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중희 Sep 15. 2016

빨간 단풍과 나의 아버지

가을이 소리 없이 찾아 올때면...


어렸을 때부터 나는 "어머 진짜 미인 이시다!" 라는 말을 늘 듣고 사시던 엄마 와는 영 딴판으로 

아버지와 국화빵 이였다.

그래서 그런지 울 아버지 눈에 나는 언제나 미스코리아 쌍싸다구를 몇 번이고 후릴 미모의

소유자였고 세상에서 제일 총명한 아이였다.

그런 내가 자라면서 숱하게 당신을 실망케 했을 지라도 무뚝뚝한 타일의 아버지는

언제나 당신 만의 방식으로 그런 딸내미를 어느 상황 속에서도

변함없이 응원하고 믿어 주셨다.


유럽으로 배낭여행을 다녀온 딸내미가 아는 사람 이라고는 하나 없는

머나먼 독일 땅으로 홀로 유학을 가겠노라 무턱대고 이야기를 꺼냈을 때에도

주변 에서는 형편도 안되는데 취직을 하던시집을 가던 하지

무슨 놈의 유학 이냐며 타박을 했었다. 

그때도 아버지는 그저 묵묵히 "네가 원 한다면 가라"한마디로

내 손을 들어주셨다.


그리 어렵게 떠난 유학 길에서 하겠다던 공부는 안 하고 시키지도 않은 연애를 하더니 생각지도 못한 빠른 시간에 결혼을 하겠다고 할 때에 놀라 기함하는 식구 들을 아랑곳하지 않고 당신의 입장에서는 도둑눔이 따로 없었을 남편에게

"공부는 다 마치게 해 줄건가?"

한마디로 또 내 손을 들어주셨다.

그런 아버지....

 

그럼 에도 나는 어리고 철없던 사춘기 시절... 까다롭다 못해 유난스러운 성정에 꼿꼿 하기가 대나무보다 더한 아버지가 불편하고 싫기도 했었다.

그래서 친한 친구와 친구 처럼 다정스레 지내는 친구의 아버지를 마냥 부러워 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 어느덧 내가 그때의 아버지 나이가 되고

그때의 나 같은 말 안 듣는 사춘기의 아이 들을 줄줄이 낳아 키우며

나이 들어가다 보니....

그때의 울 아버지가

이래서 그러지 않으셨을까? 울 아버지 이때는 이런

기분 이셨겠구나....하는 생각 들을 자주 하게 된다.



독일로 유학을 나오기 전 생애 처음 유럽 배낭여행을 일정보다 길게 늘여

다녀오던 여행길에서 주머니 속 남은 동전 몇 개를 탈탈 털어 오렌지를 샀다.

식구들 선물로 기념품 도 아닌 스페인에서 너무 맛나던 오렌지를 가방에 넣어 왔을 때도

여행 갔다 무슨 이런 걸 들고 오냐고 황당해하던 식구들보다 재밌어하시며 어떻게 이런 기특한 생각을 했냐고 크게 웃어 주시던 아버지 웃음소리가 지금도 생생 하다.


독일대학에 입학 한후 처음 맞은 방학에 한국 집에 다니러 갔다. 나는 식구들 모두 둥그렇게 앉혀 놓고 마치 개선장군이라도 되는 듯 의기양양 해서 이야기 보따리를 풀었다. 

학교에 입학시험을 무사히 치른 이야기,독일 친구들과 지내는 이야기 등등 

미주알고주알 마치 무용담 풀어내듯 신이나서 떠들어 댔다.

박사가 된 것도 아니요 교수가 된 것도 아니건만 어리지 않은 나이에 이제 간신히 독일 대학으로 입학을 한 딸내미의 이야기를 듣고 계시던 아버지는 세상을 다 가진 사람처럼 뿌듯하게 웃고 계셨다.


결혼하고 첫 아이를 낳아 친정엄마가 한 달간 독일에서 산간을 해주실때도 밥솥에 밥도 못 안치는 분이 혼자 계시며 출산한 딸내미 건강 걱정만 하고 계셨다.

혼자 계실 아버지 걱정에 갓난이 데리고 쩔쩔매고 있는 딸과 사위를

두고 차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던 엄마가 귀국하시던날 울컥 해진 나는

나도 모르게 아버지께 전화해서 철없이 울기만 했었다.


머나먼 타국 아무도 없는 곳에서 아버지 눈에는 아직 부모 되기에 어린 딸내미가 

핏덩이를 품에 안고 막막함과 그림움 에 울어 대는데...

어떻게 달래 주어야 할지 난감하던 아버지는 그 안타까운 마음을

"어이, 세상에서 제일 용감한 사람이 왜 이러나" 하는

멋쩍은 한마디에 감추고...

그저

딸내미의 울음이 잦아들 때까지 묵묵히 기다려 주셨다.

손에서 전화기를 쉽사리 놓지 못 하신 체....


그런 아버지가

둘째를 낳고 백일이 채 되지 않았을 때 갑자기 큰 수술을 받게 되셨다.

그때 남편의 지도 교수 님을 비롯해서 독일의 쟁쟁한 의대 교수님 들이

한국에서 보내온 아버지의 CT, MRI 사진을 보시고

모두가 입을 모아 이야기 했었다.


독일에서 라면 수술 하지 않는 다고..짧으면 3개월 길면 6개월

남았으니 그동안 편안하고 행복하게 해 드리라고 말이다.

그 청천벽력 같은 소식에도 멀리 있다는 이유로 그때도 나는

한국으로 바로 가지도 못하고 그저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다.

다행히 아버지는 한국에서 큰 수술을 무사히 받으셨고

차차 회복되셨다. 지금 생각해도 정말 기적같은 일이요 감사한 일이다


그 덕분에 이듬해 아이 둘을 데리고 한국으로 나간

우리는 기력은 예전보다 쇠잔해지셨으나 손자 손녀를 안고 좋아하시는

아버지와 춘천으로 마지막 가족 여행을

떠났다.

그 여행이 다시는 오지 않을 시간이라는 것도

모른 체....



그렇게 아버지가 큰 수술을 받으시고 삼 년이 지난 어느 날

아버지의 한쪽 눈 이제 더 이상 보이지 않으신다는 기막힌 이야기를

식구들 에게 전해 들었다.


희미하게 보이는 다른 한눈에 의지해 아버지는 앞이 보이지 않으신 다는걸

식구들에게 내색하지 않으려 무던히 애를 쓰셨던 모양이다.

그러나 깎아 드린 과일을 몇 번이나 놓치 시는 것과 평소보다 많이

달라 지신 아버지의 행동에 결국 모두가 알게 되었고

급하게 다시 수술을 하시게 되었다.


그때도 아버지는 멀리 있는 딸내미 걱정할까 봐 식구들에게

내게는 알리지 말아 달라 당부하셨다 했다.아버지가 수술하시고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아버지의 핸디로 전화를 걸었다.

수술이 잘 되었고 회복 중이시라는 엄마의 말씀에 안도하며그때도 달려갈 수 없었던 나는 평소와 다름없는 아버지의

"어 딸 이냐~!"하는 말씀에 괜스레 목이 메어 왔다.

아버지는 수술하시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눈으로 모르고 있을 것이라

믿는 딸내미에게 밝은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딸 여기는 단풍이 빨갛게 곱다."


멀리 있다는 핑계로 아버지가 병원에 계셔도 가보지도 못하는

딸내미 걱정할까 봐..

그와 중에도 아이들 데리고 공부하느라 계속 졸업이 늦어지는 딸내미 가 못내 걱정스러운 아버지는 애써 목소리에 힘을 주시며 "이번에 꼭 졸업할 수 있지!"

라는 말씀으로 당신만의 파이팅을 전했다.

그때 듣던 아버지의 목소리가 세상에서의 마지막이 되리라 고는

상상도 못 하였던 딸내미에게 말이다.

그렇게 아버지를 빨간 단풍이 곱게 물든 눈부시게 맑은 파란 가을

하늘로 홀연히 보내 드렸다.


나는 지금처럼 가을이 소리 없이 찾아올 때면 어디선가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려올 것만 같다.

"딸 여기는 단풍이 빨갛게 곱다"

매거진의 이전글 그렇게 부부 싸움은 시작되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