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제법 키도 크고 힘도 세진 독일 나이로 9살짜리 우리 막내는 형아랑 똑같은
8월에 태어난 여름 아이다.
둘은 딱 10년 차이
두 아들 다 8월 생인데 입덧부터 임신기간, 출산 모든 것이 달랐다.
입덧 이라고는 없어 먹고 싶던 거 스스로 자급자족할 수 있던 큰 아이 때 와는 달리
막내는 몇 개월 동안을 입덧에 시달려야만 했고,
세 아이중 유난히 입덧이 심해서 임신한 마눌이 먹고 싶다는 음식 어떻게든 포장 배달 또는 공수가
가능했을 한국과 다르게 먹고 싶다면 직접 만들어 먹이거나 또는 먹이기를 포기해야만 하는 것이
대부분인 독일 땅에서 남편은 실로 난감해했다.
본인이 만들어 줄 수도 구해 줄 수도 없는 콩잎 장아찌 라던가 메밀전병 등이 아니라 맥도널드의
애플파이를 먹고 싶다던 어느 늦은 밤에 행복하게 사러 나가던 남편이 기억난다.
뿐만 아니라, 유독 실내에 깔려 있는 양탄자 냄새와 로션 등의 화장품 냄새가 역해서 손 씻고 핸드크림을 바른 남편이 옆에 오는 것을 힘들어할 정도였다 당연히 제대로 먹을 수가 없어서 임신 초반에는 아주 날씬? 했었다.
그러나 끝날 것 같지 않던 입덧 기간이 지나고서는 더 이상 그 집 안에서 날씬한 여인네는 흔적을 찾아볼 수 없었다.
37세라는 이르지 않은 나이에 기대하던 선물처럼 우리에게 온 막내 라...
배가 불러 서있으면 발이 잘 안 보이던 막달까지 일정 잡혀 있던 요리 강습을 소화하며 행복하고 씩씩하게 임신 기간을 누렸다.
그러던 어느 날 다니고 있던 한인교회에서 수련회를 간다고 했다.
너무 따라가고 싶은 거다 애 낳을 때가 다 되어 오늘내일하는데도 말이다
매 해마다 갔던 곳이라 그렇기도 했고, 친한 사람들이 다 간다니까 나도 하는 마음도 있었으며
아무래도 만삭인데 집에서 쉬어야 하지 않겠냐 고들 하니 더 가고 싶었다.
왜 하지 말라면 더 하고 싶고 안된 다면 더 간절해지는 묘한 마음 있잖은가
수련회 장소는 그때 우리가 살던 니더작센주의 학생도시 괴팅엔에서도
1시간 30분 이상을 차로 가야 하는 "우슬라"라고 하는 시골이었다.
혹시 라도 우리 딸내미 때처럼 출산이 빨리 진행될 경우 애 낳으러 병원 가다 차 안에서
낳게 생긴 곳이다.
너무 가고 싶지만 갈 수 없을 것 같던 나는 한숨을 푹푹 쉬고 있었고
누군가 자기 딴에는 위로해 주겠다고, " 아 뭐 걱정하고 그러십니까, 가시면 되지 ,
까짓 거 여차 하면 종합 병원 헬기 한번 띄웁시다"
라며, 시원 스레 책임질 수 없는 농담을 해도 별로 위안이 되지 못했다.
다니던 산부인과에서 출산 일 전 마지막 검진 시간이었다.
뭔가 평소와 다른 분위기를 느꼈던지
이미 두 아이의 임신 과정을 쭉 지켜 주시던 산부인과 선생님이 내 손을 꼭 잡아 주시며
많이 불안하냐고 물으시는 거다, 사실대로 말하자니 아이 같은 투정인 거 같아 조금 창피했지만
걱정해 주시는 살가운 마음이 고맙고 언니 같고 이모 같던 선생님 이기에
솔직히 이야기했다.
사실은 출산일 이 다 되었는데 교회 수련회가 가고 싶어 그런다고 이야기했더니,
우리 선생님 방안이 떠나가라 웃으시며 거기가 어디냐고 물으셨다.
혹시 이름은 들어 보셨는지 모르지만 완전 깡촌 인 "우슬라"라고 있다.
거기는 진통 오면 애 낳으러 오다 중간에 낳을지도 모른다.라고 했더니,
이번에는 선생님이 책상까지 두드리며
웃는 거다,
선생님이 워낙 성격이 좋고 다정해서, 오래 기다려야 진료를 받을 수 있는 이 병원을
고집해서 다녔는데 그동안 그렇게 박장대소하시는 모습은 처음 보았다.
의아 해 있는 내게 꼭 쥐어준 종이에는 선생님의 집전화번호와 직통 핸디 번호가 적혀 있었고,
나를 보고 씩 웃으며 날리신 선생님의 마지막 한마디가 나를 행복하게 했다.
" 나 그 깡촌 우슬라 살아 , 진통 오면 바로 핸디 해 내가 애 받으러 갈게."
룰루랄라 나는 예정일과 겹쳐있는 수련회 기간을 맘 편히 건강하게 신나게 잘 다녀왔다
모든 일정을 다른 사람과 똑 같이 하고 둥근 배를 들고 바람 같이? 계단을 오르내리는 나의 날쌘 모습을 보고 사람들이 감탄해 마지않았었다.
(주로 계단을 오르내릴 때는 식사 시간 일 때다 당연히 날쌜 수밖에...)
여기서 모든 일정이란 저녁 늦게 야식으로 라면 끓여 먹는 시간까지 포함 해 서다.
라면 때문에 수련회에 그토록 가고 싶었던 건 아아.... 아니다.
그렇게 조마조마 수련회를 다녀오고서도, 예정일이 5일이나 지났는 데
막내는 세상으로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금요일 다시 산부인과에서 검진을 받으며 만약에 이번 주말에도 출산을 하지 않으면
월요일쯤 유도 분만을 하기로 의논하고 주말 내내 출산할 큰 병원에서 체크할 것을 예약해 놓았다.
그런데 토요일 아침 이 되니 기다렸다는 듯이 진통이 슬슬 오기 시작했다.
예약되어있는 위에 일땅이 이 땅이 두 아이를 출산했던 "노이 마리아 힐프"라는
병원으로 검진을 갔다. 역시나 진통이 약하게 오기 시작했고
젊은 여자 선생님이 지금 진통이 오는 수치로 보니 내일이나 모레쯤 출산할 것 같은데,
집에 갔다 올 건지 , 출산 예정일도 지났는데, 아예 병원에 입원해서 기다릴 건지 원 하는 데로 하라 했다.
집에서 기다리고 있는 두 아이들 밥도 챙겨 줘야 하니 일단 집에 갔다가 이따 다시 오겠다고 했다.
그랬더니 젊은 선생님 내일 자기는 오프 라 출근을 안 한다고 출산 잘 하시라는 인사를 하고
가는 거다.
나는 그 뒷 통수에 대고 웃으며 이야기했다.
"이따 분명 우린 다시 만나게 될 거예요" 내가 애 한 두 번 낳아 보냐 는 말은 생략 한 체 말이다.
아니나 다를까 아이들 점심 먹이고 나니 본격적으로 진통이 오기 시작했다.
그때 인터넷으로 다시 보기하고 있던 시트콤 제목이 "거침없는 하이킥 " 이였는데
정말 거침없이 진통이 올 때쯤 병원으로 향했다.
왜 나는 애 낳으러 갈 때마다 그날따라 출산하는 산모들이 많아서 매번 난리였는지 모르겠다.
무슨 세일 기간에 백화점으로 애 낳으러 간 것도 아닌데 말이다.
지금도 황당한 것은 출산이 여러 군데 분만실에서 동시에 진행되고 있어서 Hebamme 헤바메
우리로 하자면 산파가 없다고 나더러 참아 보라던 산파 보조 쌤의 말이었다.
(독일에서 제왕절개가 아닌 자연 출산일 경우 출산의 전반적인 과정 모두를 헤바메 산파가 주도한다
물론 마무리 그리고 위급상황은 항상 의사가 함께 한다.)
참을 것이 따로 있지 애 낳는 것을 어떻게 내 마음대로 참는 가 말이다.
어쨌거나 고군분투 참아가며 병원에 도착한 지 1시간 30분 만에
건강한 3.8kg 의 막내를 낳았다.
태어 나서도 어찌나 입맛을 다시던지 갓난이가 쩝쩝 거리는 소리는 처음 들어 봤다.
감사하게도 지금 까지 잘 먹고 잘 커서 우리 막내는 항상 평균보다 큰 편에 속한다.
늘 평균보다 훨씬 작던 형아에 비해 그 또래 독일 아이들 보다도 큰 우리 막내는 먹을 것 욕심이 제일 많다.
장난감은 잘 빌려줘도 먹을 것은 정말 좋아하는 친구 들만 나누어 준다.
우리 막내가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릴 때는 누나 나 형아에게 먹을 것을 뺏겼을 때뿐이다.
오늘 아침에 친구 크리스텔과 함께 조깅을 하면서 똑같이 (여기 나이로)37세 라는 나이에 막내를
출산했던 이야기를 나누며 서로 주야장천 막내 들에 대한 무한 애정을 쏟아 내다,
이 녀석 태어날 때가 떠올랐다. 그간 참 많이 키웠구나 싶어 흐뭇하기도 하고
아직 품 안으로 파고 드니 좋기도 하다.
첫 아이를 출산 했던 그때 보다 10년 이나 지나 나이 들어? 낳고 키우느라 체력이 달려
큰 아이 때처럼 쎄게? 놀아 주지도 못했는데...쑥쑥 잘 커 주니 고맙기 그지없다.
비록 때때로 말도 안 되는 고집을 피워 혈압을 상승시키기도 하고 책 읽은 것을 싫어라 도망 다녀서 기함하게 만들기도 하지만 녀석은 언제나 사랑스러운 귀염둥이 우리의 막내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