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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중희 Apr 19. 2019

남편이 보내준 소확행 휴가

지 생각에는 겁나 굿아이디어..


부활절 방학이 시작 되었다.

겨울방학(크리스마스 방학)끝난지 얼마 되지도 않은것 같은데...벌써 또 방학이다.

(독일은 주마다 방학 일자가 다르지만 크리스마스와 부활절 방학은 며칠 차이는 있어도 같은 시기다.)


아이들 방학이 되면 내게 소리 없이 뚝 떨어지는 숙제가 하나 있다.

요구사항 많으신 우리집 막내 입에서 "이렇게 재미 없는 방학은 내 인생 처음 이에요" 따위가 나오지 않게 몸사리지 않고 어떻게든 놀아 준다 특명!

럴려면 어디론가 휴가를 떠나던 아니면 매일 친구들과 수영장,박물관,영화관 ..등등을 다양 하게

데리고 다니던.. 그도 안되면 방학 프로그램 에라도 참여를 시켜야 한다.


그런데...우리는 이번 부활절 방학 2주 동안

어디론가 휴가를 수 없는 형편 이다.

마음은 간절 하나 말이다.

첫번째주는 병원 문을 열어야 하고...두번째 주는

병원 가구 들을 옮기고 대청소를 해야 한다.

35년간 그대로 였던 곳이라 손보고 정리 해야 할 것이 셀수가 없다...

게다가 공교롭게도 막내 친구들이 이번에는 거의 첫번째주 부터 휴가들을 떠났다.


휴가 못가...놀 친구 없어...입이 댓발 나와 있는 막내와 "평소 에는 바뻐서 아이와 함께 할 시간이 많지 못하니 방학 이라도 보충해 주어야 하는데..뭘 하지?어떤게 좋을까?엉?" 라며 머리 싸매고 있는 마눌을 보며..

남편은 마치 대단한 묘안을 떠올리기라도  했다는 듯이 손뼉을 치며 큰소리로 외쳤더랬다.

"괴팅엔!"


남편은,"이게 무신 자다 봉창 두들기는 소린가?" 라는 의미를 담아 땃땃한 레이저를 쏘고 있는 마눌과 아무 생각 없는 아이에게 혼자 들떠서 설명을 했다.


말인즉슨 우리가 살고 있는 카셀에서 자동차로 50킬로미터 정도를 달려 가면 괴팅엔 이라는 작은 도시가 나오는데 그곳에는 우리 동네에 없는 분데스리가 농구단이 있고 그곳에서 어린이 방학 농구 캠프가 삼박사일 열린 다는 거다.

그래서 마치 휴가를 떠나듯 호텔을 예약 하고 괴팅엔으로 보내 주겠다는 것이다.우선은 니들 끼리만...

휴가 같은 소리 허고 있네!


남편은 혼자 신이 나서 "잘 들어 봐,막내는 아침 9시 에서 오후 4시 까지 농구 캠프 가서 다른 아이들 이랑 놀고 너는 그동안 시내에서 예전에 갔던 곳들도 가보고 이기회에 만날 분들도 만나 보고 즐거운 시간 보내다가 저녁에 내가 일 끝나고 카셀 에서 괴팅엔 으로 가면 우리 셋이 맛있는 걸 먹으러 다니는 거야..어때?휴가 같지 않겠니?하는 거다.

나는 썩소를 날리며 다정스레 속삭였다.

"휴가 같은 소리 허고 있네"


그도그럴것이 ..

자동차 타고 아우토반(독일 고속도로)으로 삼사십분 이면 되고 빠른 기차 타면 18분 이면 도착 하는 가까운 옆동네   데려다 주고 데려 오면 되지 뭐하러 굳이 돈들여 호텔을 잡아야 하고...

남편은  집 놔두고 호텔로 출퇴근을 해야 하며..

자그마치 십오년도 넘게 살았던 그래서 골목 귀퉁이 마다 모르는 곳이 거의 없어 새로울 또한 없는 곳에서 ..나는 도대체 뭘하며 시간을 떼워야 하며...

그것을 위해 딸내미는 혼자 집에 남아 우리집 멍뭉이 나리, 하루 세번 산책 시키고 삼시세끼 자급자족 해야 하느냐는 말이다. 뭣 땜시?

이건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본전 치기도 안되는..

내가 생각 하던 보람 찬 휴가와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마치 십년 사귄 남친 이랑 소개팅을 하기 위해 미용실에 네일샵에 두루 다니며 꽃단장 하는 기분 이랄까?

익숙한 곳에서의 휴가 라 하믄...


어찌 되었든 별 대안 이 없어...그렇게 설렘 없는 우리의 휴가는 시작 되었다.

포장 없이 받은 선물 처럼 어느 골목길 돌면  뭐가 나오는지 빤히 아는 곳에서 밍숭맹숭한 기분으로 말이다.


평소 내가 생각 하던 "휴가" 라 하면 익숙한 동네와 집을 떠나 낯설고 새로운 곳에서 기대반 설레임 반으로 그시간 만큼은 조금 쯤 다른 일상을 꿈꾸힐링을 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매번 같은 곳으로 휴가를 떠나는 독일친구들을 보며(그런 사람들이 꽤 된다) 보태준 것도 없이 돈 아깝다는 생각을 하고는 했었다.


그래서,

언제나 우리는 휴가 중에도 바쁜 일상을 보내 고는 했었고..

내일은 어딘가를 다니느라... 오늘은 그것을 계획 하느라 쉴틈 없이 분주 했으며.. 시간 지나 남는건 사진 뿐이라며 각도 바꿔 찍어 대느라 그곳의 있는 그대로의 느낌을 온전히 가슴 안에 담을 여유는 없었던 순간들이  많았던것 다.


그런데...막상...

너무나 익숙한 동네에 휴가 라는 이름으로 와 보니,

오늘은 무얼 하고 놀아야 잘 놀았다 소문이 나려나?내일은 어디를 가야 본전을 뽑으려나?계획 하고 고민 할 일도...요리 조리 고개 돌려 가며 포즈 바꿔 가며 사진 찍어야 할 일도 없었고...

가까운 친구 들 에게 나눠 줄 작은 선물도 기념으로

거실에 걸어 둘 엽서 또한 고르기 위해 애쓸 필요가 없었다.


그저 발길 닿는대로 돌아 가니며..

"아, 여기는 예전에 양탄자 파는 가게 였는데 ..터키 케밥집 이 되었네..저기는 우리가 저녁에 자주 가던 멘자(학생식당)인데 독일 레스토랑 으로 바뀌었어?거기는 안경점 이였는데 옷가게로 바뀌었네...

라며..


오래되어 먼지 쌓인 사진첩 한장 한장 넘기며 그때는 이랬는데 저랬는데 주억 거리이미 익숙한 도시의 소소한 변화들을 한컷 한컷 눈 으로 더듬 었다.   

남편이 보내준 소확행 휴가

그렇게 삼박사일 을.....

귀퉁이 마다 저장 되어 있는 추억 들과 마주 하며 보냈다.

무엇을 해야 할지 어디를 가야 할지 계획 하거나 고민 할 이유 없이....걷다가 밥 때되면 전에 아이들 데리고 가끔 가던 식당 에서 익숙한 메뉴 시켜 놓고 배를 채우고...

또 걷다가 다리 아프면 시내 벤치에 앉아 지금은

대학생이 되어 집에 없는 아들이 여기서 아이스크림 하나 들고 앉아 행복해 했었지 등을...떠올리며...


그러다가 ...

세월 알고 지내던 지인  만나 커피를 마시며그간 흘려 보낸 서로의 시간 들을 나누었다.

나누어진 시간의 흐름 속에 예전 코흘리개 였던 아이 들은 어엿한 직장인 되었고 어여쁜 웨딩드레스를 입고 누군가의 사랑스런 신부가 되었으며 두 아이의 푸근한 아빠가 되어 있었고 ,늠름한 대학생이 되었다는 것만 빼고는 어제 만나고 오늘 다시 만나 수다를 떠는것 같은 기분으로 말이다..


그렇게 편안하고 자연스럽게 보낸 시간들은 잘하게 새로이 쌓인 추억 위에 달달한 쉼을 얹어 주었다.

하얗고 몽글몽글한 우유거품 위에 달콤한 황갈색의

캬라멜 시럽를 올린 캬라멜 라떼마끼아또 처럼... 


요즘...

올 연초 부터 개인병원을 개원 하게 된 남편을 도와 병원일을 거들면서 부터 가뜩이나 포화 상태인 머릿속이 서울의 출퇴근길 지하철 안은 저리가라로 복잡스러울 때가 많았다.

아는일도 새로 시작 하려면 힘이 드는데..모르는것 투성 이인 일들을 빠른 시간 내에 배워야 한다는 것은 생각 보다 훨씬 진빠지는 일이였고 몇명 되지 않는 직원 들이 다양한 환자들과 보호자 들을 상대 해야 한다는 것은 많은 감정의 소모와 함께 스트레스를 차곡 차곡 적립 하는 일이였다.

어쩌면 남편은 그런 내게 "휴가" 라는 글자 그대로의 쉴수있는 시간을 마련해 주고 싶었는지 모르겠다.


어쨌건 ...이번 휴가를 통해...

"내가 삼박사일 동안 카셀 과 괴팅엔을 오가며 일과 휴가를 동시에 해냈다" 는 남편의 생색과 하루 세번씩 꼬박 꼬박 멍뭉이 산책 시켜 주고 독박육아 하느라 피곤 하다는 딸내미의 엄살을 덤으로 받아야 했지만,작고 소소한 그러나 나름 확실히 행복한 휴가를 보냈다.

언젠가 또 가고 싶을 만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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