어가면 다시 주택가가 나오고 그 주택가 들을 지나고 나면 금요일 아침 이면 동네 장이 서는 장터가 나온다.
그 위쪽으로 올라 가면 작은 쇼핑센터가 보인다.
이렇게 휴가 때 차 안 타고 걸어 다니다 보면 일 할 때는 하루에 6천 걸음 걷기도 힘든데 2만 걸음 찍는 건 일도 아니다.
오늘 쇼핑 목록은 내 떨어져 가는 로션과 남편의 난닝구 되겠다.
며칠 전 남편이 말했다 "내 난닝구가 하나도 없다"
"서랍장에 없어?"라고 묻는 내게 남편은 "방금 봤는데 없어 네가 좀 찾아봐"
했다. 나는 그럴 리가 있나 빨아서 말린 것들은 모두 서랍장에 넣어 두었는데 며칠 새 빨래한 것 들 중에 남편의 난닝구가 없을 리가 없지 않은가?
그런데 진짜 없다. 아 생각해 보니 지난번에 어깨 쪽이 낡은것 옆구리 쪽에 작은 구멍 난 것 들은 모두 버렸다.
내가 우산살 부러진 우산들 버리지 않고 쓰듯 남편은 낡은 난닝구가 찢어질 때까지 입을 셈이었던 거다. 그래서 내가 대신 쓰레기통에 골인시켜 주고 새로 장만해 줘야지 했었는데 깜박했다.
남편은 그동안 몇 개 남지 않은 난닝구를 돌려 입고 있었고 요사이 비가 오는 날이 많았던 터라 빨래도 쉬이 마르지 않아 아직 빨랫걸이에 널려 있는 난닝구 친구들이 보였다.
나는 살짝 덜 마른 남편의 난닝구를 티셔츠 다리듯 다림질해서 말려 주고는 미안한 마음에 한국 다녀온 지가 몇 년 되었다는 것이 이렇게 표가 난다며 중얼거렸다.
여기서 살고 있는 세월이 얼만데...
이럴 때 우린 마치 집 떠나 긴 여행을 나와 있는 것 같다.
그렇다고 우리가 빤스와 난닝구도 없는 동네 사느냐 하면 그건 아니다.
그러나 아무래도 가격 대비 면의 감촉도 다르고 무엇보다 비슷한 키와 몸무게 여도 이 동네 사람들과 생겨 먹은 몸매가 다르다 보니 우리 몸에는 우리 것이 입었을 때 느낌이 더 좋다.
그동안 한국 다니러 갈 때마다 속옷들과 양말은 늘 챙겨 오고는 했었다.
못해도 이삼 년에 한 번은 한국을 다녀왔으니 그것으로 난닝구는 충분했다.
그런데 이번엔 한국에 못 간 지가 벌써 5년이 되어 간다.
병원 개원하고는 너무 바빴고 그다음엔 코로나를 만났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동네에서 남편의 난닝구를 혼자 사러 가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왠지 새삼스러워지는 순간이다.
이 동네에서 남편의 난닝구를 사러 가다니 말이다.
언더웨어라는 영어도 있고 운터 햄트라는 독일어도 있지만 우리에게 난닝구는 그냥 난닝구다.
요즘은 뭐라 부르나 싶어 난닝구를 검색해 보았더니 놀랍게도 난닝구의 사전적 의미로는 러닝셔츠를 속되게 이르는 말이라고 나왔다. 아니 왜?
속되다의 뜻을 찾아보면 제일 처음 언행의 품위가 낮고 천하다 고 나온다.
그니까 왜? 러닝셔츠라는 영어 담은 외래어가 아니어서?
갑자기 국어사전의 사전적 용어 정의는 누가 하는 걸까? 가 몹시 궁금해졌다
몹시 궁금하니 곤란하군(요즘 딸내미와 다시 보는 드라마 도깨비 후유증)
난닝구가 어때서? 우린 그냥 난닝구라고 할겨.
뭐 우린 일단 품위가 없는 걸로..
쇼핑센터 안에서는 때마침 옷가게들 마다 세일을 하고 있었다.
그중 내가 가끔 가는 옷가게로 향했다. 50프로 까지도 세일을 하고 있다 하니 들어가 봐야지.
이곳은 가격 대비 면도 좋은 편이고 엄마 아빠 아이들까지 온 가족 용 옷과 속옷들을 한 번에 골라 살 수 있는 곳이다.
나는 세일 들어간 난닝구들 중에 엑스라지 사이즈로 두 개들이 세 통을 담았다. 한통에 6유로 99 두 개 들었으니 한화로 약 만원 난닝구 한 장에 5천 원 6장에 삼만 원 가격 대비 괜찮다.
그런데 사실 사이즈 라지와 엑스라지 사이에서 살짝 고민했다. 원래 남편은 한국 사이즈로는 100을 입는다. 그래서 라지를 들었다가 요즘 복근? 이 더 풍만해진 남편을 위해 조금 더 넉넉한 사이즈가 났지 않을까?싶어서 엑스라지로 바꿔 들었다.
스몰은 보이지도 않고 미디엄, 라지, 엑스라지, 투엑스라지, 뜨리 엑스라지 이렇게 있었다.
맞겠지? 맞을 거야 조금 크게 입는다고 세금 내는 것도 아니고 작은 것 보다야 큰 게 났지 암만!
안되면 건조기에 한번 넣고 돌려서 줄이지 뭐 !하며 씩씩하게 난닝구가 담긴 통들을 장바구니에 담았다.
남편의 난닝구를 사고 내가 쓰는 로션 담아서 돌아오는 길...밖은 어느새 비가 그쳐 있었다.
다시 걷는 지름길 사이 골목에서 만난 하얀색 나팔꽃 위로 맺힌 빗방울과 빗물에 씻기어진 푸르른 나뭇잎들 만이 조금 전까지 비가 왔음을 말하는 것 같았다.
남편의 새난닝구가 들어 있는 장바구니와 접은 우산을 들고 양팔을 흔들며 집으로 향한다.
이 난닝구가 버릴 때 되기 전에는 한국에 다니러 갈 수 있겠지? 라며 우리 세대 비 오는 날 단골 곡인 비처럼 음 악처럼을 흥얼거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