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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중희 Feb 28. 2022

독일 벙커에서 만났던 전쟁의 흔적.

2차 세계대전 당시 사용된 벙커를 가 보았다.


며칠 전 러시아와 우크라이나가 심상치 않다는 기사들과 뉴스 보도 들이 쏟아지고 었다.

기사 내용을 보며 우리가 살고 있는 유럽 내에서의 일이라 좀 더 심각하게 생각하는 것이 아닐까? 했었다.

그런데 진짜 전쟁이 일어났다.


자고 일어나니 미사일이 어느 집 마당에 떨어지고 총소리가 들려오는 전쟁이 설마 일어 나리라고는 정말 상상도 하지 못했다.

로봇 청소기가 거실 청소를 하고 AI  날씨를 알려주고 요구하는 맞춤 음악을 틀어  전기 자동차가 돌아다니는 이 시대에 말이다.


아직 우리의 부모님 세대 또는 조부모님 세대 중에 6.25를 겪었던 분들이 살아 계신

독일의 80대 90대 노인들 중에2차 대전을 겪고 기억하는 분들이 아직 계신

우린 그분 들을 전쟁 세대 라 말한다.


한국에서 학생이던 1980년대 똑똑히 기억나는 어느 날이 있다.

어느 날 민방위 훈련 때나 들려오던 공습경보 사이렌 소리가 동네를 날카롭게 관통하며 어디선가 이것은 실제 상황입니다 라는 방송 소리가 들려왔다.

그 순간 당황하며 낯빛이 하얗게 질리시던 아버지의

표정지금도 기억한다.

우리는 말로만 들었던 6.25를 아버지는 직접 겪으셨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6.25 때 중학생 이셨다고 했다.

그때 당시 편찮으셨던 증조할머니를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들것을 만들어 모시고 피난길에 올랐다 했다

사방에서 총성이 들리고 포탄이 터지던  

 피난길이 얼마나 힘들고 고통스러웠겠는가

그렇게 전쟁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순간에 터져 수많은 사람들을 죽음과 고통으로 몰고 갔고 매 순간 극한 두려움과 절망을 안겨주며 불행한 역사의 한페이를 써내려 갔다.


문득 몇 년 전 방문했던 2차 대전 당시 사용되었던 벙커를 다녀온 일이 떠올랐다.

지금 우크라이나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이 하루빨리 종식되기를 바라며 2016년 8월 에 썼던 글을 조금 수정해서 올려 봅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벙커 안에서

독일에서는 여름 이 되면 유치원, 학교 , 직장에서 또는 각종 모임에서 다채로운

sommer fest 서머 파티들을 한다.

그 서머 파티들의 내용은 주최되는 곳과 구성 원에 따라 해마다 다를 수도 같을 수도 있는데

그것이 그릴 파티가 될 수도 있고 산책 겸 피크닉 일 경우도 있고 운동회 형식 이 될 수도 있으며

음악회 나 연극을 보러 가는 것일 수도 있다.


얼마 전 남편의 직장 동료 들과 가족 동반 단합 대회 겸

서머 파티를 하기로 했는데 편안한 신발과 가벼운 옷차림으로 만나 기로 했다는 거다.

그런데 어디로 가는지 무엇을 하는지는 비밀이라는 거다.

주관한 사람만 알고 있는 서프라이즈 서머 파티 라나?


그래서 나는"아 이번에는 어디 산책을 가나 보다" 하고 산행할 때 신는 신발을 꺼내 신고 막내와 함께

남편을 따라나섰다.

이 동네에서 산책이라 하면 말이 산책이지 산속의 숲을 2시간 정도는 너끈이 걷는 산행 일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어디 산으로 가겠지 싶어 얇은 잠바까지 챙겨 들고 파티를 주관한 인솔자를 따라 장소에 도착해 보니

우리 집에서 가까운 곳에 있는 2차 세계대전 당시 사용되었다는 벙커 앞이었다.


순간 이 안에서 뭘 하려는 거지? 하는 생각이 들기는 했지만 누군 가를 잠시 기다려야 한다는

이야기에 남편을 따라 이 사람 저 사람과 인사를 나누었다.

익히 알고 있는 사람들도 있었고 처음 보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반가이 인사를 나누며 이야기하고 있는데 서있는데 사람들 사이를 뚫고 어디선가 낯선 차 한 대가 터프하게 멈춰 섰다.

그리고 는...


일반인 주차 금지 구역에 지네 집 앞에 차를 대듯 주차를 한 차 안에서 어디서 일 하다 온 듯

작업복 차림의 날렵해 보이는 남자가 내렸다.

그 남자는 파티를 주관했던 남편의 동료와 인사를 나누고 손에 든 여러 개의 열쇠로  

굳게 잠겨 있던 벙커의 문을 열더니 우리를 그 안으로 안내했다.

이유를 몰라 눈만 껌뻑이며 서있던 사람 들은 파티 주관자인 남편 동료의 "자 갑시다 "라는 말을 신호 삼아

얼떨결에 그의 뒤를 따랐다.


어두침침한 입구에 들어 서니 환하던 밖과는 다른 세상 같았다. 작업복 차림의 남자가 앞쪽으로 비추어 주는 커다란 손전등 하나에 간신히 의지해 칡흑같이 어두운 곳을 사람들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더듬더듬 걸어 나갈 수밖에 없었다.

어느 순간 영화에서처럼 어디선가 박쥐가 날아든다 해도 어색하지 않을 것 같은 빛이 단절된 동굴 같은 느낌이었다.


앞에서 손전등으로 길을 비춰 주던 남자 가 벙커 안의 전기를 켜니 아까 보다는 훨씬 밝아져 서로의 얼굴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렇게 서서 사람들은 서프라이즈 서머 파티가 시작되기를 기다 렸다.


작업복 차림의 남자는 진중한 목소리로 우선 자기소개를 하기 시작했다.

소방관이며 이곳 벙커를 관리하는 대장이고 조난 또는 위기 상황에 쳐해 있는 사람들을 구조하는 구조 대원으로 일하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오늘 우리의 이곳 벙커 안내를 맡았다고 했다.

작업복 차림의 남자에서 안내자가 되는 순간이었다.


연이어 이어지는 그의 설명으로 우리가 서 있는 2차 세계대전 때 벙커로 이용되었던

이곳은 평상시 밖에서 지나다니며 보던 것보다 훨씬 복잡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한마디로 이곳에서 길을 잃으면 혼자 서는 나갈 방법이 없다는 거다


안 그래도 급 오싹해분위기에서 안내자는 예전에 혼자 벙커 안을  

순찰하다가 갑자기 그 안이 정전이 되었는데 손전등도 없고 핸디도 배터리가 바닥난 상태 여서

연락도 할 수 없고 어디가 어딘지 알 수 없는 칠흑 같이 어두운 벙커 안에서

혼자 언제 올지 모르는 누군가에 의해 구출되기 만을 기다리며 갇혀 있었다고 했다.


그날의 5시간이 본인 인생에 가장 긴 기다림 이였노라 담담히 이야기하던 안내자는

그때 이후로는 벙커에 올 때면 언제나 습관처럼 주머니 많은 작업복에 손전등 3개와 배터리 꽉 찬 핸디 두 개를 넣고 들고 다닌다고 했다.  

오 마이 갓뜨...

나는 저만치에 서있던 남편에게

무언의 눈빛으로 "이게 서머 파티? 공포 체험 아니?"라는 의미로 쳐다보았고

어둠 속에서도 내 째림을 기막히게 알아들은 남편은

"나도 몰랐음"이라는 눈빛을 되돌렸다.



그때부터 나는 이 더운 날씨에 벙커 안이 추워서가 아니라 무서워서 벌벌 떨면서도

길 잃어버리면 여기서 못 나간다 라는 생각 하나로 막내의 손을 움켜 잡고 안내자의 등 뒤에 딱 붙어

일 순위로 서서 졸졸 따라다녔다.

그렇게 한참을 어둡고 좁은 긴 통로들을 지나 안내자가 멈춰 선 곳에서 우리는  

흑백의 사진들을 만났다.   


2차 세계 대전 당시 군수물품 공장이 있었던 이곳 카셀은 1차 폭격 대상지였다고 한다.

그래서 중세 시대 유럽에서 가장 아름 다운 도시 중에 하나였다는 카셀은 독일에서 옛날 건물이 별로 남아 있지 않은 도시 중에 하나가 되었다.

폭격 이 쏟아지고 몇 분 사이에 무너져 내린 시가지와 댐 등의 사진 에는 형태를 알아볼 수 없는

도시의 처절함 만이 담겨 있었다.

단지 그 옆의 온전한 모습의 사진 들 만이 예전에는 이런 모습이었을

것이라는 추하게 해 줄 뿐....



우리는 너나 할 것 없이 안내자를 놓칠 새라 부지런히 그의 뒤를 따랐고 벙커 안 구석구석을 돌아보았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사용했다는 전화기 무전기는 흡사 얼마 전까지 사용되었다 해도 믿을 수 있게 잘 보존되어 있었다.

어른 기준 천명이 넘게 들어갔다는 벙커 안은 좁고 햇빛 한 줄 들어오지 않는 어두운 공간이었다.

그곳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공포의 시간을 숨 죽이며 보냈을지 짐작해 내기 어렵지 않았다.


안내자는 이곳 벙커를 관리하고 이렇게 어느 직장 단체 팀 또는 어느 모임의 단체 팀들에게

벙커 안내를 하며 간혹 가다 전쟁 당시 실제로 이곳에서 살았던 사람들을 만나기도 했다고

했다.


그중 하나.. 어느 단체팀에 안내를 맡아하고 있는데 그 팀에 한분이던 할아버지가 말없이 서서 눈물만 뚝뚝 흘리고 계시 더 란다.

그래서 안내자가 무슨 일이냐고 물었더니

"이곳에서... 4살 이었던 내가 바로 여기에서..." 라며 말을 잇지 못하더란다.

그렇게 할아버지는 너무나 참혹해서 잊을 수 없었던 그 당시의 이야기를 묵묵히 들려 주시 더라고 했다.


그 당시 4살이던 할아버지는 평소와 다르지 않던 어느 날 집에서 할머니와 함께 일나 간 엄마 아빠가 퇴근 하기 만을 기다리며 놀고 있었다.

갑자기 시작된 폭격으로 4살 아이는 할머니 손에 이끌려 어딘 줄도 모르는 곳으로 오게 되고 그곳이 이곳 벙커였다.

벙커로 들어오게 된 그날 이후 퇴근해서 곧 만나러 온다던 엄마 아빠는 더 이상 볼 수 없었다고 한다.


또 벙커 에는 폭격을 피해 살아야 한다는 이유 하나로 모여든 수많은 사람들이

앉아 있기에도 턱없이 부족한 좁은 공간이어서 심지어는 자기의 배설물 위에 앉아

있어야 했던 사람들도 있었고 그곳에서 아이를 출산할 수밖에 없던 아주머니도 있었다 했다.

그야말로 아비규환 자체였다고 한다.


무엇보다도 폭격이 벙커를 지날 때면 벙커 전체가 무너져 내릴 듯돌며 그 순간 모든 것이 어디론 가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착각 이 들 만큼의 큰 흔들림 이였다고 한다.

그 당시 어린아이였던 할아버지 가 받았던 그 공포는 살면서 단 한 번도 잊을 수가 없었다고 한다.


벙커 안 곳곳의 안내와 설명을 맞히고 난 후 안내자는 마무리 인사를 나누며 이렇게 이야기했다.

"사람들이 내게 종종 왜 자기 시간 들여 이 음산한 벙커 안에서 이렇게 열심히 설명해 주며 안내하는

일을 하고 있느냐?" 묻고는 합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이렇게 답합니다."내가 이 벙커 안에서 스쳐 지나가 듯 만나게 된 전쟁의 불행을 겪고 살아남은 증인들의 잊을 수 없는 증언 들과 곳곳에 흩어져 있던 그때의 자료들을 모으며 전쟁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끔찍한 불행으로 몰고 갔는 가를 똑똑히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을 잊지 않고 전하는 일 만이 전쟁으로 씐 불행한 역사가 되풀이되지 않게 하는 지금 내가 당장 할 수 있는 작은 일 중에 하나예요. 그래서 나는 오늘도 이일을 합니다 "

우리는 한동안 손뼉 치는 것도 잊은 체 숙연해지고 있었다.


못 빠져나올 까 봐 전전긍긍 떨었던 벙커 안에서 무사히 밖으로 나오고 난 우리는

안내자의 생생한 설명 덕분에 마치 전쟁 그 급박하던 그날 그 순간에 서 있다 빠져나온 듯한

아득한 느낌마저 들어 서로 할 말을 잃고 있었다.

아까 까지만 해도 뭔 놈의 서머 파티를 이런 살벌하고 음산한 곳에서 소름 돋아 가며 하나

라고 생각했던 나는 의미 있고 시원한 서머 파티를 해보려 했다는

파티 주관자인 남편 동료에게 박수를 보냈다.


평소에 그 앞을 지나다니면서 그냥 전철역으로 또는 동네 한 귀퉁이로만 기억하고 지내던 바인베억 벙커는 이제 우리에게 수많은 사람들의 신음과 공포와 눈물 이 가득했던 곳으로 선명이 남았다

다시는 일어나지 말아야 할 전쟁... 세월 로도 지울 수 없는

그 역사의 흔적으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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