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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중희 Sep 19. 2017

그래서 나는 오늘 기꺼이 월차를 내기로 했다.


엄마... 내 갈색 재킷 어딨어?
엄마... 내 영어 노트가 없어...
엄마... 도시락은?
여보야... 나 씻고 올 동안 양말 하나 챙겨 놔줘..
 여보야... 내 가방 어디다 놨지?


그 전날 저녁 이것저것 다 준비 해 놓고 잔다 해도 아침 이면 눈 뜨자마자 여기저기서

나를 불러대는 소리에 머리가 띵 해질 지경이다.


그럼에도 "그때가 제일 행복할 때다.."라는 친정 엄마의 말씀처럼...

다 컸는데도 수시로 내 손길을 필요로 하는 아이들과 나 없으면 자기 양말 한 짝.. 들고 다니는 가방.. 하나 못 찾는 남편과 지지고 볶고 난리 부루스인 이 순간이 행복하다.

다만..

만약에... 엄마와 아내라는 것이 직업이라면 세상에서 가장 위대 하면 서도 최고로 고된 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아침에 눈 뜨면서부터 머리는 까치집을 지을 망정 동시에 출근이고 끊임없이 밀려드는 일은 밤에 잠들 때까지.. 어느 때는 자면서도 멀리 혼자서 생활하고 있는 우리 집 큰아들은 잘 챙겨 먹고 있으려나? 하는 걱정을 하고 있으니 퇴근 시간도 따로 없고 야근 은 일상 이라고나 할까?

그러므로...때로는 엄마도 아내도 온전히 자기 자신 만을

위한 시간이 필요하다.그 언젠가 내게도 있었던 나만을 위한 시간 말이다.

그래서 나는 오늘 기꺼이 월차를 내기로 했다.


직장인들이 이 눈치 저 눈치 보며 오래간만에 정말 어렵사리 얻는 하루가 월차 라면 오늘 나도 엄마와 아내의 일을 살짝 내려놓고 온전히 나 만을 위해 시간을 써 볼 참이다.

마음은 며칠 휴가를 내고 배낭 하나 둘러메고 가뿐히 해방의 그날을 만끽하고 싶다만 아이들 학기 중이고 요리강습이 줄지어 나를 기다리고 있으니 현실적으로 그것은 불가능하고 대신에 오늘 하루, 나만을 위한 시간을 가져 보기로 한다.


매일 해야 하는 빨래도 청소도 장보기도 뒤로 쭈 욱 쭉 미뤄둔 체....

거울 앞에 앉아 삐죽 빼죽 뻗친 머리카락 들을 정돈 하고 비크림 도 바르고 립스틱도 한번 발라 주고 나름 신경쓴 모습 으로 집 앞에 오는 동네 마을버스 같은 12번 버스를 타고 시내로 향한다..

무엇을 할지는 가면서 생각하기로 하고 말이다.


버스 안에는... 둘째를 품에 안고 큰아이 유치원을 데려다주는 엄마들 (독일의 유치원이나 놀이방에는 버스 로 통원 해 주는 유치원 버스 서비스가 따로 없다. 시간 맞춰 부모가 알아서 데려다주고 데려 와야 한다)


내멋에 산다 로 무장한 수두룩한 귀걸이에 귀는 탬버린이요...파랗다 못해 시퍼렇게 염색해 레게 파마를 한 머리를  로 얹고 앉은 아가씨와

나 지금 쇼핑 가요 라고 써있는 독일식 장 보는 가방 (바퀴 달려서 핸드 커리어 비슷하게 생겼다)을 옆에 두고 앉아 계신 할머니들...

그리고 아침 수업에 맞추어 가려는 듯 보이는 우리 아들 또래의 대학생들...


평소 늘 타고 다니는 버스에 앉아 시내로 가는 길이지만 문화센터에 일 때문에 나가는 것도 아니요, 은행 볼 일이나,관공서 가는 일도 아니고,아이들 학용품 사러 또는 남편에게 필요한 것이 있어 나가는 것도 아니고, 장을 보러 가는 것도 아니요 나만을 위해 간다고 생각하니 같은 길 이여도 왠지 느낌이 다르다.


뭘 하며 시간을 보내면 유용하게 보냈다고 소문이 나려나... 영화관에서 홀로 멋진 영화를 한편 보는 것도 좋겠는데.. 아쉽게도 독일은 아침 일찍 조조할인 이런 것도 없을뿐더러 오전 시간 에는 극장 문을 열지 않는다.

그럼 나도 한번 손 내밀고 우아 하게 앉아 손톱에 반짝이 붙여 주세요 깜찍한 걸로 그려 주세요 해가며 네일 아트를 받으러 가 볼까? 싶다가도 아니지 내일 바로 요리강습 있는데... 싶어 그것도 패스, 어쨌거나 뭘 하며 놀까?를 궁리하는 행복에 겨운 고민을 하다 보니 괜스레 소풍 가기 전날 아이처럼 들떠 서는 두발을 까닥이고 있는데...

편해서 자주 애용하던 한쪽 운동화 끝이 터져 하얀 양말이 보인다....


난 맨날 뭐가 그리 바빠서 이런 것도 모르고 다녔을까 싶어 은근히 화가 나기도 하고 약간은 서글퍼 진다.

아이들 것은 필요하다 싶으면 가격이 좀 되어도 덥석 집어 들면서 내 것을 사는 데에 있어 서는 들었다 놨다 고민만 하다 그냥 마는 것이 많았는데...

왠지 씁쓸해 지는 순간 에 나는 결심 했다. '그래, 오늘만큼은 나를 위해 아낌없이 질러 보는 거야.기왕이면 삼빡하고 비싼 것으로다가...



그렇게 쇼핑으로 일정을 정하고 보니 '그럼 시내에서 가장 큰 쇼핑몰로 가 볼까?'

하며 갈 곳이 정해 졌다.

쇼핑몰 안에서 나도 모르게 자연스레 마트 쪽으로 향하는 발길을 돌려... 은근슬쩍 주방용품 상점 쪽으로 돌리는

눈길을 잡아... 제일 먼저 들린 화장품 상점에서는 새로 나온 립스틱 들을 손등에 이색 저색 그려 보며 밝고 진한 색의 홍시를 연상케 하는 색상의 립스틱 하나를 사고 이것저것 소품들을 모아 파는 상점에서 2018년 도 커플 달력을 샀다.

마치 사귄 지 얼마 되지 않은 남자 친구와 함께 채워 나갈 빈칸들을 콩닥콩닥 기대하는 상큼 발랄한 여자 친구처럼....

남편이 보고는 쓸데없는데 돈썼다 하겠지만 오늘은 나를 위한 날이니까 내 마음대로 접수하는 걸로...

그다음은 오늘의 하이라이트 신발을 사러 갔다.

날이 추워지고 보니 벌써 줄줄이 진열 되어 있는 겨울 부츠들이 반갑기까지 했다.

많고 많은 신발들 중에 마음이야 길고 늘씬한 롱부츠를 신고 싶지만 튼실한 종아리 구조상 웬만한 것은 잘 잠기지 않는다.

굽이 뾰족해서 벽에 구멍 뚫는 용으로 사용해도 너끈해 뵈는 굽 있는 부츠 들도 신고 싶은 마음만 가득할 뿐 강습하느라 종일 서있거나 동동 거리고 다녀야 하는 시간이 많은 나로서는 엄두도 낼 수 없는 것이고..


그러나 신어 보는 것이야 돈 드는 것도 아닌데 뭐 어떠랴 나는 드라마에 자주 등장하는 신데렐라급 여주인공이 남주인공이 시킨 다고 이것저것 옷 갈아 입어 가며 속으로는 좋으면서 저는 이런 비싼 선물은 부담돼서 받을 수 없사 와요 라는 개뻥 을 날리는 장면처럼 이 신발 저 신발 신어 보기 시작했다.

이건 가격이 좀 센데... 저건 디자인이 너무 튀는데... 해가며 말이다.


독일의 신발 사이즈는 한국과 다르게 여성의 경우 36, 37, 38, 39, 40,41, 42..... 등으로 나뉘는데

36이라 함은 우리의 225 정도 되는 크기이고 37이 230 정도 되며 38이 235 정도 된다.

그러나 신발 종류마다 디자인의 형태에 따라 차이가 있다.

예를 들어 발이 짧고 볼이 넓은 편인 나는 한국에서는 230에서 235를 신었었는데 여기서는 운동화 종류는 37을 신는데 저런 길쭉하게 나온 부츠 종류는 앞이 남더라도 38은 되어야 신을 수 있다.


비오는날 밭일 해도 될 만큼 튼실한 신발로 샀다.


독일의 신발 가게를 가면 저렇게 진열대 위에 숫자들이 크게 붙어 있는데 그것이 사이즈를 이야기한다.

예뻐서 골라 온 검은색 롱부츠는 들어는 가나 역시나 지퍼가 제대로 잠기지 않는다.

종아리가 굵어 슬픈 아줌마여....


몇 번 신지 않더라도 모양을 내며 신을 수 있는 얄딱구리 하면서도 이쁘고 비싼 신발로 지르겠노라 내심 생각했던 것과는 다르게 나는 어느새 신었을 때 따뜻하고 편안하며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신을 수 있는 실용적이며 투박한 신발을 고르고 있었고 비 오는 날 밭일해도 될 만큼 튼실한 것으로 샀다.

결국 삼빡할 것 같던 나의 일탈? 월차는 그렇게 허접하게 막을 내렸지만 그럼에도 나를 위한 시간을 가졌고 나를 위해 무언가를 사주었으니 내가 내게 준 근사한 선물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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