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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중희 Dec 05. 2021

독일 장례식에서 펑펑 울었다.


남편이 독일에서 가정의 병원을 인수하는 단계부터 함께 일 해 왔다. 이 겨울이 지나면 병원 매니저로 일하게 된 지 어느덧 햇수로 5년 차에 접어든다.

그동안 병원에서 일하면서 수많은 환자들의 생의 마지막을 만났다.

그 마지막 중에 어느 순간도 예상했던 것은 없었다. 아무리 지병이 깊었어도 어제 왕진을 갔던 환자의 시계가 바로 그 밤에 멈출 것이라 짐작하지 못했고 지난주의 병원 진료가 그 환자의 마지막 일 것이라 예상하지 못했다.

병원일을 하며 자주 생각하는 것 중에 하나가 누구나 세상으로 태어나는 시간을 정확히 알 수 없듯 세상을 떠나가는 시간 또한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사람은 언제 멈출지 모르는 각자의 시계를 가지고 태어나는지도 모르겠다.  


짙은 회색 구름 속에 갇힌 것 같이 어둡던 11월 어느 날 우리 병원 환자 이자 남편의 동료인 H의 부고 소식이 병원으로 전해 졌다.

독일은 동네 신문에 부고 페이지가 따로 있다.

신문을 매일 읽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에 대해 개인적으로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그의 부고 소실을 알 수가 있다.

그러나 대부분 가장 먼저 부고 소식을 접하는 곳이 가정의 병원이다.

독일은 주치의 시스템으로 되어 있어 때로는 한 사람의 일생의 건강 기록을 한가정의 병원에 두기도 하기 때문이다.

모든 이의 마지막 소식이 그러하지만 H의 부고 소식은 너무 갑작스러워서 우리에게 충격을 안겨 주었다.

신장내과 전문의로 투석센터와 개인병원에서 30년도 넘게 근무를 했던 H는 평소 건강했던 분이었다.

그런데 올해 초 건강에 이상이 생기기 시작했고 그로 인해 예정보다 일찍 정년퇴직을 맞았다.

그분의 퇴직이 조금 이른 감이 있었으나 이제 까지 다른 이들의 건강을 챙기느라 본인의 건강을 제대로 돌보지 못했으니 이제라도 쉬면서 건강을 다지고 나머지 여생을 여유 있게 보내시리라 생각했었다.

그러나...

햇살이 눈이 부시던 어느 여름날 오후, 보라색 꽃잎 위로 하얀 나비가 아름다이 내려앉던 그 댁 정원에서의 만남이 마지막이 되리라 그 누구도 알지 못했다.


부고 소식을 접한 얼마 후 하얀색의 금색 십자가로 수 놓인 장례식 초대장이 병원에 도착했다.

초대장 에는 금요일 14시 라 적혀 있었다.

금요일 오전 근무를 빠르게 마무리하면서도 마음이 바빴다.

여기도 가까운 사이에는 돈으로 부주를 한다.

어떻게 진행할지에 따라 천차만별이지만 장례비용이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카드에 뭐라도 적어서 봉투에 넣는 것이 통례라 이 갑작스러운 소식에 우리의 마음을 표현할 적당한 문구를 찾는 것이 쉽지 않았다.

독일의 장례문화는 우리처럼 삼일장이니 오일장이니 하는 것이 없다. 그러므로 상갓집이라는 것도 없고 큰 종합병원 들에 장례식장이 따로 마련되어 있지도 않다.물론 문상객에게 식사가 제공되지도 않는다.(장례식 이 끝나고 가까운 사람들끼리 레스토랑으로 식사를 가거나 간단한 커피와 케이크 정도가 제공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니 그를 위해 상조회나 장례지도사의 도움이 따로 필요하지 않다.

장례식이 끝날 때까지 모든 장례에 관한 절차를 장의사에서 맡아한다. 공동묘지에 속해 있는 예배당에서 또는 묘지에서 직접 장례식이 끝이 날 때까지 말이다. 그러므로 때에 따라 장례식까지 몇 주간이 걸릴지 모르고 그에 따른 비용이 많이 든다.

지인이라 해도 상갓집에서 밤을 새울 일도 없고 문상객들 에게 육개장을 날라 드릴 일도 없지만 카드에 한 자 한 자 담는 위로의 메시지는 부조금만큼 중요하다.


독일에서 30년 가까이 살며 실로 처음 가는 지인의 장례식이었다.

그동안 아이들 키우느라 종종 있었던 장례식에는 남편이 혼자 참석했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함께 가기로 했다. 부고 소식을 들은 것도 얼마 되지 않았기에 막상 장례식에 가려니 마음의 준비가 필요했다.

친구들 모임에서 독일 장례 절차의 요모조모를 얻어 듣던 것과 막상 내가 잘 알던 사람의 장례식에 직접 가는 것은 느낌부터가 아주 많이 달랐기 때문이다.


장례식이 진행되는 곳은 H가 사셨던 동네의 공동묘지였다.

공동묘지 안에는 작은 예배당처럼 생긴 곳이 있었다.

문 앞에서는 상주들이나 유가족이 아닌 장의사에서 나온 분들이 조문객 들을 안내하고 있었다. 마스크를 쓰고 나뉘어 앉은 곳은 온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곳이었다. 난방이 되지 않는 임시로 만든 예배당 같던 내부는 썰렁하기 그지없었다.

뒤쪽으로 난 문으로 사람들은 오는 대로 띄엄띄엄 나뉘어 앉았고 앞쪽에 활짝 열린 문 밖으로 묘지가 보였다.

묘지가 보이는 앞 쪽문 맨 앞에 여러 개의 촛불이 화환처럼 동그랗게 켜져 있고 그 가운데 도자기로 만든 항아리 같이 생긴 것이 하나 얹어져 있었다. 고인을 모신 유골함이었다.

그리고 그 옆과 밑으로 화환과 크고 작은 꽃다발들이 어여쁘게 놓여 있었다.

하얀색 국화도 노란색 국화도 아닌 화려한 색색의 꽃들...

장례식이라는 것을 모르고 보았다면 누군가의 정원에 예쁘게 꾸며진 티테이블이라고 착각했을는지도 모른다.

촛불 옆으로 단상 하나와 피아노 한대가 있었고 그 건너편으로 상주를 비롯한 유가족들이 앉아 있었다.

그곳은 고인과 가장 가까운 자리 장례식 의식을 거행할 목사님의 단상과 마주 보이는 곳이었다.

우리처럼 누가 보아도 상주임을 알리는 그 어떤 복식도 표시도 없었지만 모두가 알 수 있도록 말이다.


목사님이 장례예배를 시작했다. 예식에 맞춰 목사님의 기도와 중간중간에 성경 구절들이 나오고 피아노에 앉은 아주머니의 반주에 맞춰 찬양을 했다. 그 노래 가락이 너무 담담해 구슬펐다.

찬양이 끝나자 목사님은 고인의 일생을 훑어 내리듯 태어난 해부터 돌아가신 날까지의 필모그래피를 주르륵 읽어 주시며 왜 그분이 이렇게 일찍 우리 곁을 떠나야 했는지 우리는 아직 받아들이지 못한다고 했다.

 목에서 울컥 하기는 했지만 눈물이 흘러내리지는 않았다.

그리고 목사님은 사전에 인터뷰라도 하셨던 것처럼 고인의 첫사랑 이자 아내인 분을 어떻게 만났고 결혼했고 어떤 가정을 꾸려 갔는지 이야기하실 때는 나도 모르게 살며시 미소까지 머금게 되었다.

그런데...

고인의 따님이 직접 쓰고 녹음했다는 편지와 노래를 목사님이 디제잉하듯 틀어 주시고 나서부터 눈물을 참을 수 없게 되어 버렸다.

따님은 차분하지만 아픔이 그대로 고여 있는 목소리로 아빠와의 어린 시절을 들려주었다.

생애 처음 그네를 탔을 때 자전거를 배웠을 때 아빠가 어떻게 곁에 있어 주었는지 초등학교 입학을 해서 글씨를 배우던 때 아빠가 얼마나 기뻐해 주었는지... 어른이 되어 자기 길을 찾았을 때 아빠가 어떤 미소로 든든하게 지원 군이 되어 주었던지... 마치 앨범을 한 장 한 장 넘기듯 소복이 들어찬 아빠와의 추억을 그 따님은 편지와 노래로 풀어내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고 또 닦았다. 여기저기서 훌쩍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차분하던 음색이 흔들리기 시작한 건 편지가 끝을 맺기 직전이었다.

그동안 일만 열심히 하던 아빠가 정년퇴직 후의 자유 시간을 누리지도 못하고 너무 일찍 우리 곁을 떠나 버려서 너무 가엾고 슬프다. 먼저 하늘나라에 가 있던 오빠를 아빠가 지금 만나고 있는지... 아빠의 햇살 같은 딸내미가 엄마를 꼭 잘 지키고 있다가 언젠가 그곳에 가서 온 가족이 함께 하자는 대목에서 그곳에 모인 모두가 소리 없이 통곡했다.


따님이 미리 녹음해 둔 편지 낭독이 그렇게 끝나고 목사님은 장례예배를 마무리했다. 장의사들이 유골함을 들어 고인을 모시고 목사님과 유족들을 선두로 한 줄이 되어 묘지로 나갔다.

고인이 안치될 곳에 잔디 같은 초록의 색 망 같은 것 안으로 장의사들이 고인을 모신 유골함을 넣고 유족에게 고개 숙여 인사를 한 후에 그 자리를 떠났다.

그 뒤에 목사님의 기도와 고인과의 마지막 인사를 하시라는 말씀 후에 상주와 유족들 그리고 친지와 동료들과 지인들이 차례로 고인과 마지막 인사를 나누었다.

그때까지도 따님의 편지로 눈물이 멎지 않고 있던 나는 마지막 인사를 하기 위해 줄을 섰다.

안에서는 제법 사람들이 많은 것 같았는데...

마지막 인사를 하기 위해 줄을 서고 보니 그리 많지 않아 보였다.

우리 차례는 금세 돌아왔다.

고인을 모셨던 유골함은 이미 보이지 않았고 흙과 꽃잎들이 소복이 들어앉아 있었다. 마치 이제 자연으로 돌아가련다 라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

향긋한 냄새가 날 것 같은 빨간색, 핑크색, 흰색, 등의 꽃잎들이 가득 들어 있던 하얀 그릇에서 나는 한주먹의 꽃잎을 그 안으로 비처럼 내리며 그분과의 마지막 인사를 했고 남편은 작은 삽이 꽂혀 있는 흙 통에서 흙 한삽을 그 위에 넣으며 그분과의 마지막 인사를 나누었다.

30년이 넘게 의사로 일했던 지인 과의 마지막 이별 인사는 그렇게 끝이 났다.


돌아오는 길.. 마음이 복잡했다. 이 동네에서 태어나 60 평생을 이곳에서 살고 친지도 친구도 동료도 지인도 환자들도 모두 이 동네에 있던 동료의 장례식이었다.

그러니 참석할 사람들은 모두 왔을 터였다 그런데도 장례식 내내 자꾸만 휑하니 허무하다 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그분이 퇴직하기 전에 병원이 얼마나 바쁘게 돌아갔는지... 살아생전 어떻게 환자들을 대해 왔고 진료해 왔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어서였는지 모르겠다.


문득 마음속 깊은 곳에서 우리의 마지막 이별의 시간은 어디에서?라는 물음이 묵직하게 올라왔다.

누구에게나 언젠가는 찾아 올 마지막.. 그 시간이....

일가친지도 없이 홀로 남의 나라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도 언제 가는 찾아올 시간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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