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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중희 Mar 16. 2023

개량 한복의 배신


입은 삐뚤어져도 말은 바로 한다고 따지고 보면 개량한복은 죄가 없다.

한국에서 데려 오던 그때나 지금이나 어여쁜 때깔과 자태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변한 게 있다면 내 몸이 문제지 이아이는 죄가 없다

그러나 분명 시장 한복집 아줌마는 이렇게 이야기하셨더랬다.

"이 눔은 완싸이즈 쁘리싸이즈라 엔간하면 다 입어요"


대망의 한국요리강습이 시작되었다.내게 있어 한복은 갑옷 같은 존재다.

언제나 독일에서 특별한 날 한복을 입고는 했다

남편이 박사학위를 받던 날도 아이가 대학을 졸업하던 날도 곱게 다린 한복을 입고 있었다.

그리고 한국을 알리는 특별한 문화 행사 때 에도 한복을 입었다.

또 요리강습을 하면서도 자주 한복을 입었다.

이번 첫 강습은 오랜 기다림을 지나 다시 시작하는 날이니 더군다나 한복을 입어야 했다.

망설일 것 없이 나는 힘차게 옷장 문을 열어 젖 혔다.


내게 한복은 일할 때 입는 작업복 이자 특별한 날을 위한 드레스 다.

때문에 색감 다른 세벌의 전통한복과 네 벌의 개량한복이 있다.

옷장 문을 열면 한쪽 칸에는 한복들만 줄지어 걸어둔 곳이 따로 있을 만큼 넉넉히 가지고 있는 편이다.


그런데 세월 따라 체형이 변하면서 입을 수 있는 한복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는 것이 문제다.

전에 썼던 글에도 나오지만..(줌으로 진행된 아들의 대학 졸업식)

한복은 결코 넉넉한 옷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날은 다시 시작하는 요리강습의 오프닝인데 어떤 한복을 입어야 하나 한참을 고민했다.

게다가 밖에는 내리던 눈비가 어느새 눈이 되어 쌓여 가고 있었다.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한복은 사극에나 나올법한 연두색 당의가 있는 한복이다.

색감도 이쁘고 우아하지만 옛날 옛적 것이라 소매 끝동과 중앙에 박힌 금박이 눈이 부시게 현란하다

문제는 금박이 가끔 묻어난다는 건데 요리하다 금박이 떨어지거나 묻어나면 안 되니 이건 아쉽지만 일찌감치 통과…

그다음은 빨간 치마에 초록 저고리 마치 새색시 같은 한복이다.

그야말로 저고리 고름에 동정까지 다 달린 진짜 전통 한복이다 꽉 것이 분명한 저고리 품도 문제이지만 치마 기장이 길고 샬랄라 해서 내 짧은 다리로는 힐을 신어야 그나마 치마로 땅바닥 쓸고 다니는 것을 면한다.

그런데 강습 시간 4시간에 준비 시간과 정리 시간 합치면 5시간 넘는데 그동안 서서 움직여야 하는 요리 강습에 힐을 신고는 그만 자신이 없었다. 발이 불편하면 모든 움직임이 불편해지기 때문이다.


내가 일하고 있는 문화센터는 2층 전체가 요리강습을 위한 공간이다.

2층 복도 에는 남녀 화장실이 있고 그 복도 지나서 문을 열면 커다란 실습 주방이 나오고 그 중간 옆쪽으로는 이론수업과 식사를 할 수 있는 식당 이 있다. 그리고 문 앞쪽에 강사들을 위한 작은방 이 있다.

공간이 넓고 툭 틔여 있어서 옷을 갈아입을 곳이 없다.

그래서 한복을 집에서부터 입고 가야 한다.

눈이 오다 녹으면 땅이 질퍽해 질터인데 치마 기장이 긴 것들은 전에 아들 졸업식 때 입고 개고생? 한 개량 한복과 전통 한복들은 모두 통과...

이렇게 저렇게 이런저런 이유로 덜어 내다 보니 남은 건 달랑 여름에 입던 개량한복 두벌이다.


조금 얇기는 하지만 실내가 따뜻하고 움직임이 많다 보니 괜찮을 것 같았다.

분홍 저고리에 옥색 치마를 골랐다. 옥색 치마는 기장도 짧고 고무줄이라 편안했고 속치마가 달려 있어 따로 챙겨 입을 필요가 없어 더 간단했다.

저고리도 지난번에 입었던 진달래색 저고리 보다 훨씬 품이 넉넉했다.

매듭으로 만들어진 단추들도 다 잘 잠겼다.

오늘은 이걸로 선택이다.


분홍색 저고리 안에 깔끔하게 운동할 때 입는 흰색 탑을 입을까? 하다가 여름옷이라 얇아 살짝살짝 비치니 한복 시스루 패숑 될까 봐 무리하지 않기로 했다.

검은색 짧은 반팔 티셔츠를 받쳐 입고 분홍 저고리에 옥색 치마 입고 패딩을 위에 입었다.

잘 드는 칼 챙겨 넣고 빨간 앞치마 챙기니 전투 준비 끝이다.


바리바리 들고 문화센터에 도착하니 4시 45분 사무실 안에는 사람들이 가득했다. 직원들과 다른 요리 강습 강사 들 몇몇이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오랜만에 만난 사람들과 반가운 인사를 나누는데 모두들 한복 이쁘다고 한호 해주니 기분이 더 업되고 어깨가 으쓱해졌다.

서류 쓸 것 쓰고 강습에 참여할 수강생 명단과 열쇠를 받아 강습실 올라가니 5시였다.

그 시간부터 본격 적인 강습 준비에 들어갔다.

개량한복이다 보니 움직임도  편안하고 미리 이것저것 준비해 두어야 강습하는 시간에 내가 여유를 가질  있어서 크고 작은 것들을 준비하고 있는 동안 수강생들이 하나  모여들기 시작했다.

이번달 세 번의 강습 중에 그날의 강습이 젊은이들 우리로 하면 MZ 세대들이 가장 많이 포함된 강습이었다.

그 덕분에 강습 내내 리엑션과 텐션도 가장 좋았고 분위기도 즐거웠다.

바로 그게 문제였다.


원래 강습 중에는 챙겨야 할 사항들이 많아 뭘 많이 먹지 않는 편인데 그날은 분위기가 너무 좋다 보니

덩달아 신이 나서 함께 한참을 먹었다.

대부분이 젊은 친구들이라 눈치껏 따라 하는 센스도 남달랐고 손놀림도 빨라 순식간에 만두를 만들고 구웠다.

마치 설날 큰집에 가족들 모여서 만두 빚어 먹듯이 그런 분위기 속에서 젊은 이들의 톡톡 튀는 텐션이 더해져서 파튀가 따로 없었다.


문제는 그로 인해 간신히 딱 맞았던 개량한복의 저고리가 점점 벌어지기 시작했다는 거다.

처음엔, 몰랐다.

내가 계속 내 배만 내려다 보고 있던 것도 아니고 앞치마까지 두르고 있어 모르고 있었는데...

그날 수강생 중에 제일 막내였던 18살짜리 여자 아이가 웃음을 참지 못하고 푸풉 해버렸다.

나이도 십팔살인 그 아이가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내 배 쪽을 보고 웃음을 참지 못해 고개를 숙인 것을 나는 감지 하고야 말았다.

황급히 내려다본 분홍색 저고리는 위아래 단추 사이로 검은색 티셔츠가 보이며 숫자 8자를 그리고 있었다.

움직임에 따라 보였다 말았다 하는것이 마치 언젠가 티브이에서 보았던 응원단들의 카드색션 같았다.

간신히 맞았던 저고리가 든든히 먹은 뱃살의 부피를 이기지 못하고 그렇게 까꿍 놀이를 하고 있었다.

가끔 독일 아재들 중에 맥주배라고 일컫는 둥근 배를 가진 이들의 간신히 잠긴 남방의 단추가 터질 듯 애처롭게 매달린 모습을 보고는 했는데...

아스라이 달려 있는 분홍색 매듭단추가 내가 움직일 때마다 옆으로 벌어졌다 닫혔다를 반복하고 있었다.

된쟝... 쪽팔린다...


그러나 나이 들어가며 좋은 건 어떤 상황에서도 예전보다 여유가 생긴다는 거다.

몸의 지평이 넓어지면서 더 업그레이드된 여유는 예전 같으면 볼 빨간 아줌마가 되었을 것을 이젠 말짱한 얼굴로 너스레를 떨 배짱과 빤빤함을 선사한다.

나는 웃으며 수강생들에게 말했다.

"다시 한번 내가 입은 옷을 소개하자면 이건 요리하기 편하게 만들어진 퓨전 한복이야

예전에는 넉넉해서 훌렁훌렁했는데 해마다 살이 찌다 보니 이젠 이렇게 꽉 맞지 뭐야

그래도 아직 입고 버틸 만 해!"

나의 너스레에 참고 있었던 다른 수강생 들도 모두가 시원하게 빵빵 터져 가며 웃었다.

어쩌겠는가.. 이미 나온 배는 어찌할 수 없고 꽃개나 가재 처럼 옆으로 걸을수도 없고 옷을 늘릴 수도 없으니 재밌게 마무리하는 수밖에...

그 순간에도 아까 흰색 탑을 입고 오지 않은 게 월매나 다행인가 하는 생각을 했다.

그랬다면 검은색 숫자 8일 아니라 살색 숫자 8일 뻔했으니 말이다.

시장 한복점에서 이 한복 살 때 아주마이가 말씀하셨던 것이 다시 한번 떠올랐다.

"엔간 하면 다 맞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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