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네가 늦었는데 왜 내가 돈을 더 내야 해?
“너네가 늦었는데 왜 내가 돈을 더 내야 하는데?”라며 악다구니를 쓰던 아주머니는 그럼에도 묵묵부답인 직원들을 향해 삿대질을 하며”이런 고약한 독일 철도 같으니라고!"라고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는 뒤돌아 가며 뭐라 뭐라 그 나라 말로 욕을 하는 것 같았다.
어느 토요일 이른 아침이었다.
집에 온 지 며칠 되지 않은 딸내미는 개학시기에 맞춰 다시 떠나야 했다
이번엔 이사까지 겹쳐서 서둘러 가야 한다
기차 출발 시간은 아침 7시 25분
집에서 역으로 6시 40분에는 떠나야 하니 아침을 먹기는 너무 이른 시간이라
물만 마시고 이불까지 들어 있는 가방들 자동차에 가득 실고 역으로 출발했다.
얼굴 본 지 며칠 되지도 않았고 따뜻한 엄마밥 몇 끼 먹이지도 못했건만..
시간은 언제나 그러하듯 날듯이 흘러갔고 집에 왔을 때 보다 더 많은 짐을 바리바리
들고 혼자 기차를 타야 한다.
독일에서 집을 계약하고 이사를 들어갈 때는 보통 그 공간이 텅텅 비어 있는 경우가 많다
그전의 세입자가 두고 가겠다고 또는 팔겠다고 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말이다
그러니 집안에는 맨바닥 빼고는 아무것도 없다고 봐야 한다
주방은커녕 전구도 없는 집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이사 란 어디서건 마찬가지 이겠으나 준비할 것들이 많다.
더군다나 우리 애는 지금까지 학생 기숙사에서 살다가 일 년 가까이 교환 학생으로 한국에서 살다 왔기 때문에 가지고 있던 가구도 별로 없었고 그나마 있던 것은 친구들에게 줄 것 주고 팔 것 팔고 해서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아니다 딱 하나 남은 것은 있었다
전에 살던 집에 오븐이 없어서 우리가 사준 전자렌인지가 하나 있었는데 그건 친구 집에 맡겨둔 터였다.
어쨌거나 다행히 지금 이사하는 집은 전기 레인지와 작은 주방은 있어서 일단 가서 뭔가 끓여 먹을 수는 있을 것 같아 보였다.
그런데 공부할 책상은커녕 당장 들어가서 잘 침대조차 없다는 게 문제였다.
방바닥에 불이 들어오지 않는 집이 대부분인 독일에서 맨바닥에 잔다는 것은 모험이다.
바닥에서 올라오는 냉기가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딸내미는 집에 오자마자 중고 침대를 미리 인터넷으로 사 두었고 도착해서는 매트리스를 사러 가기로 했다
그러면 최소한 맨바닥에서 자는 것을 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한국과는 다르게 독일에서는 당일 배송 이란 게 없다.
작년여름에 한국 갔다가 어머니 댁에 에어컨이 고장 나서 우리가 바꿔 드렸는데
그날로 배송 설치가 다 돼서 너무 감사하고 놀랐던 기억이 난다.
전자제품이던 가구던 독일에서 배달 신청을 하면 운이 좋으면 일주일에서 열흘 보통은 2주가 걸린다.
그러니 급하게 가구나 전자제품이 필요한 사람들은 대부분 큰 차를 빌려서 직접 운반한다.
딸내미도 도착하면 빌려놓은 차를 타고 가구들을 직접 픽업해서 조립해야 한다
다행히 도와주기로 한 친구들이 대기 중이지만 같이 가서 도와주고 싶은 마음을
추스르느라 애를 먹어야 했다
새벽같이 일어나 잊어버린 것은 없는지 꼼꼼히 체크하고 딸내미를 역에 데려다주었다.
이른 아침 기차역 플랫폼은 차가운 바람이 불어왔다.
아이의 얇은 가죽잠바 사이로 찬바람이 들어갈 것 같아 두 개나 껴 입고 온 내 겉옷을 기차 올 때까지만 걸치고 있겠느냐 물었다
그러나 자기만의 패숑이 있는 청춘인지라 아이는 울 엄마 또 시작이네 하는 표정으로
"안 춥다고!"라며 어깨를 움츠렸다
그런 아이를 보며 내 입에서는..
"흐미 모양내다 얼어 죽겄네 그러게 따뜻하게 좀 입고 다니라니까!"로 시작해서 "그려 니 패숑이니 니맴대로 혀!”
로 끝나는 엄마표 잔소리 속사포가 자동으로 날아갔다.
그렇게 다 큰 딸내미와 티카타카 하며 기차를 기다리고 있는데 이놈의 기차가 시간이 돼도 도통 올생각을 하지 않는 거다.
그러다 어느 순간 20분 연착할 것이라는 안내방송이 나오며 플랫폼 전광판에 연착된 시간이 원래 출발 시간 바로 밑으로 띄워졌다.
그래 그럴 줄 알았어 라며 우리는 그 20분 동안 짐들을 들고 위로 올라가서 따듯한 빵가게에서 아이가
기차 안에서 먹을 빵이라도 사야겠다 싶었다.
원래 독일 기차가 제때 오지 않는 건 너무 흔한 일이라 이상할 게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중앙 게시판 근처 빵가게에 줄을 서며 다시 한번 시간 확인을 하다 우리는 그만 벙찌고
말았다
좀 전 까지도 보였던 딸내미가 타야 하는 기차가 전광판에서 깜쪽 같이 사라져 있는 게 아닌가
출발 시간 기차종류 구간경로 플랫폼번호 순으로 떠 있던 것이 그어디에도 보이질 않았다
아직 오지도 않은 기차가 마치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뭔가 이상하다.아주 많이...
아이는 급하게 핸드폰앱으로 시간 확인에 들어갔고 나는 역 중앙에 있는 인포메이션 스테이지 쪽으로 서성였다.
딸내미가 확인한 앱에는 캔슬이라고 나온다 했다. 아니 무슨 기차가 있다가 없어지냐고.. 그럼 오다 말았다는 거야?
독일 철도 도이치 반 직원들이 나와 있는 인포메이션 스테이지에는 벌써 많은 사람들이 서성이고 있었다.
우리도 합류해서 순서를 기다리고 있는데 옆 쪽에 검정패딩에 파란색 줄무늬 모자를 쓰고 있는 아주머니가 악다구니를 쓰고 계셨다
보아 하니 아주머니가 타야 할 기차도 취소가 되었던 모양이다.
아주머니는 다음에 오는 가장 빠른 기차를 타야 일정을 소화할 수 있노라 이야기하며
그다음 기차로 바꿔 달라 하고 있었고 직원은 그 기차는 돈을 더 내셔야 된다고 했다
그러자 아주머니는 "아니 너네가 늦었놓고 내가 왜 돈을 더 내야 되는데!"라며 따지기
시작했다
아주머니가 큰소리로 떠들건 말건 똑같은 톤과 표정으로 직원은 돈을 더 내고 그 기차로 바꿔 가시던가 아니면 기다렸다 다른 기차를 타시라고 이야기했다
흡사, 지금 거신 번호는 없는 국번이오니.. 같은 기계음 같은 모습으로 똑같은 말을 무한반복 하고 있는 직원이나 통하지 않는데 계속 이야기하는 아주머니나 한 치의 양보도 없었다.
극기야 아주머니는 "이런 고약한 독일 철도 같으니라고!" 라며 소리를 지르고 돌아서서 뭐라 뭐라 어느 나라 말인지는 알 수 없으나 욕 같은 말을 랩처럼 쏟아 놓으며 사라 지셨다.
우리 앞에 아저씨는 딸내미와 같은 기차였는데 취소가 되었으니 하노바에서 갈아타는 다른 기차로 바꿔 가겠다고 했다
직행이 아니라 다소 번거롭기는 하겠지만 괜찮다며..
그런데 우리 딸내미는 저 짐을 들고 계단들을 통과해서 갈아타야 하는 다른 기차를 타고 갈 수는 없었다.
결국 딸내미는 2시간가량 후에 오는 기차를 타기로 했다
경유하지 않고 디렉트로 도착하기도 하고 새로 이사 들어가는 집에서 10분 거리인 역에서 내리면 되니 예상 시간보다 오래 걸리기는 하겠지만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 상황에 어쨌거나 그 짐을 들고 갈 수 있는 기차를 기다릴 수 있다는 것만으로 감사한 일이 아니던가
바꿀 수 없으면 즐길 수밖에..
아이를 데리고 짐을 밀고 빵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딸내미처럼 기차가 사라지거나 연착한 사람들로 빵가게는 꽉 차 있었다.
아직 기차 시간까지 넉넉한 시간이 남아 있었으나 이놈의 기차가 또 중간에 어찌 될지 모르니 집에 다녀올 수도 없고 이참에 아침이나 먹으며 천천히 수다를 떨기로 했다
덕분에 모처럼 딸내미와 이런저런 재미난 사진들도 함께 둘러보고 살살 꼬셔서 남자 친구 이야기도 전해 들을 수 있어서 나름 좋은 시간이었다.
그렇게 10분 같은 2시간이 지나고 다시 바뀐 3번 플랫폼으로 내려갔다.
그런데 이번엔 9시 33분 함부르크행 열차가 플랫폼을 채우고 있었다
이건 또 뭐냐는 말이다
딸내미가 타야 하는 건 9시 15분 기차인데 그보다 훨씬 뒤에 완전 다른 동네로 출발할 기차가 플랫폼 안에 들어와 있으면 어쩌라는 건가?
남편은 기차가 길다면서 앞쪽은 함부르크로 가는 기차고 그 뒤쪽은 다른 동네로 가는 기차라 가다 떨어지는 거 아니냐고 했다
아니 이양반이 이게 한국 ktx 울산 부산행인 줄 아나?
우리는 서 있던 열차 중간쯤에 유니폼을 입고 서 있는 도이치 반 독일 철도 직원으로 보이는 여성에게 가서 물어보기로 했다
이미 여러 명이 묻고 지나간 듯 보이는 직원은 겁나 짜증이 난다는 표정으로 서 있었다.
우리는 "9시 15분 열차는 어디서 타나요? 원래 여기서 타기로 되어있었는데요"
라고 물었고 쌀쌀맞은 목소리의 직원은
"그건 저도 모르지요!"라고 했다.
하마터면 "그럼 그걸 내가 알겠니?"라고 할 뻔했다.
속에서 깊은 빡침이 올라왔다.
이해한다 다른 곳에서 기차를 타고 온 직원은 정신없이 바뀌는 여러 구간의 사정들을 모두 알고 있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들고 있던 워키토키 비슷그리한 내부 전화는 뒀다 국 끓여 먹나?
좀 물어 봐 주면 되지 않나?
너무 자기 일 아니라 상관없다는 표정으로 이야기하는 모습에 전투 의지가 활활 타올랐으나 딸내미 기차를 태우는 게 최우선이라 그냥 지나 쳤다
눈으로 "아줌마 운 좋은 줄 알아!"를 마구 날려 주는 것을 잊지 않으며...
기차 출발 시간은 다 되어 가고.. 원래 들어오기로 한 플랫폼에는 다른 행 기차가 들어와 있고..
그 어디에도 거기에 관한 인포가 떠 있지 않았으며 독일 철도 직원마저 모른다며 쌩깠다.
이러다 만약 멀리 떨어져 있는 플랫폼으로 갑자기 바뀐다면 이 짐들을 들고 탈 수 있을까?
울딸내미 오늘안에 기차를 탈 수는 있는 건가? 하는 합리적 의심과 걱정들이 머릿속에 줄지어 들어오고 있었다
우리야 딸내미가 하루라도 더 집에 있다 가게 되면 좋지만...
도와주려고 기다리는 친구들과 가구 등을 위해 자동차부터 이것저것 시간 예약해 둔 것들을 전화해서 바꾸었는데 또 바꾸어야 할 상황이 될 수도 있고..
무엇보다 그다음 날이 일요일 이다 독일은 상점들이 모두 문을 닫기 때문에 이러다 딸내미 맨바닥에서 자게 될까 봐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길기만 했던 몇 분을 지나 드디어 방송이 나왔다.
"플랫폼 3에서 9시 15분에 출발하기로 한 기차는 플랫폼 4번 에서 출발 합니다."
휴우~다행히 4번은 바로 옆이었다.
그 방송이 기차가 들어오면서 함께 나오고 있었다.참 빨리도 알려 준다.
그바람에 여기저기서 흩어져 있던 사람들이 한꺼번에 4번으로 모여들었다.
방송이 조금만 늦게 나왔더라면 많은 사람이 기차를 놓칠 수도 있던 상황인 거다
꼭두새벽 부터 일어나 헐레벌떡 와서 기다렸던 기차는 예정에 없이 취소 가 되고 다시 2시간 기다려 타려고 했던 기차마저 놓칠 뻔했다.
정말 아슬아슬했다. 이게 뭔 지랄 인가 말이다..
딸내미를 간신히 기차에 태워 보내고 남편과 터덜터덜 걸어 올라 오니 어느새 인포메이션 창구는 샷터를 내리고 직원들은 온데 간데 없었다.
아침 9시 살짝 넘은 시간에 벌써 퇴근 하실 리는 없고 지들도 계속 되는 항의가 힘들었던지..아예 문닫고 토낀 것으로 보인다
설마 동시에 세사람이 손잡고 화장실을 한꺼번에 간다고 샷터를 내렸을 리는 없지 않겠는가
이러나 저러나 아까 파란 모자 쓰고 "고약한 독일 철도 같으니라고!" 라며 쌍욕을 날리던 아주머니 마음을
충분히 이해 하겠는 순간 이였다
굳건히 닫힌 문을 째려 보며 들을일 없고 알아들을일 없겠으나 서비스 차원으로다가
찰진 한국욕을 덤으로 선사해 주었다
"이런 슈벌 것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