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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중희 May 02. 2020

비 오는 날 독일에서 먹는 수제비


아침부터 주적주적 비가 내린다. 비 오고 변덕스럽기로 유명한 독일 봄 날씨 답지 않게 요사이 화창한 날의 연속이었다. 이제 비가 올 때도 되었지 싶었는데... 아.. 비 냄새.. 눅눅하고 축축한 이 익숙한 느낌...

독일에 살면서 비 오는 날이 반가워 보기는 오랜만이다. 이런 날은 역시 따끈한 국물에 쫀득한 수제비 한 그릇이 딱이다.

코로나 시대, 시장 가는 것도 최소한으로 줄이고 있는 요즘.. 수제비는 들어가는 식재료도 간단하다.

밀가루, 감자, 호박, 양파, 파 이렇게만 있으면 되니 재료 없어 못 만들 일 없다. 거기다 학교 못 가고 집에 있는 심심한 아이들과 반죽하는 것부터 채소 다듬어 써는 것 그리고 반죽 떼어 넣는 것 까지 모든 요리 과정을 함께 할 수 있어 더욱 좋다.


커다란 볼에 밀가루를 담고(가족 수에 따라 다르지만 대략 밀가루 반푸데? 약 500g) 물 한 컵 정도를 부어 주고 소금 살짝 뿌려서 조물조물 반죽해준다.

독일에서는 아이들이 가지고 노는 안티 스트레스 공 안에 밀가루가 들어있다. 그만큼 밀가루의 말랑한 촉감이 사람의 기분을 말캉하게 해 준다.

조막만 한 손으로 엄마 따라 밀가루 반죽을 하며 신나 하던 막내도 이제는 엄마손 보다 커서 금방 반죽 한 덩어리를 만들어 낸다.

비 맞은 것처럼 물에 젖은 밀가루가 반죽의 형태를 띨 때 한 스푼의 참기름은 마법의 주문이 된다.

고소한 냄새 솔솔 풍기는 참기름을 반죽의 구석구석에 골고루 바르듯 치댄 후에 동그란 공 모양의 반죽을 비닐 랩 씌워 한 옆에 놓아두면 수제비 반죽은 다 되었다.


엄마가 멸치 육수를 준비하는 동안 채소를 다듬고 써는 것은 막내 담당, 먹는 것을 좋아하는 아이는 만드는 것도 좋아한다. 껍질 벗겨낸 양파가 제법 매운 내를 풍기는 데도 연신 입꼬리가 올라간다.

우리 집 세 아이는 모두 요리하는 것을 좋아 하지만 그중에 막내는 아주 꼬맹이 때부터 엄마 옆에서 무언가를 만들어 접시에 담는 것을 좋아라 했다. 물론 중간에 맛볼 수 있는 특혜를 더 좋아했지만 말이다.

투명하고 자잘한 물방울을 맺으며 끌어 오르는 멸치 육수에서 멸치를 살포시 건져 내고 막내가 먹기 좋은 크기로 납작하게 잘라낸 양파, 감자, 호박을 순서대로 고 있는 국물에 넣는다.

어느새 물 위로 하나 둘 동동 떠오른 하얀 양파 조각들을 보며 아주 먼 옛날이야기 하나를 떠올린다.



내가 어릴 때 살던 우리 집은 봄이면 담장 너머로 넝쿨을 뻗은 가지에 빨갛고 새초롬하게 생긴 장미들이 향긋한 냄새를 풍기며 탐스럽게 피어났다. 그 향기와 어여쁜 자태는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황홀하게 하기 충분했고 인심 후한 엄마는 길가던 학생이 한송이 부탁해도 이웃집 아주머니가 넓은 화병을 내밀어도 넉넉하고 예쁜 장미 다발을 만들어 주고는 했다.
맘 좋은 엄마를 닮은 우리 집 장미 나무는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나누어 가졌어도 봄 내내 담장을 덮을 만큼 피어났고 사람들은 우리 집을 장미나무집이라고 불렀다. 그 장미나무집에 살고 있을 때 이야기다. 내 기억이 맞다면 그때가 초등학교 1학년쯤 되었을 때였다.
색 바랜 녹색 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면 마당 왼쪽으로 붉은색에 커다란 고무 대야가 놓여 있고 그 위쪽으로 노랗고 짧은 호수를 끼운 수도가 있었다. 그 수돗가 뒤쪽으로 네다섯 개의 작은 계단을 올라가면 너른 장독대가 있었다. 간장, 된장, 고추장들이 담긴 갈색의 항아리들이 옹기종기 놓여 있던 장독대를 돌아 위쪽으로 좁은 길을 지나면 우리 집 부엌이 나왔다. 엄마가 매일 무언가를 뚝딱 하고 요리해 내던 부엌....
낡은 옷으로 꽁꽁 동여맨 수도에 물 방울이 똑똑 떨어지던 추운 겨울 지나 따뜻한 봄이 오면 엄마의 심부름으로  장독대에서 간장, 된장, 고추장을 퍼서 부엌으로 가고는 했다. 작은 그릇과 수저를 들고 장독대 위에 서면 옆집 장다리 언니네 담장에서 넘어온 라일락이 보기 좋게 장독 항아리 위에 머물러 있었고 집 건너편 세나네 빵집에서 건너오던 달콤한 단팥빵 냄새와 우리 집 부엌에서 나는 된장찌개 냄새가 뒤섞여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단짠단짠 한 냄새가 나고는 했다. 엄마의 부엌이 보이는 장독대에 앉아 나는 동화책을 읽기도 하고 옆집에서 넘어온 라일락 꽃을 따서 흙을 섞어 엄마처럼 요리를 하는 소꿉놀이를 하기도 했다. 나는 그곳을 비밀의 화원이라 불렀다.



내 어린 시절 아지트 이자 비밀의 화원이던 장독대를 추억하다 보니 어느새 국물에 담긴 채소들이 익어 가는 냄새가 난다. 그때처럼 엄마가 담은 국간장은 아니지만 간장 두 스푼과 소금 작은 스푼을 넣는다.

음.. 진한 국물맛이 이제 수제비를 떼어 내기 알맞은 타이밍이다.

얇은 랩을 씌어 두었던 참기름 머금은 반죽은 쭉 욱 죽 길게 잘도 늘어 난다.

막내는 얇게 늘어난 수제비 반죽을 모양도 다양하게 떼어 낸다

그 반죽이 국에 들어가 익을 무렵이면 좀 전의 모습과 다른 모습일 텐데도 막내의 정성을 다하는 진지한 모습에 웃음을 베어 문다. 나는 꼼꼼하게 모양을 체크하며 수제비를 떼어 내는 기특한 막내를 재촉하지 않고 먼저 들어간 수제비와 나중에 들어간 수제비가 잘 섞여 익을 수 있도록 국자로 휘휘 저어 준다.

주문을 외우는 요술쟁이 할머니처럼...

그리고는 국물이 지 않게 불 온도를 살짝 낮추어 본다.

국물 위로 소리 없이 떠오르는 막내의 수제비들을 보며 장독대에서 놀던 그때의 추억 한 자락이 다시 말없이 다가온다.

그날도 지금처럼 비가 오는 날이었다. 


장독대가 놀이터이던 어린 시절 늘 엄마가 요리하는 것이 보이던 부엌은 내게 신비한 공간이었다.엄마의 도마 위에서 노래처럼 경쾌하게 들려오던 통통통 소리들과 맛난 냄새가 솔솔 풍기던 곤로에서 보글보글 무언가 끓고 나면 하나 둘 맛난 음식들이 생겨 나고는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전기밥솥이라는 것이 집에 생겼다. 금성전자라고 쓰여 있던 커다란 밥솥은 쌀을 씻어 물을 부어 넣고 뚜껑을 닫아 전기만 꽂아 두면 밥이 되고는 했다. 엄마의 부엌에 있던 작은 곤로 위 누런 냄비에 밥을 할 때처럼 순간적으로 하얀 밥물이 부서지는 파도 처럼 끓어오르는 것이 보이 지도 않고 솥뚜껑을 닫아 주어야 하지도 않는데 말이다.

비가 내리던 어느 날 엄마가 동생들을 데리고 외출을 했다. 나는 집에 돌아온 엄마가 따뜻한 수제비 한 그릇을 받아 들고 기뻐하지 않을까 상상 하며 그 전기밥솥에 엄마처럼 밀가루 반죽을 해서 수제비를 만들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 나는 커다랗고 신기한 전기밥솥에 물을 담고 우리 막내처럼 열심히 반죽해서 수제비 반죽을 떼어 넣고는 전기밥솥에 뚜껑을 닫고 엄마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설레이는 마음으로...


그런데... 그때의 어린 나는 모르는 것이 하나 있었다.

수제비는 끓는 국물에 반죽을 떼어 넣어야 하고,보온 기능으로 켜져 있던 전기밥솥은 세상 기다려도 끓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이다.

전기만 꽂으면 저절로 끓어서 밥이 되듯 수제비도 그렇게 될 줄 알았던 나는 전기밥솥 가득 밍 큰 한 물속에 퍼져 있던 풀떼기 들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울지도 웃지도 못하고 잔뜩 실망해 있는 딸내미를 보고 엄마는 이렇게 이야기했었다."우리 딸이 처음으로 엄마를 위해 만들어준 요리네 대단 한데 엄마는 벌써 눈으로 맛나게 다 먹었어 고마워 딸"
그 수제비 라 쓰고 풀떼기라 읽는 수제비가 지금 독일의 문환센터에서 한국요리 강사로 일하고 있는 나의 생애 첫 요리였다.

만약, 그날 엄마가 활짝 웃으며 기뻐하지 않았다면 지금처럼 내가 요리를 하며 마냥 행복해 할 수 있었을까?

우리가 누군가를 위해 요리를 할 때면 그 안에는 우리도 모르는 특별한 조미료가 들어간다 그 감칠맛을 더하는 조미료를 우리는 정성이라, 사랑이라 부른다.

그때의 나처럼 사랑을 녹여 넣은 막내의 수제비가 다 되었다.

그때보다 훨씬 그럴듯한 모습과 맛난 자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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